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달린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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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1-13 23:46
** 십자가에 달린 사람 / 갈라디아서 5:22-6:1
** 들어가는 말
갈 5:22-6:1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말씀을 시작하면서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 중에 감동적인 기도를 소개합니다.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첫째,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의 맛을 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주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몸으로 깨닫게 해 주십시오. 두 번째는 당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그처럼 참으셨던 일, 그 불타는 듯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우리 죄인들을 향하신 뜨겁게 불타는 사랑이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으로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이런 기도를 해보지 못했고, 주님처럼 뜨거운 사랑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더 부끄럽고 가슴이 저린가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한 말씀을 깊이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먼저 회개하며,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주님의 사랑을 닮기를 원하고, 한 편으로는 우리 성도 모두가 이런 사랑의 감동으로 가득 찬 생활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예전에 교회학교에서 부르던 찬송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남의 말 내가 하면 그 말이 돌아오고 남의 흉 내가 보면 나도 흉을 잡힌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고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단다. 예수님이 우리게 내 귀에 속삭이신다. 대접을 받으려면 남을 대접하여라.” 이 노래는 산상수훈인 마태복음 7:1-2절과 그 중에서도 신약의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12절 내용을 근본으로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는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삶의 방식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이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황금만능주의’, “네가 나에게 한만큼 갚아주겠다.”고 하는 ‘보복주의’, “강한 것은 강한 것으로 대해야 한다.”는 ‘힘의 논리’ 등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38절 이하에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흔들림이 없고, 육신의 생활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부드러운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이 곧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의 삶이며,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그 순간부터 이미 ‘십자가에 달린 사람’입니다. 한없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본문 24절의 말씀처럼 세상적인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옥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안 죽는다.’는데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꿈도 많고, 계획도 많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는 오직 두 가지만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살펴봅시다.
1.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본문 24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독일의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본회퍼(Bon haeffer)’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하다 순교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습니다. 이 분은 “값싼 은총은 교회의 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귀한 은총을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값싼 은총’이란, 십자가가 없는 은총, 즉 고난이 없는 만사형통만을 원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갈망합니다. 머리 속에는 십자가도 있고, 헌신도 있고, 희생도, 봉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 속 어디에서도 십자가를 진 희생과 섬김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앙갚음을 하려하고, 지고는 못살고, 남을 위하는 희생적인 삶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내가 잘 되고, 내가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누리려고 합니다. 마치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이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게 해 달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시몬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내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저주합니다. 이것이 고난 없이 영광을 누리려는 값싼 은총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이러한 세상의 영광과 부귀영화로부터 죽었습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평안과 안일을 바라는 육신의 삶이 죽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것이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세례는 육신을 위하여 살던 옛 사람이 죽었음을 증명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영의 사람으로 살아난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자신은 이미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가사로 된 복음송을 나 자신의 고백으로 생각하며 한 번 불러봅시다.
방금 부른 노래 말처럼 여러분은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아니면 아직은 죽지 못했지만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믿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아직 십자가를 지고 가는 중입니까? 다른 사람의 삶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힘겹게 지고 가고 있는지요.
어떤 그리스도인인 젊은이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너무 무거운 십자가를 지우셨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 아들아, 그것이 너무 무겁다면 여기에 내려놓아라.” 청년은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저기 보이는 많은 십자가 중에서 네가 가지고 갈 만한 것을 하나 골라 보아라.” 거기에는 크고 작은 여러 십자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가장 작은 십자가 하나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하나님, 저는 이것을 갖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그것은 방금 네가 내려놓은 십자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십자가를 지우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십자가 없이 갈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24절예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죽이고, 자신의 자아를 죽이고,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고, 자신의 삶을 주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어야 산다는 진리이며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삶입니다.
2.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만 있습니다.
본문 25-26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삶의 방식을 가르치십니다. 즉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는 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지시와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본문 22-2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는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서론에서 잠깐 말씀드린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흔들림이 없고, 육신의 생활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부드러운 삶입니다. 부드러운 삶이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떤 경우에도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포용하는 인격적인 삶입니다.
교육학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에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교수가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하여 얻은 이론을 말합니다.
하아로우 교수는 엄마 원숭이 대신에 두 개의 원숭이 인형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든 딱딱한 인형이었고 다른 하나는 솜과 천으로 만든 부드러운 인형이었습니다. 그는 인형의 가슴속에 젖병을 넣어 아기원숭이들에게 내밀었습니다. 첫째 날에는 아기원숭이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인형의 젖을 모두 빨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날부터는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아기원숭이들이 철사인형 근처로는 접근하지 않고 모두 솜 인형으로만 몰려들었습니다.
하아로우 교수는 실험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짐승들도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좋아한다. 모든 동물은 포근하고 따뜻한 것을 좋아한다.”
동물들만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따지고 날카롭고 차가운 사람에게는 친구들이 몰리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마태복음 11:2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저주하며 배반하는 베드로를 용서하시며 품어주셨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스데반 집사도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용서했습니다. 이것이 왼뺨을 돌려대며, 겉옷까지 주며, 십리까지 동행하는 부드러운 삶입니다. 그리고 싫든지 좋든지, 쉽든지 어렵든지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이 삶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 십자가에 달리는 것, 이것은 자발적인 순종의 행위입니다. 다른 하나는 십자가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을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받는 한 성도가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힘겹게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성도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시 주님을 따라가서 간청했습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받쳐 들고 한걸음 한걸음 묵묵히 걷기만 하셨습니다. 성도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매신채로 걸음을 멈추더니 성도에게로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러고는 그 성도가 예수님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그 사랑받는 성도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곳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있던 십자가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가 물었습니다. 주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꼭 같단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소자에게 한 선행이 주님께 한 것이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 자신이 주님처럼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합시다. 혹시 다른 성도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게 되면 본문 마지막 절인 6:1절을 생각합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내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역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른 길로 인도하고, 자신의 삶도 혹시 어그러지지 않았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성도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이 길을 함께 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갈 5:22-6:1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말씀을 시작하면서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 중에 감동적인 기도를 소개합니다.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첫째,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의 맛을 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주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몸으로 깨닫게 해 주십시오. 두 번째는 당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그처럼 참으셨던 일, 그 불타는 듯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우리 죄인들을 향하신 뜨겁게 불타는 사랑이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으로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이런 기도를 해보지 못했고, 주님처럼 뜨거운 사랑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더 부끄럽고 가슴이 저린가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한 말씀을 깊이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먼저 회개하며,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주님의 사랑을 닮기를 원하고, 한 편으로는 우리 성도 모두가 이런 사랑의 감동으로 가득 찬 생활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예전에 교회학교에서 부르던 찬송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남의 말 내가 하면 그 말이 돌아오고 남의 흉 내가 보면 나도 흉을 잡힌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고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단다. 예수님이 우리게 내 귀에 속삭이신다. 대접을 받으려면 남을 대접하여라.” 이 노래는 산상수훈인 마태복음 7:1-2절과 그 중에서도 신약의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12절 내용을 근본으로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는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삶의 방식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이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황금만능주의’, “네가 나에게 한만큼 갚아주겠다.”고 하는 ‘보복주의’, “강한 것은 강한 것으로 대해야 한다.”는 ‘힘의 논리’ 등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38절 이하에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흔들림이 없고, 육신의 생활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부드러운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이 곧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의 삶이며,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그 순간부터 이미 ‘십자가에 달린 사람’입니다. 한없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본문 24절의 말씀처럼 세상적인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옥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안 죽는다.’는데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꿈도 많고, 계획도 많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는 오직 두 가지만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살펴봅시다.
1.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본문 24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독일의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본회퍼(Bon haeffer)’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하다 순교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습니다. 이 분은 “값싼 은총은 교회의 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귀한 은총을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값싼 은총’이란, 십자가가 없는 은총, 즉 고난이 없는 만사형통만을 원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갈망합니다. 머리 속에는 십자가도 있고, 헌신도 있고, 희생도, 봉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 속 어디에서도 십자가를 진 희생과 섬김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앙갚음을 하려하고, 지고는 못살고, 남을 위하는 희생적인 삶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내가 잘 되고, 내가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누리려고 합니다. 마치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이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게 해 달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시몬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내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저주합니다. 이것이 고난 없이 영광을 누리려는 값싼 은총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이러한 세상의 영광과 부귀영화로부터 죽었습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평안과 안일을 바라는 육신의 삶이 죽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것이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세례는 육신을 위하여 살던 옛 사람이 죽었음을 증명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영의 사람으로 살아난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자신은 이미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가사로 된 복음송을 나 자신의 고백으로 생각하며 한 번 불러봅시다.
방금 부른 노래 말처럼 여러분은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아니면 아직은 죽지 못했지만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믿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아직 십자가를 지고 가는 중입니까? 다른 사람의 삶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힘겹게 지고 가고 있는지요.
어떤 그리스도인인 젊은이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너무 무거운 십자가를 지우셨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 아들아, 그것이 너무 무겁다면 여기에 내려놓아라.” 청년은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저기 보이는 많은 십자가 중에서 네가 가지고 갈 만한 것을 하나 골라 보아라.” 거기에는 크고 작은 여러 십자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가장 작은 십자가 하나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하나님, 저는 이것을 갖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그것은 방금 네가 내려놓은 십자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십자가를 지우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십자가 없이 갈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24절예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죽이고, 자신의 자아를 죽이고,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고, 자신의 삶을 주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어야 산다는 진리이며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삶입니다.
2.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만 있습니다.
본문 25-26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삶의 방식을 가르치십니다. 즉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는 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지시와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본문 22-2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는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서론에서 잠깐 말씀드린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흔들림이 없고, 육신의 생활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부드러운 삶입니다. 부드러운 삶이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떤 경우에도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포용하는 인격적인 삶입니다.
교육학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에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교수가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하여 얻은 이론을 말합니다.
하아로우 교수는 엄마 원숭이 대신에 두 개의 원숭이 인형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든 딱딱한 인형이었고 다른 하나는 솜과 천으로 만든 부드러운 인형이었습니다. 그는 인형의 가슴속에 젖병을 넣어 아기원숭이들에게 내밀었습니다. 첫째 날에는 아기원숭이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인형의 젖을 모두 빨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날부터는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아기원숭이들이 철사인형 근처로는 접근하지 않고 모두 솜 인형으로만 몰려들었습니다.
하아로우 교수는 실험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짐승들도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좋아한다. 모든 동물은 포근하고 따뜻한 것을 좋아한다.”
동물들만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따지고 날카롭고 차가운 사람에게는 친구들이 몰리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마태복음 11:2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저주하며 배반하는 베드로를 용서하시며 품어주셨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스데반 집사도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용서했습니다. 이것이 왼뺨을 돌려대며, 겉옷까지 주며, 십리까지 동행하는 부드러운 삶입니다. 그리고 싫든지 좋든지, 쉽든지 어렵든지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이 삶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 십자가에 달리는 것, 이것은 자발적인 순종의 행위입니다. 다른 하나는 십자가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을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받는 한 성도가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힘겹게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성도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시 주님을 따라가서 간청했습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받쳐 들고 한걸음 한걸음 묵묵히 걷기만 하셨습니다. 성도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매신채로 걸음을 멈추더니 성도에게로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러고는 그 성도가 예수님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그 사랑받는 성도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곳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있던 십자가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가 물었습니다. 주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꼭 같단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소자에게 한 선행이 주님께 한 것이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 자신이 주님처럼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합시다. 혹시 다른 성도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게 되면 본문 마지막 절인 6:1절을 생각합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내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역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른 길로 인도하고, 자신의 삶도 혹시 어그러지지 않았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성도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이 길을 함께 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