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불로 역사하소서.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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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6-20 22:00
*** 성령의 불로 역사하소서. / 갈 5:16-24
** 들어가는 말
갈라디아서 5:16-24,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작가 이어령 씨가 쓴 “아들이여, 이 산하를”이란 책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수염을 길게 가꾸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는 꼬마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를 만나자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십니까? 아니면 끄집어 내놓고 주무십니까?” 할아버지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고는 “얘야. 미안하다. 나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니 하룻밤만 자보고 대답을 하마.”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그날 밤 수염을 붙들고 씨름을 합니다. 수염을 이불 속에 넣으면 답답하고 끄집어내면 쓸쓸하고. 수염을 이불 속에 넣었다가 뺏다가 밤을 꼬박 새었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그 수염을 어디에 두고 잤는지를 알아내지 못하고 맙니다.
이어령 씨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성도들 자신이 예수 밖에 있는지 예수 안에 있는지, 진리 안에 있는지 진리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무신경한 신앙자세’를 꼬집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3:5절을 봅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신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문제의 유일한 답은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가?”라는 물음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지금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 거하심을 확신하십니까?
그런데 성도들이 성령에 대하여 오해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많은 교회들에서 성령이 거하시는 유일한 증거를 ‘방언’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성령을 받으면 뜨거운 열정이 있고, 광신적으로 날뛰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성도들도 많습니다. 어떤 기도원에서는 개도 다 방언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을 무슨 물건이나 어떤 신비한 현상처럼 생각해서 던지고 받고, 쓰러뜨리고, 마술을 하듯이 취급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성령님도 삼위 하나님이시며, 마땅히 경외하며 섬겨야 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16,17절을 봅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일컬어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를 다른 말로 번역하면 ‘변호자’, ‘탄원자’, ‘위로자’, ‘중보자’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도와 함께 하시면서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변호하시며, 성도를 위하여 탄원하시며, 성도를 위로하시고 중보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시고 보존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당연히 그 뜻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불로 임하셨던 성령의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도 불로 역사하소서.”라는 뜨거운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 184장(불길 같은 주 성령)
성령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충만하심은 어떻게 다릅니까?
흔히 ‘성령 받았다.’라고 표현하는 ‘성령의 임재하심’이나, ‘성령 충만하심’은 둘 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표현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며,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때에 이루어집니다. 즉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사도행전 2:38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사람에게 임재하심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후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재하신 성도라고 금방 기쁨이 충만하고, 모든 생활이 거룩하여 지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 성도가 되는 것을 ‘거듭남(重生,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즉 영적으로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말하고, 걷고, 뛰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린아이가 부지런히 먹고, 운동하고, 모방하고 배우면서 성장해가듯이, 영적인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먹고, 기도하고, 배우면서 영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2:21-22절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이 잘 먹지 않으면, 온갖 방법으로 먹이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잘 먹어야 튼튼해진다.” “아무거나 잘 먹어야 잘 큰다.” “우리 아이는 안 먹어서 속상해 죽겠다.” “안 먹으니 저렇게 비쩍 마르지.”라며 어떻게든 먹이려고 합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 숨 쉬지 않고는 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속사람인 영은 정작 먹이기를 게을리 합니다. 말씀을 먹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도 잘 삽니다. 그러나 자신의 속사람은 죽어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내 속에 거하신다 할지라도 결코 모든 것이 형통하거나 속사람이 저절로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속사람이 성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린아이에게 많은 돈을 주거나, 위험한 물건을 맡기거나, 좋은 일자리를 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벌써 선생이 되어야 할 만큼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가 되어 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5:12절입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의 연륜에 맞도록 자랐습니까? 아니면 아직 어린아이로 있습니까?
성령께서 임재 하신 후부터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 성령께서 말씀과 양심으로 마음에 주시는 생각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생각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령의 임재하심 만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심은 어떤 것입니까?
성령 충만하심은 한 마디로 ‘성령의 완전하신 지배아래 사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생활이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 충만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9-21절에 나오는 15가지 종류에 해당하는 육체의 일에 매여 있으면, 자신은 성령께서 임재 하셨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본문 22-23절에 나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9가지의 성령의 열매에 해당하는 생활을 한다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말씀에 깨어 있는 사람이며, 기도에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삶보다는 영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기쁘게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고 봉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여 신실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큰 특징은 환경과 여건에 상관없이 기쁨이 충만하고, 평안이 충만하고, 사랑의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5:17-21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현대어 성경(분별없이 행동하지 말고 주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십시오. 술에 취해 살지 마십시오. 그 길에는 많은 악이 숨어 있습니다. 그보다 성령에 취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으십시오. 시편과 찬송가를 암송하고 거룩한 노래를 부르십시오. 마음속에서 우러난 노래를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서로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높이십시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도 간에 화목을 이룰 때에 이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을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물질을 구하고, 형통한 삶을 구하고, 건강을 구하고, 좋은 성적과 좋은 직장과 장밋빛 미래를 구하는 것보다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내 삶에 성령의 불로 역사하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곧 형통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도 없고, 거룩하게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죄를 이기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성도의 모든 일은 성령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컵 하나를 준비해서) 여러분 이 컵에서 공기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덮개를 씌워서 공기 펌프로 빼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여 진공이 되면 컵이 깨집니다.’
(컵에 물을 가득 부으면서) “보세요. 이렇게 하면 공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컵에서 공기를 빼려고 하듯이 우리 죄를 스스로 제거하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컵에 물을 붓듯이 우리 심령에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짐으로 모든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의 우울증을 이길 수 있는 것도, 가정의 화목도, 직장과 사업의 성공도, 젊은이들의 미래의 비전도 성령께서 주관하십니다. 세상에서 만족을 구하고,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으로 미래를 설계해도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논밭의 잡초는 심지 않아도 잘 자라고 세상의 학한 행실은 배우지 않고 연습하지 않아도 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쳐서 이겨내는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경건한 삶도 계속해서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4:7,8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들 속에 임재하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즉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증거가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내가 서울에 가기 위하여 서울행 기차의 출발 시간을 기록한 시간표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 시간표가 진실하고 정확하다고 해도 시간표 자체가 나를 서울로 데려다주지는 않습니다. 시간표가 정확하고, 내가 거기서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간표에서 알아낸 시간에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감으로써 시간표가 진정으로 가치가 있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경험하는 것보다는 진리를 믿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주일에 한두 번 예배하고, 예배 중에서만 하나님을 찾고, 찬양하는, 마음에 갇힌 신앙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가만히 앉아서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라고 외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은 생활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믿고 순종하고 따라갈 때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나며, 성령으로 말미암는 열매가 열리고 있을 것입니다. 혹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없거나 성령의 열매와는 거리가 멀다면 성령께서 임재하지 않으셨거나, 소멸되고 있거나, 근심하고 계시는 상태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영의 사람을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늦기 전에.
찬양 / 부흥 2000
합심기도 / 우리의 게으르고 깨어있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성령의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
** 들어가는 말
갈라디아서 5:16-24,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작가 이어령 씨가 쓴 “아들이여, 이 산하를”이란 책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수염을 길게 가꾸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는 꼬마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를 만나자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십니까? 아니면 끄집어 내놓고 주무십니까?” 할아버지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고는 “얘야. 미안하다. 나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니 하룻밤만 자보고 대답을 하마.”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그날 밤 수염을 붙들고 씨름을 합니다. 수염을 이불 속에 넣으면 답답하고 끄집어내면 쓸쓸하고. 수염을 이불 속에 넣었다가 뺏다가 밤을 꼬박 새었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그 수염을 어디에 두고 잤는지를 알아내지 못하고 맙니다.
이어령 씨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성도들 자신이 예수 밖에 있는지 예수 안에 있는지, 진리 안에 있는지 진리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무신경한 신앙자세’를 꼬집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3:5절을 봅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신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문제의 유일한 답은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가?”라는 물음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지금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 거하심을 확신하십니까?
그런데 성도들이 성령에 대하여 오해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많은 교회들에서 성령이 거하시는 유일한 증거를 ‘방언’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성령을 받으면 뜨거운 열정이 있고, 광신적으로 날뛰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성도들도 많습니다. 어떤 기도원에서는 개도 다 방언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을 무슨 물건이나 어떤 신비한 현상처럼 생각해서 던지고 받고, 쓰러뜨리고, 마술을 하듯이 취급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성령님도 삼위 하나님이시며, 마땅히 경외하며 섬겨야 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16,17절을 봅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일컬어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를 다른 말로 번역하면 ‘변호자’, ‘탄원자’, ‘위로자’, ‘중보자’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도와 함께 하시면서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변호하시며, 성도를 위하여 탄원하시며, 성도를 위로하시고 중보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시고 보존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당연히 그 뜻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불로 임하셨던 성령의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도 불로 역사하소서.”라는 뜨거운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 184장(불길 같은 주 성령)
성령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충만하심은 어떻게 다릅니까?
흔히 ‘성령 받았다.’라고 표현하는 ‘성령의 임재하심’이나, ‘성령 충만하심’은 둘 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표현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며,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때에 이루어집니다. 즉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사도행전 2:38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사람에게 임재하심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후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재하신 성도라고 금방 기쁨이 충만하고, 모든 생활이 거룩하여 지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 성도가 되는 것을 ‘거듭남(重生,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즉 영적으로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말하고, 걷고, 뛰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린아이가 부지런히 먹고, 운동하고, 모방하고 배우면서 성장해가듯이, 영적인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먹고, 기도하고, 배우면서 영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2:21-22절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이 잘 먹지 않으면, 온갖 방법으로 먹이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잘 먹어야 튼튼해진다.” “아무거나 잘 먹어야 잘 큰다.” “우리 아이는 안 먹어서 속상해 죽겠다.” “안 먹으니 저렇게 비쩍 마르지.”라며 어떻게든 먹이려고 합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 숨 쉬지 않고는 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속사람인 영은 정작 먹이기를 게을리 합니다. 말씀을 먹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도 잘 삽니다. 그러나 자신의 속사람은 죽어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내 속에 거하신다 할지라도 결코 모든 것이 형통하거나 속사람이 저절로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속사람이 성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린아이에게 많은 돈을 주거나, 위험한 물건을 맡기거나, 좋은 일자리를 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벌써 선생이 되어야 할 만큼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가 되어 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5:12절입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의 연륜에 맞도록 자랐습니까? 아니면 아직 어린아이로 있습니까?
성령께서 임재 하신 후부터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 성령께서 말씀과 양심으로 마음에 주시는 생각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생각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령의 임재하심 만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심은 어떤 것입니까?
성령 충만하심은 한 마디로 ‘성령의 완전하신 지배아래 사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생활이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 충만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9-21절에 나오는 15가지 종류에 해당하는 육체의 일에 매여 있으면, 자신은 성령께서 임재 하셨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본문 22-23절에 나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9가지의 성령의 열매에 해당하는 생활을 한다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말씀에 깨어 있는 사람이며, 기도에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삶보다는 영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기쁘게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고 봉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여 신실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큰 특징은 환경과 여건에 상관없이 기쁨이 충만하고, 평안이 충만하고, 사랑의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5:17-21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현대어 성경(분별없이 행동하지 말고 주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십시오. 술에 취해 살지 마십시오. 그 길에는 많은 악이 숨어 있습니다. 그보다 성령에 취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으십시오. 시편과 찬송가를 암송하고 거룩한 노래를 부르십시오. 마음속에서 우러난 노래를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서로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높이십시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도 간에 화목을 이룰 때에 이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을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물질을 구하고, 형통한 삶을 구하고, 건강을 구하고, 좋은 성적과 좋은 직장과 장밋빛 미래를 구하는 것보다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내 삶에 성령의 불로 역사하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곧 형통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도 없고, 거룩하게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죄를 이기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성도의 모든 일은 성령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컵 하나를 준비해서) 여러분 이 컵에서 공기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덮개를 씌워서 공기 펌프로 빼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여 진공이 되면 컵이 깨집니다.’
(컵에 물을 가득 부으면서) “보세요. 이렇게 하면 공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컵에서 공기를 빼려고 하듯이 우리 죄를 스스로 제거하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컵에 물을 붓듯이 우리 심령에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짐으로 모든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의 우울증을 이길 수 있는 것도, 가정의 화목도, 직장과 사업의 성공도, 젊은이들의 미래의 비전도 성령께서 주관하십니다. 세상에서 만족을 구하고,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으로 미래를 설계해도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논밭의 잡초는 심지 않아도 잘 자라고 세상의 학한 행실은 배우지 않고 연습하지 않아도 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쳐서 이겨내는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경건한 삶도 계속해서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4:7,8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들 속에 임재하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즉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증거가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내가 서울에 가기 위하여 서울행 기차의 출발 시간을 기록한 시간표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 시간표가 진실하고 정확하다고 해도 시간표 자체가 나를 서울로 데려다주지는 않습니다. 시간표가 정확하고, 내가 거기서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간표에서 알아낸 시간에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감으로써 시간표가 진정으로 가치가 있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경험하는 것보다는 진리를 믿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주일에 한두 번 예배하고, 예배 중에서만 하나님을 찾고, 찬양하는, 마음에 갇힌 신앙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가만히 앉아서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라고 외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은 생활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믿고 순종하고 따라갈 때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나며, 성령으로 말미암는 열매가 열리고 있을 것입니다. 혹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없거나 성령의 열매와는 거리가 멀다면 성령께서 임재하지 않으셨거나, 소멸되고 있거나, 근심하고 계시는 상태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영의 사람을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늦기 전에.
찬양 / 부흥 2000
합심기도 / 우리의 게으르고 깨어있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성령의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