믿음을 행하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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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1-28 17:00
*** 믿음을 행하는 사람 / 약 2:18-26
** 들어가는 말
야고보서 2:18-26,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며칠 전, 극동방송을 듣는 중에 ‘어떤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진행자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진행자가 얼마 전에 후배 신입사원을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는 헤어지면서 “다음에 연락할 테니 그때 같이 식사라도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어저께 그 후배 신입사원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언니, 저번에 연락할 테니 식사 같이 하자고 해서 기다렸는데 연락이 안 와서 전화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진행자는 당황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여러 생각들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말은 인사치레로 한 것이었는데, 순진한 후배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겉치레적인 약속, 겉치레적인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너무 쉽게 해버립니다. ‘다음에 잘 대접하겠습니다.’ ‘다음에 꼭 해드리겠습니다.’ ‘꼭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등등. 체면치레로, 위기모면용으로, 인사치레로, 등등. 어떻든 이들의 공통점은 애당초 지킬 생각도 없이 남발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신실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까지도 겉치레로 변하고 있습니다. 겉치레 신앙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무능력한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디모데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세에 일어날 불신앙적인 현상”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말세는 경건한 신앙의 모양은 갖추었지만, 믿음의 능력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는 형식적인 신앙의 시대가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형식적인 무능한 신앙에 빠져들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11:12절의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으로 기대하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은 모아서 쌓아두거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용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믿음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림 속의 떡’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실행하는 사람에게만 능력이 됩니다.
‘허브 윌러’가 쓴 ‘Connecting with God(하나님과의 연결)’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적한, 아주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마을에 나이트클럽이 들어왔습니다. 나이트클럽이 개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큰 걱정에 빠졌습니다. 그 술집 때문에 평화롭던 마을이 밤늦도록 시끄러울 것이고, 젊은이들은 타락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훤했기 때문입니다.
마을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철야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합심기도를 하면서 성도들은 “하나님, 우리 마을의 나이트클럽을 불태워주십시오. 그래서 이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 마을을 건져주십시오.”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면서 나이트클럽이 정말로 벼락을 맞아서 불타버렸습니다. 나이트클럽 주인은 ‘마을교회가 자신의 영업소를 불타게 해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교회를 상대로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우리가 기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도 때문에 나이트클럽이 불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책임을 부정했습니다. 양쪽의 주장을 다 들은 재판장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가 범죄를 했던지 간에 분명한 것은 나이트클럽의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는데, 교회의 교인들은 기도의 능력은 완전히 부정하고 있군요. 내가 보기에는 나이트클럽 주인의 믿음이 더 훨씬 훌륭합니다.”
이러한 경우가 전형적인 ‘겉치레 신앙’의 모습입니다. 기도하면서도 기도에 대한 응답을 꿈꾸지 않습니다.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배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을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기대하지도 않는 이러한 신앙은 자신의 믿음을 무능하게 가두어버리는 것입니다. 빛은 어두울 때 필요하며, 소금은 맛을 내고자 할 때에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불신의 시대에는 진실한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길인지를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1. 왜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본문 21-23절을 봅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믿음이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모든 곳에는 믿음이라는 통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왔던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선포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기계를 움직이는 전기가 전선을 통하여 흐르듯이, 믿음이란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는 통로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시듯이,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입니다.
믿음이 이처럼 위대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합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에 사실로 인정하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을 과학적으로 실험하고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추상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는 한, 아무리 훌륭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능력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즉 믿음이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행해져야만 합니다.
중세 수도원 시대에 ‘안토니’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일생을 보내기 위하여 사막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일과 기도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뜨거운 한 낮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안토니, 그대의 아름다운 생활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데 저쪽 한 도시에는 그대보다 더 신앙이 깊은 사람이 있다.”
안토니는 자기보다 더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것이 더 경건한 삶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음성이 다시 들렸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네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안토니는 자신보다 더 경건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는 길을 떠나서 사막을 지나고 어떤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존’이라는 이름의 구두 수선공을 만났습니다. 안토니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기에 그 덕행이 하늘에까지 알려졌습니까?” 그 사람은 ‘자신은 아무것도 한일이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구두 한 켤레를 수선할 때마다 예수님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수선한 것뿐이랍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시겠지요? 믿음을 행하지 않은 채로 자신 속에 가두어두는 행위는 불신의 행위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6:5-6절을 봅시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 능력의 주님께서 아무 권능도 행하 실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고향에 오셨는데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가복음 9: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을 행하는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행함을 통하여 온전케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까?
2. 어떻게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본문 25절을 봅시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에 살던 기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공격하기 전에 성을 살피기 위하여 정탐군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탐군들이 여리고 군인들에게 발각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성벽 위에 집이 있었던 기생 라합이 정탐군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이 일은 라합으로서는 생명을 건 위험한 행위였으며, 자기 백성을 배반하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점령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라합은 비록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믿음을 머릿속에 그리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군들을 숨겨줌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실천했습니다. 라합과 그 가족들은 라합이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서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한 곳, 사무엘상 1장에 경건한 사람 엘가나와 그의 아내 한나의 이야기가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나는 결혼한 지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0절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라고 한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지키던 엘리 제사장이 가만히 보니, 젊은 여인이 대낮부터 훌쩍거리며 울고 있는 것이 술에 취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호통을 칩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을 안 엘리 제사장은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한나를 축복했습니다. 그 다음의 행위가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행위입니다. 사무엘상 1: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여러분, 아브라함이나 라합이나 한나, 이 모두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입니다. 즉 믿음을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행동했습니다. 라합은 지금까지 보고 듣고 깨달은 자신의 믿음을 적군의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기도와 함께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이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과 제사장의 축복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마음에 담긴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아픔들을 주님께 아뢰고 비워버리십시오. 집으로 가면서 다시 염려와 근심거리들을 주워 담아 가지 말고 비워버리십시오. 내 마음이 비워져야 하나님의 응답으로 채워질 것이 아닙니까!
어떤 권사님이 갑자기 다리가 마비되듯이 아파왔습니다. ‘곧 낫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갈수록 더 많이 아파서 이제는 걸음도 잘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다리를 고쳐주십시오. 지금 봉사하러 가야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쳐주실 줄 믿고 병원비 백만 원을 헌금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그 날의 일정표대로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아프던 다리가 전혀 아프지 않은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잘 걸어 다닌 것입니다. 권사님은 50년이 넘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이제야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갈망하십니까? 하나님을 진실로 기뻐하고 신뢰하고 의뢰합니까?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 가정의 가장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까? 그리고 내가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힘과 능력이 되셔서 모든 것을 맡아주실 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대로 행하십시오. 걱정과 염려, 근심과 고통의 일들일랑은 빌립보서의 말씀대로 모든 간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이루심을 믿고 행동하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행동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민수기 14:28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이루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믿음을 성령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맡긴 빈손’이어야 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시고 거두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듯이, 우리에게 일을 주시고 행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내게 일을 맡기시고 행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병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리하여 이 불신의 시대에 하나님께 꼭 필요한 믿음을 행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야고보서 2:18-26,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며칠 전, 극동방송을 듣는 중에 ‘어떤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진행자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진행자가 얼마 전에 후배 신입사원을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는 헤어지면서 “다음에 연락할 테니 그때 같이 식사라도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어저께 그 후배 신입사원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언니, 저번에 연락할 테니 식사 같이 하자고 해서 기다렸는데 연락이 안 와서 전화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진행자는 당황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여러 생각들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말은 인사치레로 한 것이었는데, 순진한 후배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겉치레적인 약속, 겉치레적인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너무 쉽게 해버립니다. ‘다음에 잘 대접하겠습니다.’ ‘다음에 꼭 해드리겠습니다.’ ‘꼭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등등. 체면치레로, 위기모면용으로, 인사치레로, 등등. 어떻든 이들의 공통점은 애당초 지킬 생각도 없이 남발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신실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까지도 겉치레로 변하고 있습니다. 겉치레 신앙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무능력한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디모데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세에 일어날 불신앙적인 현상”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말세는 경건한 신앙의 모양은 갖추었지만, 믿음의 능력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는 형식적인 신앙의 시대가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형식적인 무능한 신앙에 빠져들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11:12절의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으로 기대하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은 모아서 쌓아두거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용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믿음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림 속의 떡’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실행하는 사람에게만 능력이 됩니다.
‘허브 윌러’가 쓴 ‘Connecting with God(하나님과의 연결)’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적한, 아주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마을에 나이트클럽이 들어왔습니다. 나이트클럽이 개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큰 걱정에 빠졌습니다. 그 술집 때문에 평화롭던 마을이 밤늦도록 시끄러울 것이고, 젊은이들은 타락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훤했기 때문입니다.
마을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철야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합심기도를 하면서 성도들은 “하나님, 우리 마을의 나이트클럽을 불태워주십시오. 그래서 이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 마을을 건져주십시오.”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면서 나이트클럽이 정말로 벼락을 맞아서 불타버렸습니다. 나이트클럽 주인은 ‘마을교회가 자신의 영업소를 불타게 해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교회를 상대로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우리가 기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도 때문에 나이트클럽이 불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책임을 부정했습니다. 양쪽의 주장을 다 들은 재판장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가 범죄를 했던지 간에 분명한 것은 나이트클럽의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는데, 교회의 교인들은 기도의 능력은 완전히 부정하고 있군요. 내가 보기에는 나이트클럽 주인의 믿음이 더 훨씬 훌륭합니다.”
이러한 경우가 전형적인 ‘겉치레 신앙’의 모습입니다. 기도하면서도 기도에 대한 응답을 꿈꾸지 않습니다.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배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을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기대하지도 않는 이러한 신앙은 자신의 믿음을 무능하게 가두어버리는 것입니다. 빛은 어두울 때 필요하며, 소금은 맛을 내고자 할 때에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불신의 시대에는 진실한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길인지를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1. 왜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본문 21-23절을 봅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믿음이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모든 곳에는 믿음이라는 통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왔던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선포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기계를 움직이는 전기가 전선을 통하여 흐르듯이, 믿음이란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는 통로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시듯이,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입니다.
믿음이 이처럼 위대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합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에 사실로 인정하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을 과학적으로 실험하고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추상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는 한, 아무리 훌륭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능력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즉 믿음이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행해져야만 합니다.
중세 수도원 시대에 ‘안토니’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일생을 보내기 위하여 사막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일과 기도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뜨거운 한 낮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안토니, 그대의 아름다운 생활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데 저쪽 한 도시에는 그대보다 더 신앙이 깊은 사람이 있다.”
안토니는 자기보다 더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것이 더 경건한 삶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음성이 다시 들렸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네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안토니는 자신보다 더 경건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는 길을 떠나서 사막을 지나고 어떤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존’이라는 이름의 구두 수선공을 만났습니다. 안토니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기에 그 덕행이 하늘에까지 알려졌습니까?” 그 사람은 ‘자신은 아무것도 한일이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구두 한 켤레를 수선할 때마다 예수님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수선한 것뿐이랍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시겠지요? 믿음을 행하지 않은 채로 자신 속에 가두어두는 행위는 불신의 행위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6:5-6절을 봅시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 능력의 주님께서 아무 권능도 행하 실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고향에 오셨는데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가복음 9: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을 행하는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행함을 통하여 온전케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까?
2. 어떻게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본문 25절을 봅시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에 살던 기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공격하기 전에 성을 살피기 위하여 정탐군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탐군들이 여리고 군인들에게 발각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성벽 위에 집이 있었던 기생 라합이 정탐군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이 일은 라합으로서는 생명을 건 위험한 행위였으며, 자기 백성을 배반하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점령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라합은 비록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믿음을 머릿속에 그리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군들을 숨겨줌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실천했습니다. 라합과 그 가족들은 라합이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서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한 곳, 사무엘상 1장에 경건한 사람 엘가나와 그의 아내 한나의 이야기가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나는 결혼한 지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0절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라고 한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지키던 엘리 제사장이 가만히 보니, 젊은 여인이 대낮부터 훌쩍거리며 울고 있는 것이 술에 취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호통을 칩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을 안 엘리 제사장은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한나를 축복했습니다. 그 다음의 행위가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행위입니다. 사무엘상 1: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여러분, 아브라함이나 라합이나 한나, 이 모두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입니다. 즉 믿음을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행동했습니다. 라합은 지금까지 보고 듣고 깨달은 자신의 믿음을 적군의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기도와 함께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이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과 제사장의 축복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마음에 담긴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아픔들을 주님께 아뢰고 비워버리십시오. 집으로 가면서 다시 염려와 근심거리들을 주워 담아 가지 말고 비워버리십시오. 내 마음이 비워져야 하나님의 응답으로 채워질 것이 아닙니까!
어떤 권사님이 갑자기 다리가 마비되듯이 아파왔습니다. ‘곧 낫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갈수록 더 많이 아파서 이제는 걸음도 잘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다리를 고쳐주십시오. 지금 봉사하러 가야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쳐주실 줄 믿고 병원비 백만 원을 헌금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그 날의 일정표대로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아프던 다리가 전혀 아프지 않은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잘 걸어 다닌 것입니다. 권사님은 50년이 넘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이제야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갈망하십니까? 하나님을 진실로 기뻐하고 신뢰하고 의뢰합니까?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 가정의 가장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까? 그리고 내가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힘과 능력이 되셔서 모든 것을 맡아주실 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대로 행하십시오. 걱정과 염려, 근심과 고통의 일들일랑은 빌립보서의 말씀대로 모든 간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이루심을 믿고 행동하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행동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민수기 14:28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이루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믿음을 성령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맡긴 빈손’이어야 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시고 거두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듯이, 우리에게 일을 주시고 행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내게 일을 맡기시고 행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병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리하여 이 불신의 시대에 하나님께 꼭 필요한 믿음을 행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