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한 가지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9,055회 작성일 2007-04-24 01:14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한 가지 / 누가복음 10:38-42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0:38-42, “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부모 된 여러분들은 자녀들이 어떤 일을 할 때에 가장 마음이 기쁩니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할 때에 기분이 좋습니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 자신의 뜻에 따라주는 것이 가장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어저께 인터넷의 ‘사랑밭 새벽편지’에서 배달된 잔잔한 감동을 주는 편지내용을 소개합니다.
한 엄마에게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얼마 전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죽은 남편이 가해자로 몰려 그들은 맨몸으로 길거리로 쫓겨났습니다. 간신히 헛간을 빌려 가마니를 깔고 변변찮은 이불과 옷가지 몇 개만으로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아침 6시에 집을 나가 빌딩 청소를 하고, 낮에는 학교 급식을 돕고 밤에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살았고, 집안일은 초등학교 3학년 맏이가 맡았습니다. 참으로 고된 삶이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냄비에 콩을 잔뜩 안쳐 놓고 집을 나서며 메모를 썼습니다.
“영호야. 냄비에 콩을 안쳐 놓았으니 이것을 조려 저녁 반찬으로 해라. 콩이 물러지면 간장을 넣어 간을 맞추면 된다. - 엄마가 -”
그날 저녁, 고된 삶에 지칠 대로 지친 엄마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에 수면제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두 아이가 가마니 위에서 이불을 덮고 나란히 잠들었는데 맏이의 머리맡에 “엄마에게!” 라고 쓴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보는 순간 엄마는 수면제를 버리고 맏이가 만든 콩자반을 울며 울며 눈물범벅이 된 채 먹었습니다. 편지내용은 이렇습니다.
“엄마! 오늘 엄마 말대로 콩이 물러졌을 때 간장을 부었는데, 동생이 짜서 못 먹겠다고 투정해서 한 대 때렸더니 울다 잠들었어요. 열심히 콩을 삶았는데… 엄마! 용서해 주세요. 내일은 저를 꼭 깨워 콩 삶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엄마! 피곤하지요? 꼭 건강하세요. 사랑해요. 엄마 고생하는 것 저희도 다 알아요. 먼저 잘게요.”

열 살짜리 아들의 글을 읽고 차마 죽지 못하고, 아들이 만든 그 짜디 짠 콩자반을 울면서 먹어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잠들어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엄마는 마음이 찡한 감동을 느꼈던 것이지요. 엄마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많은 돈도, 출세도, 좋은 환경도 아니었습니다. 죽고 싶도록 앞길이 아득하고 피곤하고 지친 마음을 어린 아들이 알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본문말씀은 이미 여러 번 설교본문으로 말씀을 전한 바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말씀 듣는 것을 기뻐하셨던 내용을 통하여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려합니다.

먼저, 말씀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들리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으로 약 2.7㎞ 거리에 있으며, 감람산의 기슭에 있던 작은 마을입니다. 여기는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그의 오라비 나사로가 살던 마을인데, 예수님은 사역 말기에 종종 여기에 오셨습니다. ‘베다니’라는 이름의 의미가 ‘번민하는 자의 집’ 또는 ‘가난한 자의 집’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푸른 과일의 집’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베다니는 가난하고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시자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이 ‘마르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세 남매를 많이 아끼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본 유대인들이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요 11:36)라고 했습니다. 이 자그마한 가정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갑자기 분주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소중한 손님이신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엄마역할을 했던 마르다가 바빴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언니의 바쁨도 제쳐두고 예수님 발아래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께 하소연을 하러 왔습니다. “주님, 내 동생이 접대하는 일에 나 혼자만 남겨 놓은 것을 개의치 아니하십니까? 동생에게 말씀하셔서 나를 도와주라고 하소서.”라고 일러바칩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며 수고하고 있으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근본적인 관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힘써야 하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한 가지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 몇 곳을 찾아봅시다.
예레미야 9:24절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세아 6: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리고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가 있는 요한복음 17: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는 ‘영생’을 정의하시기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요한일서 2:3-6절을 봅시다.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단순합니다. 우리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여러 가지 일에 너무 얽매여 걱정하고 있구나.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르다처럼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서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행하며,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규칙을 만들어 놓고 지키려 애쓰면서 잘 지킨 열매들을 자랑스럽게 하나님께로 가지고 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도 하지만, 자신이 하나님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셔야 하며, 형통한 길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주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소유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포기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갈라디아서 2:20절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고백이 이러한 깨달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한 가지입니다.

어떤 유명한 교수가 사설 강의실을 경영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교수의 지혜를 배우러 왔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가르치는 교수님에게 보답하려고 저마다 선물을 드렸습니다. 한 청년이 그 교수의 마음에 들어서 제자로 발탁되었습니다. 청년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선물을 하는데 자신은 가난했기 때문에 선물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날은 그 청년이 교수에게 와서 “선생님, 제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교수는 그 청년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의아한 마음으로 “그래, 무슨 선물을 가져왔지? 자네는 돈도 없을 텐데…”라고 되물었습니다. 제자는 머뭇거리다가 “저 자신입니다. 제 마음을 바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교수는 한 동안 말없이 있다가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지금 네게서 받은 선물은 내가 한 번도 받아본 일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너의 선물이 가장 큰 선물이며 가장 큰 기쁨이다. 나도 나를 너에게 주마.”라며 감격해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반대의 경우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나를 헌신했기 때문에 하나님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바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위대한 사랑의 사건입니다. 요한일서 4:10절을 봅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셨으며, 19절에서도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에 호응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며,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2:1-2절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힘과 지식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또는 인정을 받으려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많은 일을 하려고 힘씁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와 교회들이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이 뜻을 행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선전합니다. 마치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혼자 분주하며 힘들어하듯이 말입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힘든 것도 있지만, 주님께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하소연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가지는 오직 자신을 기쁘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드림은 하나님의 뜻을 가장 먼저, 가장 소중하게 순종하고 행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7-9절 상반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황송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혜를 입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적은 물질이나, 지식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고린도전서 4:7절에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한 가지는 우리 자신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완전한 드림이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완전한 드림을 ‘산 제사’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땅에서의 육신의 삶이 보다 편안하고, 안전하고, 보장된 삶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영원한 삶의 보장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십니까? 아직은 젊기 때문에, 많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가 주저되십니까?

여러분, 태어나는 것은 차례가 있지만, 세상을 떠나는 일에는 차례가 없습니다. 이제 더 주저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깁시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에서부터 찾아내시고, 품에 안으시며 우리의 약점까지도 모두 맡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이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고 순종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우리를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시편 48:14절입니다.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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