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용서와 화해의 마음으로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791회 작성일 2007-01-01 23:14
*** 용서와 화해의 마음으로 / 마 18:21-35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러분은 연말정산 하셨습니까? 해마다 연말이 되면 직장인들의 연말정산이 시작됩니다. 일년 동안의 수입을 계산하고, 국가에서 인정하는 필수 지출과 기부성 지출을 뺀 나머지 수입에 대한 종합세금이 부과됩니다. 이미 매월 수입에서 공제했던 세금이 종합세금보다 많으면 나머지를 돌려받게 되고, 적으면 더 내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금전적인 정산은 하는데 일년 동안의 생활에 대한 정산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연말 생활정산이란 연내에 꼭 해야 했지만 여러 이유로 미루어 놓았던 일들,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미움과 다툼으로 멀어져 있거나 서먹해져 있는 마음의 일들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도들은 마음의 정산을 잘 해야 합니다. 옛 성현의 말에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 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매일의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일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해를 넘기면서 전체를 돌아보는 일 또한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3:13절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하심같이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마음의 정산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내용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죄에 대한 경고와 죄에 대한 처리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죄의 처리가 중요한 이유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정도면 사람으로서는 정말 파격적인 제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더 파격적이었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숫자적인 제한이 아니라, 무제한 적인 용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서의 정산 법을 확실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느 나라의 임금이 나라살림을 정산하는 과정에서 빚을 많이 진 한 신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려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하는 그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처자와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잃어버릴 처지가 된 신하는 엎드려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어떻게 해서라도 갚겠습니다.’라고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임금이 그 신하를 불쌍히 여겨서 그 많은 빚을 ‘없는 것’으로 탕감해 주었습니다. 빚진 신하에게는 정말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 신하는 꿈만 같은 기분으로 돌아가던 길에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을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대뜸 그 빚진 친구의 멱살을 잡고는 ‘빚을 갚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빚진 친구는 엎드려서 ‘조금만 더 참아주소서. 갚겠습니다.’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탕감 받은 친구는 그를 고소하여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이 일을 지켜 본 다른 관리들이 너무나 민망하여 임금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임금은 노발대발하여 빚을 탕감하여 주었던 신하를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하고는 탕감했던 것을 취소하고는 빚을 다 갚도록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이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님은 결론으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 전에 가르치셨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18절 말씀의 반복이며 확정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죄에 대한 경고와 죄에 대한 처리법’의 근본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이는 18장을 시작하는 지점과 계속되는 구절에서 반복적으로 기록되고 있는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18장 시작점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18:3-4)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6절, 10절, 14절에서 반복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소자, 즉 소외되고 보잘 것 없는 한 사람까지도 귀하게 여기시고 찾아다니셨습니다. 버림받은 자들, 각색 병자들, 지역적으로 또는 신분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으며 그들을 고치시고 도우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해관계를 따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하고, 판단하여 실족시키고 있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고 생활방식이 다르면 정죄하거나 편을 갈라버립니다. 작은 이해관계 때문에 등을 돌리고 경멸하고 무시해버립니다. 자신이 조금 더 편하고, 자신의 욕심을 조금 더 채우려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불이익을 당하게 합니다. 자신이 소중하고 자신의 가정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이런 일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이로 인하여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살리고 구원하러 오셨는데 사람들은 서로 평가하고 선을 긋고 분리해버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마가복음 9:38절에서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우리는 서로를 구별할 자격이 없습니다. 구별하시는 분은 오직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14:4절을 봅시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해관계로 판단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 각자는 예수님의 핏 값으로 구원을 받은 주님의 종들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일만 달란트를 빚진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용서와 화해이며 있는 그대로의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 해야 하는 마음정산은 ‘용서와 화해’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기초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사이의 용서와 화해가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고서는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용서와 화해가 없는 마음에는 사단의 무리가 둥지를 틉니다.

‘찰스.H 크래프트’ 목사님은 그의 저서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쓰레기가 있는 곳에는 쥐가 꼬여들듯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상처들, 즉 미움, 원망, 원한, 증오, 분노, 용서 못함 등의 쓰레기가 있으면 그 쓰레기 속에 귀신들이 자리 잡고 여러 가지 문제와 고통을 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용서할 것도 없고 용서 받을 것도 없는, 사람들과 원수진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으로는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고, 등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 생각을 읽으시는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6:7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비웃다, 조롱하다)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은 용서할 것도 없고 용서 받을 것도 없는, 사람들과 원수진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비웃는 교만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광장에서 청중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짐입니다. 참 된 행복은 이 죄의 짐을 벗는 데 있습니다.”
이 때 한 젊은이가 “그 죄책이라는 짐이 몇㎏이나 됩니까? 나야말로 아무 짐도 느끼지 못하니까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청년이여, 만약 죽은 사람 위에 500㎏의 짐을 올려놓으면 그 시체가 그것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그야 못 느끼겠지요.” 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아무 죄책도 느끼지 못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죄책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살아나기 시작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곁들이시면서 까지 제자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가르치신 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심입니다. 그래서 본문 35절에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중심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하는 용서와 화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마음 중심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용서할 때 매인 것이 풀리며, 막힌 것이 열리게 됩니다. 원한을 풀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단비가 내립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막히고, 일이 형통하지 못합니까? 정죄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등지고 사는 사람들이 없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막히고 응답이 없습니까? 사람과의 화해, 하나님과의 화해가 되어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억만장자인 강철 왕 ‘앤드루 카네기’는 자신의 성공비결은 ‘진실한 인간관계’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평생 ‘용서를 인생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청년 때의 소중한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느 날, 그는 거금의 공금이 든 가방을 기차 안에서 분실했습니다. 좌석이 없어 통로 바닥에 앉았는데 잠깐 조는 사이에 가방이 기차 밖으로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다급해진 카네기는 기관사에게 뛰어가 호소했습니다. 이해심 많았던 기관사는 위험을 무릅쓰는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열차를 정지시키고 후진까지 시켜 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개울가에 떨어져 있던 거금의 가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카네기는 이 일을 계기로 중요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저지르지 않는 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의 실수를 품어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는 개울가에서 돈 가방뿐만 아니라 용서와 관용이라는 인생의 보석도 찾았습니다. 이후 카네기의 용서와 관용의 삶은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경영을 풍요롭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서 2: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은 일만 달란트 빚진 신하처럼 ‘무자비한 마음’입니다. 자신은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도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납하지 못했던 무자비한 사람입니다. 신약시대의 일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었으며, 1 데나리온은 남자 장정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대략만 계산해도 일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며, 현재로 환산하면 하루 5만원만 잡아도 3조원이며, 165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벌어야 되는 양입니다. 즉 갚을 수 없는 우리의 죄악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죄를 용서 받았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도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용하는 화해의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정죄하고 판단하고 헤아리며, 원망하고 원한을 품고, 미워하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습니다.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가 많은 나무에 새들과 짐승들이 많이 깃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2006년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하면서 용서와 이해와 관용으로 이루어진 많은 가지를 뻗고, 성령의 열매를 맺읍시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풍성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은총으로 채워지는 2007년을 맞이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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