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향하여 가는 길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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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6-12 21:25
*** 목표를 향하여 가는 길 / 여호수아 3:1-6
** 들어가는 말
여호수아 3:1-6, “1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2 삼 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고사성어(故事成語) 중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깊고 깊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몹시 나쁜 사이를 두고 ‘오월지간(吳越之間)’이라고 합니다. 와신상담은 ‘섶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말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오와 월, 두 나라가 서로의 원한을 갚겠다는 오직 한 목표로 인고의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목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 월 두 나라가 원한을 갚기 위한 목표로 이렇게 고통을 감내한다면, 영생을 위한 목표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3:13-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상의 일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간 모든 일들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을 목표로 전력 질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라는 소중한 목표에 이르기 위하여 어떻게 생활하고 있습니까?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목표가 흐릿하거나 아예 없는 사람과는 삶의 방법이나 가치관, 의식 등 모든 것에서 분명한 차이를 나타냅니다.
몇 해 전에 어느 교회의 청년회 세미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청년의 진로’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한 후, 자유롭게 질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남자 청년이 이런 고민을 이야기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재수생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습니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제가 맡고 있는 교회 일에 소홀히 하는 것 같아 갈등이 생깁니다. 또 교회에서 일을 하고 있노라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안절부절 하게 됩니다. 오늘도 특강을 한다고 해서 여기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사실 공부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이 청년은 중요한 것을 빠뜨렸습니다. 목표를 하나로 일치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청년은 공부하는 목표와 교회 일을 하는 목표를 따로 두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목표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서 혼란스러워 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런 혼란과 고민은 학생이든지, 직장인이든지, 사업을 하는 사람이든지 똑 같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니면 어떤 길을 제시하겠습니까? 이 시간의 말씀 주제가 이것입니다. 몇 주 전에도 본문으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지만, 이 시간에는 ‘목표를 향하여 가는 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상고하려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청년이 가지고 있던 고민이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에 대한 배경과 현실의 접촉점을 찾아봅시다.
본문말씀의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을 나온 후, 광야 40년을 지나고, 이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려는 직전의 순간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도 전인 선민의 첫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목표였습니다. 창세기 12:1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시며 17:7,8절에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거치고 애굽에서의 430여년의 나그네 세월을 지나 어언 60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 사람으로 시작했던 선민의 역사가 이제는 200만 명이 넘은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셨던 때가 되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여보내시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목표지점을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표를 향하여 가는 길을 최종적으로 지시하십니다. 그 지시는 세 가지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둘째는 “언약궤의 뒤를 따르라.” 셋째는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서 나아가라.” 이 세 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지시에 따라서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가나안은 완전하지도 못했고, 낙원을 이루지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시를 계속 순종하고 따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가나안을 목표로 주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완전한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한 가나안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된 것입니다. 이 목표는 지금까지 살았던 그리스도인들과 지금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살게 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목표입니다. 이 목표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이겨내는 힘이며, 부귀영화와 쾌락과 온갖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목표가 매일의 삶에서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처럼 삶의 방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19절에서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시며, 사랑하는 자녀들이 목표를 잃지 않도록 책망도 하시고 징계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진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목표를 향하는 길에는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목표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지고 위대한 것입니다. 즉 완전한 부활을 통하여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과 삶, 그리고 영원한 삶의 자리인 하나님의 나라가 목표입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영원한 가나안은 아무에게나 그냥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혹독한 광야가 있고, 반드시 건너야 할 죽음의 강인 요단강이 있습니다. 광야와 요단강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인 가나안을 얻기 위하여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맴돌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도록 훈련받았습니다. 모든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의 요소들이 고난의 삶을 통하여 녹아졌습니다. 이제 광야의 끝자락인 ‘싯딤’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 요단강으로 향합니다. 이른 아침, 싯딤을 떠나 요단에 이르렀습니다. 이 요단만 건너면 가나안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기 부모들이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서두르다가 실패하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의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일 후에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점검 사항을 지시하셨습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모든 준비를 철저히 점검해야 했습니다.
준비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성결케 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차지하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기 전, 또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을 경험하기 전에는 반드시 성결 작업을 거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는 크고 위대한 일을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받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내게서 이루어지도록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일들이지만, 성도는 회개를 통하여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또한 땀을 흘리는 수고와 헌신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골로새서1:29절에서는,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계시록2:2절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러한 수고와 헌신을 마다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6: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침 일찍부터 최선의 각오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합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고 하루를 부탁드릴 겨를도 없이 일어나자마자 바쁘게 서둘러 일터로 향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바라는 목표를 생각하며 수고와 헌신을 각오하지도 못하고 일을 시작하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불편함과 고생만을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평과 원망으로 인하여 그 광야에서 모두 소멸되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또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목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고 이루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소중한 생명의 기회를 준비 없이 시작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본문 3,4절을 봅시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매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으로 전진하되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야 함을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의 법칙이 있습니다. ①제사장들이 언약궤 메는 것을 보아야 하고, ②지금의 자리를 떨치고 출발해야 하며, ③언약궤의 뒤를 좇아야 하며, ④언약궤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두어야 하는 것, 이 네 가지입니다. 이 법칙에서 중심은 ‘언약궤’입니다. 이스라엘이 따라야 하는 것은 언약궤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움직이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며, 그 뒤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따라야 합니다.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들어있습니다. 즉 십계명을 새긴 돌판,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에서 먹었던 만나를 담은 항아리, 고라 당이 반역할 때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을 나타내셨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의 뚜껑은 두 그룹을 새긴 황금뚜껑으로서 ‘시은소’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상징이었습니다.
오늘에 있어서의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달았을 때에는 즉시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반드시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보다 앞선다든지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동행, 주님을 따르는 데는 세상의 지혜나 자신의 생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때로는 사람을 통하여, 때로는 양심을 통하여, 때로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감동케 하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7: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자 ‘헨리 무어 하우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주 힘든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서 근심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기 아내의 짐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들어갈 때였습니다. 자신이 오는 것을 본 소아마비에 걸린 그의 어린 딸 ‘미니’가 기쁘게 반겼습니다. 그는 딸을 안고 입 맞춘 후, “엄마는 어디에 있니?”하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이층에 계셔요.” “그래, 엄마에게 줄 짐 꾸러미가 있단다.” 그러자 딸이, “아빠, 그것 내가 엄마에게 가져다 드릴게요.”라고 나섰습니다. “아니다 아가. 네가 어떻게 들고 가니? 너 혼자서는 못 들고 가잖니?” 그러나 딸은 애교를 부리면서 “그건 그래요 아빠. 하지만 짐은 내가 들고 아빠가 나를 안고 가시면 되잖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린 딸 ‘미니’와 짐을 함께 안고서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주님 앞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습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근심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안고 가시는 것이 아니었던가!’ 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생활의 문제로 고민하고 걱정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입술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걱정하고 염려하고 삶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님께서 나를 안고 가신다는 사실을 때때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길을 잃지 않으려면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따르면 “너희 행할 길을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길이 비록 처음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처음 이야기 했던 청년의 고민에 대답해 줄 수 있겠습니까? 청년은 공부하는 목표와 교회 일을 하는 목표가 달랐기 때문에 혼란과 고민에 싸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우리의 모든 삶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잠시 머물다가 떠날 세상에 정을 두게 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두 목표를 두면 혼란과 고민만 더하게 됩니다. 우리의 목표가 고귀한 만큼 치러야 할 대가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아갑시다.
** 들어가는 말
여호수아 3:1-6, “1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2 삼 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고사성어(故事成語) 중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깊고 깊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몹시 나쁜 사이를 두고 ‘오월지간(吳越之間)’이라고 합니다. 와신상담은 ‘섶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말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오와 월, 두 나라가 서로의 원한을 갚겠다는 오직 한 목표로 인고의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목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 월 두 나라가 원한을 갚기 위한 목표로 이렇게 고통을 감내한다면, 영생을 위한 목표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3:13-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상의 일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간 모든 일들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을 목표로 전력 질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라는 소중한 목표에 이르기 위하여 어떻게 생활하고 있습니까?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목표가 흐릿하거나 아예 없는 사람과는 삶의 방법이나 가치관, 의식 등 모든 것에서 분명한 차이를 나타냅니다.
몇 해 전에 어느 교회의 청년회 세미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청년의 진로’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한 후, 자유롭게 질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남자 청년이 이런 고민을 이야기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재수생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습니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제가 맡고 있는 교회 일에 소홀히 하는 것 같아 갈등이 생깁니다. 또 교회에서 일을 하고 있노라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안절부절 하게 됩니다. 오늘도 특강을 한다고 해서 여기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사실 공부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이 청년은 중요한 것을 빠뜨렸습니다. 목표를 하나로 일치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청년은 공부하는 목표와 교회 일을 하는 목표를 따로 두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목표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서 혼란스러워 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런 혼란과 고민은 학생이든지, 직장인이든지, 사업을 하는 사람이든지 똑 같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니면 어떤 길을 제시하겠습니까? 이 시간의 말씀 주제가 이것입니다. 몇 주 전에도 본문으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지만, 이 시간에는 ‘목표를 향하여 가는 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상고하려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청년이 가지고 있던 고민이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에 대한 배경과 현실의 접촉점을 찾아봅시다.
본문말씀의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을 나온 후, 광야 40년을 지나고, 이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려는 직전의 순간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도 전인 선민의 첫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목표였습니다. 창세기 12:1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시며 17:7,8절에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거치고 애굽에서의 430여년의 나그네 세월을 지나 어언 60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 사람으로 시작했던 선민의 역사가 이제는 200만 명이 넘은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셨던 때가 되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여보내시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목표지점을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표를 향하여 가는 길을 최종적으로 지시하십니다. 그 지시는 세 가지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둘째는 “언약궤의 뒤를 따르라.” 셋째는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서 나아가라.” 이 세 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지시에 따라서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가나안은 완전하지도 못했고, 낙원을 이루지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시를 계속 순종하고 따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가나안을 목표로 주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완전한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한 가나안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된 것입니다. 이 목표는 지금까지 살았던 그리스도인들과 지금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살게 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목표입니다. 이 목표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이겨내는 힘이며, 부귀영화와 쾌락과 온갖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목표가 매일의 삶에서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처럼 삶의 방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19절에서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시며, 사랑하는 자녀들이 목표를 잃지 않도록 책망도 하시고 징계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진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목표를 향하는 길에는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목표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지고 위대한 것입니다. 즉 완전한 부활을 통하여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과 삶, 그리고 영원한 삶의 자리인 하나님의 나라가 목표입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영원한 가나안은 아무에게나 그냥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혹독한 광야가 있고, 반드시 건너야 할 죽음의 강인 요단강이 있습니다. 광야와 요단강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인 가나안을 얻기 위하여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맴돌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도록 훈련받았습니다. 모든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의 요소들이 고난의 삶을 통하여 녹아졌습니다. 이제 광야의 끝자락인 ‘싯딤’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 요단강으로 향합니다. 이른 아침, 싯딤을 떠나 요단에 이르렀습니다. 이 요단만 건너면 가나안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기 부모들이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서두르다가 실패하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의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일 후에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점검 사항을 지시하셨습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모든 준비를 철저히 점검해야 했습니다.
준비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성결케 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차지하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기 전, 또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을 경험하기 전에는 반드시 성결 작업을 거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는 크고 위대한 일을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받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내게서 이루어지도록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일들이지만, 성도는 회개를 통하여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또한 땀을 흘리는 수고와 헌신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골로새서1:29절에서는,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계시록2:2절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러한 수고와 헌신을 마다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6: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침 일찍부터 최선의 각오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합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고 하루를 부탁드릴 겨를도 없이 일어나자마자 바쁘게 서둘러 일터로 향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바라는 목표를 생각하며 수고와 헌신을 각오하지도 못하고 일을 시작하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불편함과 고생만을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평과 원망으로 인하여 그 광야에서 모두 소멸되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또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목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고 이루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소중한 생명의 기회를 준비 없이 시작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본문 3,4절을 봅시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매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으로 전진하되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야 함을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의 법칙이 있습니다. ①제사장들이 언약궤 메는 것을 보아야 하고, ②지금의 자리를 떨치고 출발해야 하며, ③언약궤의 뒤를 좇아야 하며, ④언약궤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두어야 하는 것, 이 네 가지입니다. 이 법칙에서 중심은 ‘언약궤’입니다. 이스라엘이 따라야 하는 것은 언약궤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움직이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며, 그 뒤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따라야 합니다.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들어있습니다. 즉 십계명을 새긴 돌판,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에서 먹었던 만나를 담은 항아리, 고라 당이 반역할 때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을 나타내셨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의 뚜껑은 두 그룹을 새긴 황금뚜껑으로서 ‘시은소’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상징이었습니다.
오늘에 있어서의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달았을 때에는 즉시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반드시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보다 앞선다든지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동행, 주님을 따르는 데는 세상의 지혜나 자신의 생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때로는 사람을 통하여, 때로는 양심을 통하여, 때로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감동케 하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7: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자 ‘헨리 무어 하우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주 힘든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서 근심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기 아내의 짐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들어갈 때였습니다. 자신이 오는 것을 본 소아마비에 걸린 그의 어린 딸 ‘미니’가 기쁘게 반겼습니다. 그는 딸을 안고 입 맞춘 후, “엄마는 어디에 있니?”하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이층에 계셔요.” “그래, 엄마에게 줄 짐 꾸러미가 있단다.” 그러자 딸이, “아빠, 그것 내가 엄마에게 가져다 드릴게요.”라고 나섰습니다. “아니다 아가. 네가 어떻게 들고 가니? 너 혼자서는 못 들고 가잖니?” 그러나 딸은 애교를 부리면서 “그건 그래요 아빠. 하지만 짐은 내가 들고 아빠가 나를 안고 가시면 되잖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린 딸 ‘미니’와 짐을 함께 안고서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주님 앞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습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근심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안고 가시는 것이 아니었던가!’ 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생활의 문제로 고민하고 걱정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입술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걱정하고 염려하고 삶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님께서 나를 안고 가신다는 사실을 때때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길을 잃지 않으려면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따르면 “너희 행할 길을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길이 비록 처음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처음 이야기 했던 청년의 고민에 대답해 줄 수 있겠습니까? 청년은 공부하는 목표와 교회 일을 하는 목표가 달랐기 때문에 혼란과 고민에 싸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우리의 모든 삶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잠시 머물다가 떠날 세상에 정을 두게 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두 목표를 두면 혼란과 고민만 더하게 됩니다. 우리의 목표가 고귀한 만큼 치러야 할 대가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