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여는 문2-맡김으로 이루는 순종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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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7-01 23:00
*** 행복을 여는 문2 - 맡김으로 이루는 순종 / 롬 6:15-23
** 들어가는 말
로마서 6:15-23,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여러분은 자신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산을 움직이는 믿음”이란 정말 매력적인 말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이처럼 산을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문제가 바로 부흥을 사모하는 세 번째 시간인 지금 살펴보려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7:20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즉 산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단순히 ‘될 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은 ‘맡김으로 이루는 순종의 믿음’입니다. 즉 “나를 주관하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결단적인 믿음입니다. 이 결단적인 믿음은 내가 잡고 있던 모든 삶의 줄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능한 것은 수도 없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줄을 내가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놓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놓지 못합니다.
예전에 마을 놀이터에서 보았던 일입니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대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둘과 젊은 아버지로 생각되는 사람이 신나게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정글 사다리를 올랐다가 내렸다가, 미끄럼틀을 이리저리 오르내리며 쫓고 쫓기는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한참이나 장난을 치던 젊은 아버지는 줄타기를 하는 높은 곳에 아이들을 올려놓더니 두 팔을 벌려 받아준다는 시늉을 하면서 “야 뛰어내려!”라고 합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아이가 아빠 품으로 훌쩍 뛰어내립니다. 당연히 젊은 아빠는 아이를 덥석 받아 안습니다. 아이는 재미있다고 까르륵거리며 웃어댑니다. 그런데 다른 한 아이는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하면서 좀처럼 뛰어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몇 번을 독촉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은 앉아서 미끄러지듯이 뛰어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지나가는 말투로 “아이 둘이 성격이 많이 다른 가 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 아빠가 망설이던 아이를 가리키며 “아, 얘는 앞집에 사는 친구 아들이거든요.”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뛰어내린 아이는 젊은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신뢰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뛰어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런 놀이를 여러 번 했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받아준다는 것을 믿었고 자기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친구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를 쉽게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뛰어내릴 수가 없었지요. 우리의 삶의 줄을 주님께 맡기지 않는 한 능력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맡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을 때,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며 배척했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6:5,6절입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불신의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도 아무 권능을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1. 행복을 원한다면 맡겨야 합니다.
무엇을 맡겨야 합니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나의 생명, 나의 삶, 가정과 자녀와 일과 미래의 삶까지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자신이 해야 하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신. 불신을 막론하고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 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13-16절을 봅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는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는 이 말씀대로 우리가 맡겨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맡겨야 합니까?
첫째는 세상에는 맡길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으로서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력가나 능력자를 의지하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잠언 3: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시며, 시편 146:3,4절에서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시고, 이사야 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십니다.
한 소년이 자신이 들기에는 너무 큰 돌을 옮기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자신이 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땀 흘리며 고군분투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돌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소년의 아버지가 왔습니다. 아들이 애쓰는 것을 보면서 “많이 힘드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네. 모든 방법을 다 써봤는데, 꼼짝도 안 해요.”라고 힘없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되물었습니다. “너 정말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봤니?” 소년은 낙심되고 지친 표정으로 불평하듯 “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아니, 너는 한 가지 방법을 쓰지 않았어. 너는 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잖니.”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소년처럼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문제를 안고 끙끙거리며 씨름합니다. 자신의 능력, 경험, 의지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그런데 풍랑 이는 갈릴리 호수를 힘겹게 노 저어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죽도록 고생만 했습니다. 자기들 경험과 능력으로 해보겠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 맡기기만 하면 당장 풀 수 있는 문제인데, 맡기지 못하는 것이 고생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민스러운 문제들이 있습니까? 인생의 답답한 일들이 있습니까? 주님께 맡겨보십시오. 시편 37:5,6절을 봅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며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19-23절에 나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말씀의 의도는 우리의 삶이 세상에 맡겨졌을 때와 하나님께 맡겨졌을 때의 결과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따르고 불법에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세상에 속했으며, 불법에 맡겨졌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삶을 살 때의 열매가 무엇이었습니까? 21절에서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라고 묻습니다. 이기주의, 쾌락추구, 거짓, 속임 등등. 생각하기도 부끄러운 일들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세상에 속한 결과는 죽음과 파멸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거룩함을 이룬 결과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맡길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내 생의 주인이신 아버지로 인정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믿고 뛰어내리듯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는 내 마음의 신앙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실제 생활 속에서 주인으로 인정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마치 직장인이 모든 일에 대하여 상사에게 결재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고용된 사람이 주인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경영하게 되면 쫓겨날 뿐만 아니라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해야 맡길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모든 일을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는 것입니다. 이것이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폭풍으로 침몰해가는 배 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사정을 아뢰었을 때에 주님은 비로소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세 번째는 맡긴 일에는 믿음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가 큰 근심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기도한 후에는 전혀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심이 없으니라.”삼상1:18).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십자가 아래에 그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이나 기도한 후에나 똑같은 삶의 자세라면 그것은 맡긴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맡겼다면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2. 행복을 원한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여러 가지 순종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죄에게 순종할 수도 있고, 육신의 욕망에 순종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순종하든지 그 순종하는 것의 종이 됩니다. 세상의 일, 육신의 욕망, 거짓된 일, 재물을 따르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단이 주관하는 일이므로,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사단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순종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의에게 종이 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18절에서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하시며, 19절 하반절에서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순종은 앞에서 말씀드린 “맡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나를 맡기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7절을 봅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0:17절 이하에는 ‘영생을 얻고 싶어 하는 부자 청년 관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청년은 많은 재물을 맡기지 못했습니다. 맡기지 못했기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의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잠시 주어진 세상의 것들을 붙잡고 삽니다. 권력, 명예, 돈, 자식, 육신의 온갖 즐거움들, 등등. 그리스도인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보다 욕심이 더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그 죄 가운데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의 만족도 얻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도 차지하려고 하니까 욕심이 더 많은 것이지요. 이 일에 하나님께서 분명한 뜻을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 9:23절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10:13절을 봅시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순종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아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십니까? 하나님을 알 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그 결과가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이시며 주인으로 신뢰하면서, 모든 삶을 맡기고 순종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행복의 문은
하나님을 주권자로, 아버지로, 주인으로 신뢰하면서
첫째 모든 일에 만족하며,
두 번째 모든 일에 감사하며,
세 번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네 번째 온전한 마음과 삶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히 맥추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할 줄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누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먹을 것을 주어도 감사할 줄 모르고, 건강을 주어도 감사를 모르고, 집을 주어도 감사를 모르고,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는 세상에서 안전하게 인도하셔도 감사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만족하고 감사드리며, 모든 삶을 맡기고 순종한다면, 헌신된 일군이 되십시오. 마음을 드려도 인색하게, 물질을 드려도 인색하게, 시간과 노력을 드리는 일에도 인색하게 하지 말고, 풍성한 감사와 온전한 헌신을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고 고민이 되고, 마음이 불편하고, 마음이 아픕니까? 아니면 기쁨이 가득하고, 행복한 마음이 듭니까? 그것이 여러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기뻐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부담스러워 하십니다. 사무엘상 2:30절에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시며, 누가복음 9:26절에서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로마서 6:15-23,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여러분은 자신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산을 움직이는 믿음”이란 정말 매력적인 말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이처럼 산을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문제가 바로 부흥을 사모하는 세 번째 시간인 지금 살펴보려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7:20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즉 산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단순히 ‘될 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은 ‘맡김으로 이루는 순종의 믿음’입니다. 즉 “나를 주관하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결단적인 믿음입니다. 이 결단적인 믿음은 내가 잡고 있던 모든 삶의 줄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능한 것은 수도 없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줄을 내가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놓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놓지 못합니다.
예전에 마을 놀이터에서 보았던 일입니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대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둘과 젊은 아버지로 생각되는 사람이 신나게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정글 사다리를 올랐다가 내렸다가, 미끄럼틀을 이리저리 오르내리며 쫓고 쫓기는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한참이나 장난을 치던 젊은 아버지는 줄타기를 하는 높은 곳에 아이들을 올려놓더니 두 팔을 벌려 받아준다는 시늉을 하면서 “야 뛰어내려!”라고 합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아이가 아빠 품으로 훌쩍 뛰어내립니다. 당연히 젊은 아빠는 아이를 덥석 받아 안습니다. 아이는 재미있다고 까르륵거리며 웃어댑니다. 그런데 다른 한 아이는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하면서 좀처럼 뛰어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몇 번을 독촉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은 앉아서 미끄러지듯이 뛰어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지나가는 말투로 “아이 둘이 성격이 많이 다른 가 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 아빠가 망설이던 아이를 가리키며 “아, 얘는 앞집에 사는 친구 아들이거든요.”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뛰어내린 아이는 젊은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신뢰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뛰어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런 놀이를 여러 번 했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받아준다는 것을 믿었고 자기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친구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를 쉽게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뛰어내릴 수가 없었지요. 우리의 삶의 줄을 주님께 맡기지 않는 한 능력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맡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을 때,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며 배척했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6:5,6절입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불신의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도 아무 권능을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1. 행복을 원한다면 맡겨야 합니다.
무엇을 맡겨야 합니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나의 생명, 나의 삶, 가정과 자녀와 일과 미래의 삶까지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자신이 해야 하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신. 불신을 막론하고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 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13-16절을 봅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는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는 이 말씀대로 우리가 맡겨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맡겨야 합니까?
첫째는 세상에는 맡길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으로서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력가나 능력자를 의지하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잠언 3: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시며, 시편 146:3,4절에서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시고, 이사야 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십니다.
한 소년이 자신이 들기에는 너무 큰 돌을 옮기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자신이 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땀 흘리며 고군분투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돌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소년의 아버지가 왔습니다. 아들이 애쓰는 것을 보면서 “많이 힘드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네. 모든 방법을 다 써봤는데, 꼼짝도 안 해요.”라고 힘없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되물었습니다. “너 정말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봤니?” 소년은 낙심되고 지친 표정으로 불평하듯 “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아니, 너는 한 가지 방법을 쓰지 않았어. 너는 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잖니.”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소년처럼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문제를 안고 끙끙거리며 씨름합니다. 자신의 능력, 경험, 의지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그런데 풍랑 이는 갈릴리 호수를 힘겹게 노 저어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죽도록 고생만 했습니다. 자기들 경험과 능력으로 해보겠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 맡기기만 하면 당장 풀 수 있는 문제인데, 맡기지 못하는 것이 고생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민스러운 문제들이 있습니까? 인생의 답답한 일들이 있습니까? 주님께 맡겨보십시오. 시편 37:5,6절을 봅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며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19-23절에 나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말씀의 의도는 우리의 삶이 세상에 맡겨졌을 때와 하나님께 맡겨졌을 때의 결과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따르고 불법에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세상에 속했으며, 불법에 맡겨졌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삶을 살 때의 열매가 무엇이었습니까? 21절에서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라고 묻습니다. 이기주의, 쾌락추구, 거짓, 속임 등등. 생각하기도 부끄러운 일들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세상에 속한 결과는 죽음과 파멸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거룩함을 이룬 결과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맡길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내 생의 주인이신 아버지로 인정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믿고 뛰어내리듯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는 내 마음의 신앙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실제 생활 속에서 주인으로 인정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마치 직장인이 모든 일에 대하여 상사에게 결재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고용된 사람이 주인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경영하게 되면 쫓겨날 뿐만 아니라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해야 맡길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모든 일을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는 것입니다. 이것이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폭풍으로 침몰해가는 배 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사정을 아뢰었을 때에 주님은 비로소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세 번째는 맡긴 일에는 믿음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가 큰 근심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기도한 후에는 전혀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심이 없으니라.”삼상1:18).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십자가 아래에 그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이나 기도한 후에나 똑같은 삶의 자세라면 그것은 맡긴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맡겼다면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2. 행복을 원한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여러 가지 순종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죄에게 순종할 수도 있고, 육신의 욕망에 순종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순종하든지 그 순종하는 것의 종이 됩니다. 세상의 일, 육신의 욕망, 거짓된 일, 재물을 따르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단이 주관하는 일이므로,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사단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순종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의에게 종이 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18절에서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하시며, 19절 하반절에서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순종은 앞에서 말씀드린 “맡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나를 맡기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7절을 봅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0:17절 이하에는 ‘영생을 얻고 싶어 하는 부자 청년 관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청년은 많은 재물을 맡기지 못했습니다. 맡기지 못했기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의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잠시 주어진 세상의 것들을 붙잡고 삽니다. 권력, 명예, 돈, 자식, 육신의 온갖 즐거움들, 등등. 그리스도인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보다 욕심이 더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그 죄 가운데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의 만족도 얻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도 차지하려고 하니까 욕심이 더 많은 것이지요. 이 일에 하나님께서 분명한 뜻을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 9:23절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10:13절을 봅시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순종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아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십니까? 하나님을 알 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그 결과가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이시며 주인으로 신뢰하면서, 모든 삶을 맡기고 순종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행복의 문은
하나님을 주권자로, 아버지로, 주인으로 신뢰하면서
첫째 모든 일에 만족하며,
두 번째 모든 일에 감사하며,
세 번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네 번째 온전한 마음과 삶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히 맥추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할 줄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누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먹을 것을 주어도 감사할 줄 모르고, 건강을 주어도 감사를 모르고, 집을 주어도 감사를 모르고,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는 세상에서 안전하게 인도하셔도 감사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만족하고 감사드리며, 모든 삶을 맡기고 순종한다면, 헌신된 일군이 되십시오. 마음을 드려도 인색하게, 물질을 드려도 인색하게, 시간과 노력을 드리는 일에도 인색하게 하지 말고, 풍성한 감사와 온전한 헌신을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고 고민이 되고, 마음이 불편하고, 마음이 아픕니까? 아니면 기쁨이 가득하고, 행복한 마음이 듭니까? 그것이 여러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기뻐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부담스러워 하십니다. 사무엘상 2:30절에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시며, 누가복음 9:26절에서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