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의 통로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213회
작성일
2007-10-08 22:04
***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 / 고전 10:23-33
** 들어가는 말
고린도전서 10:23-33,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의 것 잘 훔치는 것으로 유명한 남자와 소매치기 잘하는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산모가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기가 손을 꼭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호원이 아기의 손을 펴 보니, 자신의 반지를 쥐고 있더랍니다. 아기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간호원의 반지를 훔쳤다는 것입니다.
물론 꾸민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풍토가 어떠한지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살면서부터 남의 것 탐내는 일이 있어왔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고집스럽게 하는 사람들은 어디든지 있었습니다. 하와나 아담부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셨고,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처럼 사기꾼과 도적과 남의 것을 탐내는 세대는 없었습니다.
영국의 목회자이며 대설교가였던 ‘스펄젼’ 목사는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하고 자신이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은 것도 도적질하는 것이요, 주일 지키지 않는 것은 주일 도둑놈이요, 예배시간에 예배하지 않은 것은 예배 도둑놈이요,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도둑놈이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종말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3절에서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했으며, 디모데후서 3:4절에서는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자리에 자신의 뜻을 두거나, 다른 것을 두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실 때에 ‘말씀하시는 것이나 행하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38-39절에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으며, 5:30절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요한복음 4: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 행하는 것”을 자신의 “양식”이라고까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교 신조 첫 번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21-23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중요한 내용이 이 시간 본문 말씀에서 재확인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요절일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요약한 내용이 본문 31절에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던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한 결론적인 대답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는 선택권이 있는 ‘권면’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있던 고린도 시는 부요한 도시였으며, 특히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시 중앙에는 태양신인 ‘아폴로’ 신의 신전이 있었으며, 고린도 정상에는 ‘아프로디테(Aphrodite)’여신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신전에는 1,000명에 달하는 여 사제들이 살면서 신전 매창(賞娼)이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시의 풍기는 대단히 문란했습니다. 당시에는 ‘고린도 식으로 산다.(korinqiavzomai)’라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이 말은 ‘행실이 나쁘다.’란 뜻이었습니다. 이 음란한 문화는 고린도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고전5장). 그리고 신전 제사에서 나오는 고기들이 시장에서 매매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고기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성도들이 사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바로 본문에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음식 때문에 성도가 영향 받을 것은 전혀 없다.’고 말씀합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도들의 신앙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곧 우상숭배에 참예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믿음이 있어서 우상의 제물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먹을 수 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시험에 들게 된다면, 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하심으로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믿음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자유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세워 이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23-24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 했으며, 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는 하나님과 공명(共鳴)해야 합니다.
공명(共鳴)이란, ‘어떤 소리를 내는 물건이 외부 음파(音波)에 자극되어 이와 동일한 진동수의 소리를 내는 현상’을 말합니다(공명체에 대한 설명). 즉 ‘다른 사람의 사상이나 감정, 행동 따위에 공감하여 찬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공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7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공동번역, “형제 여러분, 나를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과 같이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즉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대로 살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이렇게 오늘까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이어온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제 나름대로 과학적 현상으로 표현해서 ‘하나님과 공명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살든지,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어떤 종족, 어떤 환경이라 할지라도 한 지체들입니다. 즉 종족이 다르고 사는 곳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과 공명한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주의로 사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3절에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 된 곳이라고 하십니다.
중국 내륙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허드슨 테일러’ 박사는 오직 믿음으로 중국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점점 일이 많아지면서 사람과 돈이 필요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테일러 박사는 무거운 정신적인 부담 때문에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한복음 15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는 구절이 가슴에 꽂히듯이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구름에 가렸던 태양이 나오듯이 근심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깊은 깨달음과 함께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은 나무이므로 가지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옵소서.”
테일러 박사는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려 하나님께 자기의 어리석음을 시인하고 회개하며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러자 그 불안했던 마음이 평화가 넘쳤고, 중국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공명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그에 붙은 가지들입니다. 어떤 가지든지 포도나무에 붙은 줄기하면 같은 나무의 진액을 먹고 삽니다. 즉 줄기가 공급하는 대로 먹고, 그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에서 무화과를 맺힐 수는 없지요. 참 감람나무에서 돌 감람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16-19절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혹 마지못해서 신앙생활의 흉내를 내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으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생활과 가정이 잘 되기를 바라고, 유익을 구하면서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소망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 싶다면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되게 해야 합니다. 즉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가능합니다. 이웃이나 주님 안에서 한 식구 된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지 말고, 나를 절제하면서라도 덕을 끼치고 유익을 주는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비뚤어진 신앙적 태도로 목회자를 비난하고 한 지체인 형제자매들을 비판하는 태도가 하나님의 교회에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신앙과 유익을 위하여 나의 자유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그리스도의 생활 태도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되는 삶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일반적인 면에서 볼 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의 사용 권한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요나처럼 도망쳐 버릴 수도 있고, 그저 구경꾼이 되어 방관할 수도 있으며, 전적으로 공명하며 그 뜻에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살든지 그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 행한 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공명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고린도전서 10:23-33,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의 것 잘 훔치는 것으로 유명한 남자와 소매치기 잘하는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산모가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기가 손을 꼭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호원이 아기의 손을 펴 보니, 자신의 반지를 쥐고 있더랍니다. 아기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간호원의 반지를 훔쳤다는 것입니다.
물론 꾸민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풍토가 어떠한지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살면서부터 남의 것 탐내는 일이 있어왔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고집스럽게 하는 사람들은 어디든지 있었습니다. 하와나 아담부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셨고,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처럼 사기꾼과 도적과 남의 것을 탐내는 세대는 없었습니다.
영국의 목회자이며 대설교가였던 ‘스펄젼’ 목사는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하고 자신이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은 것도 도적질하는 것이요, 주일 지키지 않는 것은 주일 도둑놈이요, 예배시간에 예배하지 않은 것은 예배 도둑놈이요,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도둑놈이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종말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3절에서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했으며, 디모데후서 3:4절에서는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자리에 자신의 뜻을 두거나, 다른 것을 두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실 때에 ‘말씀하시는 것이나 행하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38-39절에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으며, 5:30절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요한복음 4: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 행하는 것”을 자신의 “양식”이라고까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교 신조 첫 번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21-23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중요한 내용이 이 시간 본문 말씀에서 재확인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요절일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요약한 내용이 본문 31절에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던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한 결론적인 대답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는 선택권이 있는 ‘권면’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있던 고린도 시는 부요한 도시였으며, 특히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시 중앙에는 태양신인 ‘아폴로’ 신의 신전이 있었으며, 고린도 정상에는 ‘아프로디테(Aphrodite)’여신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신전에는 1,000명에 달하는 여 사제들이 살면서 신전 매창(賞娼)이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시의 풍기는 대단히 문란했습니다. 당시에는 ‘고린도 식으로 산다.(korinqiavzomai)’라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이 말은 ‘행실이 나쁘다.’란 뜻이었습니다. 이 음란한 문화는 고린도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고전5장). 그리고 신전 제사에서 나오는 고기들이 시장에서 매매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고기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성도들이 사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바로 본문에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음식 때문에 성도가 영향 받을 것은 전혀 없다.’고 말씀합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도들의 신앙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곧 우상숭배에 참예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믿음이 있어서 우상의 제물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먹을 수 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시험에 들게 된다면, 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하심으로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믿음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자유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세워 이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23-24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 했으며, 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는 하나님과 공명(共鳴)해야 합니다.
공명(共鳴)이란, ‘어떤 소리를 내는 물건이 외부 음파(音波)에 자극되어 이와 동일한 진동수의 소리를 내는 현상’을 말합니다(공명체에 대한 설명). 즉 ‘다른 사람의 사상이나 감정, 행동 따위에 공감하여 찬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공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7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공동번역, “형제 여러분, 나를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과 같이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즉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대로 살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이렇게 오늘까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이어온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제 나름대로 과학적 현상으로 표현해서 ‘하나님과 공명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살든지,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어떤 종족, 어떤 환경이라 할지라도 한 지체들입니다. 즉 종족이 다르고 사는 곳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과 공명한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주의로 사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3절에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 된 곳이라고 하십니다.
중국 내륙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허드슨 테일러’ 박사는 오직 믿음으로 중국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점점 일이 많아지면서 사람과 돈이 필요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테일러 박사는 무거운 정신적인 부담 때문에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한복음 15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는 구절이 가슴에 꽂히듯이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구름에 가렸던 태양이 나오듯이 근심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깊은 깨달음과 함께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은 나무이므로 가지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옵소서.”
테일러 박사는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려 하나님께 자기의 어리석음을 시인하고 회개하며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러자 그 불안했던 마음이 평화가 넘쳤고, 중국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공명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그에 붙은 가지들입니다. 어떤 가지든지 포도나무에 붙은 줄기하면 같은 나무의 진액을 먹고 삽니다. 즉 줄기가 공급하는 대로 먹고, 그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에서 무화과를 맺힐 수는 없지요. 참 감람나무에서 돌 감람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16-19절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혹 마지못해서 신앙생활의 흉내를 내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으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생활과 가정이 잘 되기를 바라고, 유익을 구하면서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소망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 싶다면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되게 해야 합니다. 즉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가능합니다. 이웃이나 주님 안에서 한 식구 된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지 말고, 나를 절제하면서라도 덕을 끼치고 유익을 주는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비뚤어진 신앙적 태도로 목회자를 비난하고 한 지체인 형제자매들을 비판하는 태도가 하나님의 교회에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신앙과 유익을 위하여 나의 자유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그리스도의 생활 태도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되는 삶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일반적인 면에서 볼 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의 사용 권한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요나처럼 도망쳐 버릴 수도 있고, 그저 구경꾼이 되어 방관할 수도 있으며, 전적으로 공명하며 그 뜻에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살든지 그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 행한 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공명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