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무엇에 연연하십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990회 작성일 2007-01-22 00:11
*** 무엇에 연연하십니까?  / 요일 2:12-17

** 들어가는 말
요일 2:12-17,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감히 하나님께 말싸움을 건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모세한테 했던 것처럼 떨기나무에 불을 붙여 보십시오, 그러면 따르겠습니다. 여호수아한테 했던 것처럼 성벽을 무너뜨려 보십시오, 하나님. 그러면 싸우겠습니다. 갈릴리에서 했던 것처럼 파도를 잔잔케 해보십시오, 하나님. 그러면 듣겠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떨기나무 옆에, 성벽 근처에, 바닷가에 앉아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지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을 보내셨습니다. 떨기나무에 붙일 불이 아니라 교회에 붙일 성령의 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돌로 만든 벽이 아니라 죄의 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바다의 폭풍이 아니라 영혼의 폭풍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반응을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리시고…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마음이 아니라 떨기나무를, 삶이 아니라 벽돌을, 영혼이 아니라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자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보며 물었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잃으셨나요?”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과 귀를 잃었느냐?”

성도와 하나님의 ‘동상이몽(同床異夢)’입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장단이 맞아야 춤도 출 수가 있고” “손발이 맞아야 고생을 덜 하지요.” 이 사람은 무엇인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를 구별 못하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나를 믿어 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본향을 잃어버리고 저주의 죽음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살 길을 마련하시고 “이 길로 오면 살 수 있다.”고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해하는 인생들을 위하여 이사야 55:8-9절에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 자신의 보다 나은 삶과 영원한 생명을 위한다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들은 자신의 눈과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면서 하나님마저 자신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억지를 부립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마저 움직여 보려하는 고집스러운 자신만의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집착하고 연연해하는 것입니다. “놓아버려야겠는데”라고 하면서도 계속 붙잡고 있는 것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 마음이 계속 어떤 것에 연연한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롯의 아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롯의 가족이 불의 심판을 받는 소돔 성에서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내는 하나님의 사자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우리가 떠나온 세상이며,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는 세상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롯의 아내는 떠나온 세상에서의 삶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9:62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본문 15절에서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러시아의 작가인 ‘고골리’가 1842년에 발표한 ‘외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추운 지방의 어떤 하급 관리가 외투를 사기 위해 철저하게 절약했습니다. 그는 음료수도 사먹지 않았습니다. 전기료를 물지 않기 위해 다른 곳에서 머물다가 집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심지어 구두 뒤축을 닳게 하지 않으려고 살살 걸어 다녔습니다.
이렇게 아끼고 모아서 겨우 외투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적이 들어서 그 아끼는 외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는 오늘의 사람들이 의지하는 ‘물질세계’에 대한 비유적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경우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허무한 세상의 삶에 연연하면서 살아갑니다. 사업실패를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들, 학교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학생들, 가난을 비관하여 동반 자살하는 가족, 불공평한 세상을 비난하며 악의 길로 빠지는 사람들, 자포자기하면서 술과 마약에 빠지는 젊은이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이기주의들 등등. 이런 모습들이 세상에 연연한 모습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세상과 타협하는 현실적인 신앙에 빠져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성도들이 세상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1. 성도가 세상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14절을 봅시다.(공동번역) “12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13 아버지 된 사람들이여,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이 이미 악마를 이겼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14 어린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 된 사람들이여,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니고 살며 악마를 이겨 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이 말씀에서는 “아이들”, “청년들”, “장년들” 이 세 부류의 신앙단계를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같은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신앙의 정도는 각각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위나 능력 면에서 동일하지 않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어린아이도 있고, 신앙의 활동이 왕성한 청년도 있고, 깊이 있는 신앙을 가진 영적인 어른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정도는 다르다 할지라도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속했지만 사도 요한은 신앙의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른 권면을 합니다.

1) 신앙의 어린아이들에게 권면합니다.
12절의 “자녀들”이라는 말은 ‘신앙의 개종자들’, ‘소자’, ‘유아’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이들은 믿음의 초보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어린아이들입니다. 사도요한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어린아이의 단계에 있는 자들에게 편지를 쓴 목적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2절). 아직 신앙이 어린 성도는 자신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여전히 죄 안에서 고민하며 좌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는 신앙의 어린아이들에게 죄 사함의 사실을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그 순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이미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14절). 이 사실은 성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뿐입니다. 갈라디아서 4:6절에서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2) 신앙의 장년들에게 권면합니다.
13,14절에서 두 번을 동일하게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신앙의 어른은 ‘하나님을 깊이 아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10절에서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신앙의 성년이 ‘하나님을 깊이 아는 자’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성도일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신앙의 어린아이들을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3) 신앙의 청년들에게 권면합니다.
신앙의 활동이 왕성한 젊은이들에게는 ‘전투적’인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신앙의 젊은이들은 사단의 세력과 담대하게 맞서는 병사들입니다. 이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활동하면서 세상을 정복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말씀으로 무장하여 사단의 세력을 대항하여 싸우는 그리스도의 용사여야 합니다. 사회에서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고, 섬기는 신앙의 활동가여야 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 해야 할 일은 다르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같습니다. 세상에 연연하면서는 결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성도가 세상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5-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씀은 앞서 세 부류의 신앙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권면한 말씀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신앙의 어린아이이든, 젊은이이든, 장년이든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당연히 세상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사랑하든지,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서로 반대편을 향하고 있는 것이며, 성도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는 없습니다. 만일 세상에 남겨져서 세상과 운명을 함께 하기를 원한다면 세상에 연연한 채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것들을 뒤로 하고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세상일을 도무지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것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라는 말입니다. 즉 모든 일을 하나님의 나라에 목적을 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야고보서 1: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으로 대변되는 세 가지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일반적으로 ‘향락’이라고 표현됩니다. 안목의 정욕은 ‘탐욕’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신을 나타내고 드러내려는 ‘공명심’입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사랑이나 욕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세상과 함께 사라질 것들입니다. 세상 것을 사랑하면 사라지는 세상과 함께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법률가로 대성한 사람이 은퇴하던 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근심으로 가득한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말했습니다.
“다들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슬프다네. 나는 본래 무용수가 되고 싶었어. 결국 나는 원하지 않는 것에 일생을 소비했고 이제 그것을 놓쳐 버렸네. 나는 우유보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온 세상이 우유가 더 좋다고 강요하는 바람에 물 컵을 두고도 우유만 마셔댄 거야.”

그렇습니다. 육신의 삶에 강요당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후회만 남을 것입니다. 뱀처럼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사람은 땅 위의 수풀이나 먼지밖에 눈에 띄지 않습니다. 멀리 넓은 곳을 보려면 독수리처럼 높이 날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삶에만 잠겨 사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살지 말고, 영원한 세계를 보는 영의 사람으로 삽시다. 잠시 있을 세상에 연연하다가 영원한 행복을 잃어버리는 미련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갈망하는 소망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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