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오심은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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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12-26 23:28
*** 예수님의 오심은 / 엡 2:11-22
** 들어가는 말
에베소서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탄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기쁨과 평화가 성도 여러분과 가정과 생업에 충만하며, 일년 동안 쌓였던 분노와 아픔과 모든 좌절감들이 주님이 이루신 소망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이후로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느 시골에 물질적으로 유복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어찌하든지 돈을 벌고 물질로 성공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아침 일찍 들에 나가면 저녁 늦게 들어와 잠자리에 드는 단조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정다감하여 예술을 논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는 그런 생활이 불만족스러워, 남편에게 함께 관광을 하자고 늘 간청을 했지만 남편은 무뚝뚝한 태도였습니다. 그런 남편의 태도에 아내는 탄식을 하다못해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부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되었습니다.
맹장을 수술한 뒤에도 부인은 회복되지가 않아 마침내 의사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유는 부인이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편이 자기의 팔을 걷고 수혈을 해주라고 의사에게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같은 형의 피였지만, 시골 병원이었으므로 남편의 팔에서 아내의 팔로 직접 수혈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내는 수혈을 받는 동안에 남편이 말없이 자기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속에 온갖 미운 감정을 씻어낸 뒤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가망이 없는 인간’들에게 소망을 수혈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구간이라는 가장 비천한 곳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 둘 곳도 없는’ 가난하고 천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모두 쏟으시고 고난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빈천한 고난의 생애는 살 소망을 잃고, 죄 아래서 죽음을 기다리는 인류에게 참된 소망과 행복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도 행복도 없습니다. 복음송 중에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정말 세상은 소망을 원하고,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소망도 평화도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혹 평화가 있는 것 같지만, 세상에서 누리는 평화는 잠깐 머무는 것이며, 희망 역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평화를 갈구하고, 희망을 찾아다닙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중에 「힐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인간 행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과 논리, 그리고 지식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려 해도 이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힐티」는 성경을 읽었고, 성경 안에서 참다운 행복 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행복론자가 되었습니다. 77년이라는 인생을 살면서, 그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그 때부터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생활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바로 主안에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며, 찬송하는 시간이 평화로운 시간임을 확실히 깨달아 그의 행복 론에서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77세로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책상머리에는 빛바랜 낡은 성경과 ‘영원한 평화’라는 논문을 쓰다 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힐티라는 분처럼 사람들은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기쁨이나 평화나 성공은 모두 세상에서 잠깐 동안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허전함고 고통을 이겨보려고 술을 마시고 즐거움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그리고 중고등 학생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기쁨도 행복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일등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꼴찌가 차라리 더 낫습니다. 그래서 시편 84:10절에서는 “하나님의 집 뜰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을 보내는 것보다 낫사오니, 못된 짓만 일삼는 것들 집에서 사느니 나는 차라리 내 하나님의 문지기가 되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평화도 행복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세상은 평화로웠으며 기쁨과 행복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신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함께 계셨으며, 기쁨이 충만했고 행복이 넘쳤습니다.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의 뜻이 ‘기쁨’입니다. 에덴동산은 기쁨의 동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단의 꾐에 빠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짓고부터,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웠으며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기쁨도 행복도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 5:12절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는 세상에는 죽음이 있고, 아픔과 고통, 불행, 근심 걱정들이 생겨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생하며 힘들게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아기를 낳는 고통도 주어졌으며, 잘 살고 못사는 사람들, 다스리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기쁨의 동산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해 주시려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이 날, 성탄절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오심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알고 지켜가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1. 예수님의 오심은 버려지는 사람들이 없게 하심입니다.
본문 11-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에베소교인들의 상태가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언약의 약속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상태 그대로였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은 자기 민족 외에는 모두 이방인으로 부르면서 매우 경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 불의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모든 민족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오시기전까지 이방인들은 유대인에게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중간에 막힌 담으로 인해 철저히 막혀 있었고, 말 그대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중간에 막힌 담을 그리스도께서 허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중간에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둘레에는 제사장들의 뜰이 있었고, 뜰 동편에 유대인들의 뜰(유대인 남성을 위한)이 있고, 그리고 조금 더 가서 여인들의 뜰(유대인 여성을 위한)이 있었습니다. 이 세 뜰은 모두 동일한 높이에 있는 뜰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다섯 계단 내려오면 벽이 하나 있고, 벽의 다른 한쪽으로 다시 열네 계단을 내려가면 다른 벽이 또 하나가 있는데, 그 너머가 바로 이방인들의 바깥뜰이었습니다(마26:69). 높이가 1.5미터 가량인 돌로 쌓은 이 벽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곳곳에 \"이 벽을 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결코 성전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12절의 “그 때에”라는 접속사가 바로 그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상태가 바로, 우상과 미련한 세상 풍습과 육체를 따라서 살아갔던 이방인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어두움 가운데서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영원한 형벌을 면치 못하는 처지로 전락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대단한 식견과 야망과 자만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두가 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입니다. 갈라디아 4:3절에서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양자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로마서 8:15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예수님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함입니다.
본문 13-18절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3절의 “이제는” 이라는 접속사는 상황의 반전을 나타냅니다. 즉,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것은 ‘때가 찬 경륜’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때가 찬 경륜’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이루실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제 이방인으로서 소외당하고, 멸시받았던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불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났던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중간 화해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불신과 소외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1) 사람 사이에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본문14-15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적대적인 감정과 관계를 청산하여 하나의 새사람을 만드시고 화평케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의식과 율법으로 거룩하다는 우월 의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개 같이 취급하고 상종하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그런가하면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을 외골수 편견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진 악독한 족속으로 낙인을 찍어 놓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4:9절,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이러한 반목과 질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로 묶어지는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는 결코 영원한 반목과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사람 사이에서 화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2)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본문16-18절은 사람 사이에 화해를 이루신 예수님은 이 둘과 함께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셨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렸습니다. 즉 십자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헌신이요 자기 죽음입니다. 주님은 이 화목의 직책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고후 5:17-19).
말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19절의 “그러므로” 이하는 오늘 말씀의 결론부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는 삶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한 가족” 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도 개개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평화의 계절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평화와 소망과 행복을 누리며, 이웃과 이 기쁨을 나누는 아름다운 시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에베소서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탄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기쁨과 평화가 성도 여러분과 가정과 생업에 충만하며, 일년 동안 쌓였던 분노와 아픔과 모든 좌절감들이 주님이 이루신 소망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이후로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느 시골에 물질적으로 유복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어찌하든지 돈을 벌고 물질로 성공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아침 일찍 들에 나가면 저녁 늦게 들어와 잠자리에 드는 단조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정다감하여 예술을 논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는 그런 생활이 불만족스러워, 남편에게 함께 관광을 하자고 늘 간청을 했지만 남편은 무뚝뚝한 태도였습니다. 그런 남편의 태도에 아내는 탄식을 하다못해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부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되었습니다.
맹장을 수술한 뒤에도 부인은 회복되지가 않아 마침내 의사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유는 부인이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편이 자기의 팔을 걷고 수혈을 해주라고 의사에게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같은 형의 피였지만, 시골 병원이었으므로 남편의 팔에서 아내의 팔로 직접 수혈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내는 수혈을 받는 동안에 남편이 말없이 자기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속에 온갖 미운 감정을 씻어낸 뒤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가망이 없는 인간’들에게 소망을 수혈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구간이라는 가장 비천한 곳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 둘 곳도 없는’ 가난하고 천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모두 쏟으시고 고난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빈천한 고난의 생애는 살 소망을 잃고, 죄 아래서 죽음을 기다리는 인류에게 참된 소망과 행복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도 행복도 없습니다. 복음송 중에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정말 세상은 소망을 원하고,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소망도 평화도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혹 평화가 있는 것 같지만, 세상에서 누리는 평화는 잠깐 머무는 것이며, 희망 역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평화를 갈구하고, 희망을 찾아다닙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중에 「힐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인간 행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과 논리, 그리고 지식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려 해도 이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힐티」는 성경을 읽었고, 성경 안에서 참다운 행복 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행복론자가 되었습니다. 77년이라는 인생을 살면서, 그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그 때부터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생활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바로 主안에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며, 찬송하는 시간이 평화로운 시간임을 확실히 깨달아 그의 행복 론에서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77세로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책상머리에는 빛바랜 낡은 성경과 ‘영원한 평화’라는 논문을 쓰다 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힐티라는 분처럼 사람들은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기쁨이나 평화나 성공은 모두 세상에서 잠깐 동안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허전함고 고통을 이겨보려고 술을 마시고 즐거움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그리고 중고등 학생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기쁨도 행복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일등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꼴찌가 차라리 더 낫습니다. 그래서 시편 84:10절에서는 “하나님의 집 뜰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을 보내는 것보다 낫사오니, 못된 짓만 일삼는 것들 집에서 사느니 나는 차라리 내 하나님의 문지기가 되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평화도 행복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세상은 평화로웠으며 기쁨과 행복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신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함께 계셨으며, 기쁨이 충만했고 행복이 넘쳤습니다.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의 뜻이 ‘기쁨’입니다. 에덴동산은 기쁨의 동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단의 꾐에 빠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짓고부터,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웠으며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기쁨도 행복도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 5:12절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는 세상에는 죽음이 있고, 아픔과 고통, 불행, 근심 걱정들이 생겨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생하며 힘들게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아기를 낳는 고통도 주어졌으며, 잘 살고 못사는 사람들, 다스리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기쁨의 동산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해 주시려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이 날, 성탄절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오심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알고 지켜가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1. 예수님의 오심은 버려지는 사람들이 없게 하심입니다.
본문 11-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에베소교인들의 상태가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언약의 약속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상태 그대로였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은 자기 민족 외에는 모두 이방인으로 부르면서 매우 경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 불의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모든 민족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오시기전까지 이방인들은 유대인에게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중간에 막힌 담으로 인해 철저히 막혀 있었고, 말 그대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중간에 막힌 담을 그리스도께서 허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중간에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둘레에는 제사장들의 뜰이 있었고, 뜰 동편에 유대인들의 뜰(유대인 남성을 위한)이 있고, 그리고 조금 더 가서 여인들의 뜰(유대인 여성을 위한)이 있었습니다. 이 세 뜰은 모두 동일한 높이에 있는 뜰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다섯 계단 내려오면 벽이 하나 있고, 벽의 다른 한쪽으로 다시 열네 계단을 내려가면 다른 벽이 또 하나가 있는데, 그 너머가 바로 이방인들의 바깥뜰이었습니다(마26:69). 높이가 1.5미터 가량인 돌로 쌓은 이 벽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곳곳에 \"이 벽을 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결코 성전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12절의 “그 때에”라는 접속사가 바로 그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상태가 바로, 우상과 미련한 세상 풍습과 육체를 따라서 살아갔던 이방인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어두움 가운데서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영원한 형벌을 면치 못하는 처지로 전락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대단한 식견과 야망과 자만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두가 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입니다. 갈라디아 4:3절에서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양자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로마서 8:15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예수님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함입니다.
본문 13-18절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3절의 “이제는” 이라는 접속사는 상황의 반전을 나타냅니다. 즉,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것은 ‘때가 찬 경륜’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때가 찬 경륜’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이루실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제 이방인으로서 소외당하고, 멸시받았던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불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났던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중간 화해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불신과 소외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1) 사람 사이에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본문14-15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적대적인 감정과 관계를 청산하여 하나의 새사람을 만드시고 화평케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의식과 율법으로 거룩하다는 우월 의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개 같이 취급하고 상종하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그런가하면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을 외골수 편견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진 악독한 족속으로 낙인을 찍어 놓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4:9절,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이러한 반목과 질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로 묶어지는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는 결코 영원한 반목과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사람 사이에서 화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2)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본문16-18절은 사람 사이에 화해를 이루신 예수님은 이 둘과 함께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셨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렸습니다. 즉 십자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헌신이요 자기 죽음입니다. 주님은 이 화목의 직책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고후 5:17-19).
말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19절의 “그러므로” 이하는 오늘 말씀의 결론부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는 삶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한 가족” 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도 개개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평화의 계절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평화와 소망과 행복을 누리며, 이웃과 이 기쁨을 나누는 아름다운 시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