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믿음을 보이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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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10-23 16:01
*** 너의 믿음을 보이라! / 마 14:25-33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14:25-33,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만일 큰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나는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한다면 그 병이 낫겠습니까?”
물론 “나는 나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낫게 해 주실 것이다.”는 희망과 믿음이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만 가지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기도만 하고 있다면, 과연 그 병이 낫게 될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은 한동안 기도하다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포자기(自暴自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작정 기도만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의 잘못된 점은 무엇이겠습니까?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우리는 가끔 주변에서 신앙이 정말 좋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에서 만난다든지, 가끔 어떤 모임에서 만나면 정말 신앙이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일상생활에서 교제하다 보면, 그 사람의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신앙이 좋아 보이는데, 깊이 교제하거나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두 질문의 공통된 대답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활동하시던 때에는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여서 마을마다 병자들이 넘쳐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적을 체험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한 예로,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 가셨을 때를 봅시다. 그곳에는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병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연못에는 가끔 천사들이 내려와서 물을 흔들어 놓는데 그때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요행을 기다리는 병자들이었습니다. 그 많은 병자 속에서 예수님은 유일하게 삼십 팔년이나 된 병자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셨겠습니까?
그 이유를 바울의 이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삼십 팔년 된 병자도, 사도 바울의 명령을 들은 앉은뱅이도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때에나 지금이나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연중에 요구하시는 것은 “너의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기를 원하시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믿음, 귀신들린 딸을 위하여 간구했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과 같은 그런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며, 이적을 일으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믿음을 보일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로 믿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십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통하여 가르치시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팔십 세가 넘어 자식을 낳을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진 아브라함 부부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적인 희망이 끊어진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든 조건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하십니다. 즉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실 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를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봅시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든 작은 도시락으로 오천 명이나 먹이신 놀라운 이적을 경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밤바다를 항해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따로 한적한 산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벳세다에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 게네사렛 땅으로 먼저 출발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으로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서 항해 중인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파도로 인하여 고생하던 제자들은 어둠 속에서 물빛을 받은 어스름한 형상이 파도 위를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귀신이라고 판단한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때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그래도 베드로가 수제자답게 용기를 내어 다시 확인합니다. “주여, 만일 당신이시거든 나로 물 위를 걸어 당신께로 가게 하소서.” 예수님은 간단명료하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믿고 즉시 물 위로 뛰어 내렸습니다. 놀랍게도 베드로는 물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보고 싶어 하시는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어떠한 조건도 붙이지 않고 말씀 그대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아닌, 하나님을 빙자한 사람의 말을 신뢰합니다. 각종 조미료로 간을 맞춘 사람의 말에 길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8-9절에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오늘날 성도들도 부드럽게 가르치는 사람의 계명에 길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신뢰하지 못합니다.
인도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코끼리를 노동력으로 많이 이용을 합니다. 그런데 그 거대한 동물을 사람의 뜻대로 부리려면 어릴 때부터 길을 들인다고 합니다.
어린 코끼리의 한 쪽 발을 얇은 쇠사슬로 묶어서 적당한 길이를 두고 다른 끝을 말뚝에다 매어둡니다. 어린 코끼리는 벗어나려고 하다가 번번이 걸리고 넘어지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다리에 줄이 조금만 당기게 되어도 멈추어 서게 됩니다.
후에 코끼리가 자라서 거대한 몸집이 되어 쇠사슬을 끊거나, 쉽게 말뚝을 뽑아버릴 수 있는 힘이 있게 되어도,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자신을 구속하는 줄의 힘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코끼리는 자신을 맨 줄에 길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신의 삶에서 불신의 작은 줄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 위에 뛰어 내려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곧 그의 눈은 몰아치는 파도를 보았습니다. ‘내가 미쳤지. 여기에 서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사람이 물 위에를 걷다니, 어이고 저 파도 좀 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보다 육신적인 경험,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앞서버렸습니다. 그 순간이 물 위에 서 있는 마지막이었습니다. 믿음을 상실하는 순간 이적도 사라지고, 능력도 사라지고, 행복도, 안전도 사라졌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는 순간 이적도, 능력도, 행복도, 평안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종이호랑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야고보서 1:6-8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믿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두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병에 걸린 사람이 무작정 기도만 하고 앉아 있다면 그 병이 낫겠습니까? 그 사람의 잘못된 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좋아 보이는데, 깊이 교제하거나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답으로 ‘잘못된 믿음’을 제시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을 살폈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말씀에 대한 신뢰만으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만일 주님이시거든 네게 물 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오라.”였습니다. 이것은 ‘와도 좋다.’는 허락이 아니라, ‘나를 믿고 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고 싶으면 해도 좋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천해야 산다.’는 명령입니다. 만일 그 명령을 불편하게 생각하여 듣지 않게 되면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실 때에, 혹은 사람들에게 어떤 임무를 주시거나, 병을 고치실 때에도 ‘순종’과 ‘거역’의 자리를 두고 기다리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거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리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만나신 38년 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시고는 역시 기다리셨습니다. 이사야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시고는 기다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의 순종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38년 된 병자나, 이사야 선지자나 모두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네.’라며 무시할 수도 있고, 그 말씀을 신뢰하고 그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서 즉시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믿음은 바로 순종을 통해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생각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생활에서는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14절에서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뇨?”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반신반의 하면서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조금 더 확신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십시오. 증거를 보여주십시오.”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와도 빠지지 않게 하겠다는 어떤 설명도 증거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오라.”는 명령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시는 믿음은 어떤 환경이나 증거로 인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은 증거가 사라지고, 환경이 변하면 따라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남침례교 학장을 역임한 ‘스카보로’라는 유명한 박사님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박사님의 어린 아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정말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고 믿으세요. 과학적으로 얼른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그 이야기를 말예요.”
이때 스카보로 박사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앞에 앉혀두고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나는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는 사실을 믿는단다. 뿐만 아니라 만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나가 물고기를 삼키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면 나는 그대로 믿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 일이 왜 불가능하겠니.”
신앙은 과학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과학을 초월합니다. 신앙은 초과학의 세계, 초자연적인 영역까지도 다룹니다. 신앙에서 초자연적인 영역을 제거하면 신앙은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믿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베드로처럼 “주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을 극복하고 이기도록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걸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게서 보고 싶어 하시는 이런 믿음을 나타내서 세상이 두렵지 않는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14:25-33,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만일 큰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나는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한다면 그 병이 낫겠습니까?”
물론 “나는 나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낫게 해 주실 것이다.”는 희망과 믿음이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만 가지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기도만 하고 있다면, 과연 그 병이 낫게 될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은 한동안 기도하다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포자기(自暴自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작정 기도만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의 잘못된 점은 무엇이겠습니까?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우리는 가끔 주변에서 신앙이 정말 좋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에서 만난다든지, 가끔 어떤 모임에서 만나면 정말 신앙이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일상생활에서 교제하다 보면, 그 사람의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신앙이 좋아 보이는데, 깊이 교제하거나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두 질문의 공통된 대답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활동하시던 때에는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여서 마을마다 병자들이 넘쳐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적을 체험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한 예로,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 가셨을 때를 봅시다. 그곳에는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병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연못에는 가끔 천사들이 내려와서 물을 흔들어 놓는데 그때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요행을 기다리는 병자들이었습니다. 그 많은 병자 속에서 예수님은 유일하게 삼십 팔년이나 된 병자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셨겠습니까?
그 이유를 바울의 이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삼십 팔년 된 병자도, 사도 바울의 명령을 들은 앉은뱅이도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때에나 지금이나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연중에 요구하시는 것은 “너의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기를 원하시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믿음, 귀신들린 딸을 위하여 간구했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과 같은 그런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며, 이적을 일으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믿음을 보일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로 믿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십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통하여 가르치시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팔십 세가 넘어 자식을 낳을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진 아브라함 부부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적인 희망이 끊어진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든 조건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하십니다. 즉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실 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를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봅시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든 작은 도시락으로 오천 명이나 먹이신 놀라운 이적을 경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밤바다를 항해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따로 한적한 산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벳세다에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 게네사렛 땅으로 먼저 출발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으로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서 항해 중인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파도로 인하여 고생하던 제자들은 어둠 속에서 물빛을 받은 어스름한 형상이 파도 위를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귀신이라고 판단한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때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그래도 베드로가 수제자답게 용기를 내어 다시 확인합니다. “주여, 만일 당신이시거든 나로 물 위를 걸어 당신께로 가게 하소서.” 예수님은 간단명료하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믿고 즉시 물 위로 뛰어 내렸습니다. 놀랍게도 베드로는 물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보고 싶어 하시는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어떠한 조건도 붙이지 않고 말씀 그대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아닌, 하나님을 빙자한 사람의 말을 신뢰합니다. 각종 조미료로 간을 맞춘 사람의 말에 길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8-9절에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오늘날 성도들도 부드럽게 가르치는 사람의 계명에 길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신뢰하지 못합니다.
인도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코끼리를 노동력으로 많이 이용을 합니다. 그런데 그 거대한 동물을 사람의 뜻대로 부리려면 어릴 때부터 길을 들인다고 합니다.
어린 코끼리의 한 쪽 발을 얇은 쇠사슬로 묶어서 적당한 길이를 두고 다른 끝을 말뚝에다 매어둡니다. 어린 코끼리는 벗어나려고 하다가 번번이 걸리고 넘어지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다리에 줄이 조금만 당기게 되어도 멈추어 서게 됩니다.
후에 코끼리가 자라서 거대한 몸집이 되어 쇠사슬을 끊거나, 쉽게 말뚝을 뽑아버릴 수 있는 힘이 있게 되어도,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자신을 구속하는 줄의 힘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코끼리는 자신을 맨 줄에 길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신의 삶에서 불신의 작은 줄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 위에 뛰어 내려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곧 그의 눈은 몰아치는 파도를 보았습니다. ‘내가 미쳤지. 여기에 서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사람이 물 위에를 걷다니, 어이고 저 파도 좀 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보다 육신적인 경험,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앞서버렸습니다. 그 순간이 물 위에 서 있는 마지막이었습니다. 믿음을 상실하는 순간 이적도 사라지고, 능력도 사라지고, 행복도, 안전도 사라졌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는 순간 이적도, 능력도, 행복도, 평안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종이호랑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야고보서 1:6-8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믿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두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병에 걸린 사람이 무작정 기도만 하고 앉아 있다면 그 병이 낫겠습니까? 그 사람의 잘못된 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좋아 보이는데, 깊이 교제하거나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답으로 ‘잘못된 믿음’을 제시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을 살폈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말씀에 대한 신뢰만으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만일 주님이시거든 네게 물 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오라.”였습니다. 이것은 ‘와도 좋다.’는 허락이 아니라, ‘나를 믿고 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고 싶으면 해도 좋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천해야 산다.’는 명령입니다. 만일 그 명령을 불편하게 생각하여 듣지 않게 되면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실 때에, 혹은 사람들에게 어떤 임무를 주시거나, 병을 고치실 때에도 ‘순종’과 ‘거역’의 자리를 두고 기다리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거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리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만나신 38년 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시고는 역시 기다리셨습니다. 이사야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시고는 기다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의 순종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38년 된 병자나, 이사야 선지자나 모두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네.’라며 무시할 수도 있고, 그 말씀을 신뢰하고 그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서 즉시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믿음은 바로 순종을 통해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생각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생활에서는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14절에서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뇨?”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반신반의 하면서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조금 더 확신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십시오. 증거를 보여주십시오.”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와도 빠지지 않게 하겠다는 어떤 설명도 증거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오라.”는 명령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시는 믿음은 어떤 환경이나 증거로 인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은 증거가 사라지고, 환경이 변하면 따라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남침례교 학장을 역임한 ‘스카보로’라는 유명한 박사님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박사님의 어린 아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정말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고 믿으세요. 과학적으로 얼른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그 이야기를 말예요.”
이때 스카보로 박사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앞에 앉혀두고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나는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는 사실을 믿는단다. 뿐만 아니라 만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나가 물고기를 삼키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면 나는 그대로 믿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 일이 왜 불가능하겠니.”
신앙은 과학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과학을 초월합니다. 신앙은 초과학의 세계, 초자연적인 영역까지도 다룹니다. 신앙에서 초자연적인 영역을 제거하면 신앙은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믿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베드로처럼 “주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을 극복하고 이기도록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걸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게서 보고 싶어 하시는 이런 믿음을 나타내서 세상이 두렵지 않는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