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무너뜨리는 작은 틈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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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10-01 21:52
*** 인생을 무너뜨리는 작은 틈 / 고전 5:6-8, 왕상 11:1-8
** 들어가는 말
고린도전서 5:6-8,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열왕기상 11:1-8
우리가 가끔 사용하는 말 중에, ‘도루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은어’라는 항목을 찾아보면 두 종류의 물고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회귀성을 가진 20-30cm크기의 날씬한 물고기인‘은어’이며, 다른 하나는 ‘도루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잘 되다가 어그러져 원래 상태로 돌아갔을 때, ‘말짱 도루묵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생기게 된 유래가 있습니다.
조선 선조 때, 임금이 국난으로 인하여 궁궐을 떠나 피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식량이 귀하던 차에 마침 한 백성이 ‘묵’이라는 물고기를 임금께 바쳤습니다. 임금이 그 고기를 먹어보니 그 맛이 천하일품이었습니다. 그 맛이 하도 기가 막혀서 임금을 그 물고기의 이름을 ‘은어’라 부르도록 명했습니다. 물고기의 맛과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얼마 후, 난리는 끝이 났고 임금을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피난길에서 먹었던 은어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 요리를 해오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산해진미로 입맛이 길들여진 임금에게 그 물고기가 맛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맛있었던 은어의 맛이 영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도루 ‘묵’이라고 불러라”고 명했습니다. 여기서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처지를 비유해서 잠언 26:11절에서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솔로몬의 경우와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사실, ‘묵’이라는 고기의 맛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입맛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음식이라도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의 맛을 달라집니다. 솔로몬의 경우에는 입맛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믿음이 변질 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믿음뿐만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믿음의 변질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변질은 무시하기 쉬운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천천히 속도를 높여가며 변질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생명체의 탄생이 하나의 작은 세포로부터 시작되며, 사람의 지식도, 일도 모두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33절에서 천국을 비유하시면서 ‘누룩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누룩의 확장성’을 말하는 것인데 좋은 쪽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멸망케 하는 죄와 악한 것의 시작도 역시 작은 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 한 이 누룩의 비유는 좋지 않은 쪽으로 해석한 ‘누룩의 확장성’입니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저수지도 작은 개미가 구멍을 뚫는 것에서 시작하여 무너져 내린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하잘 것 없는 미혹이나 유혹을 방치하다가 결국 깊은 죄악의 구덩이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이 시간의 구약 본문에서 등장하는 솔로몬의 경우입니다. 이 두 본문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의 삶의 형태를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지금 나 자신의 믿음을 살펴봅시다.
솔로몬이 왕이 될 때의 믿음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가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의 내용이 그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8:25절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말씀 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로 좇아나서 이스라엘 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허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와 약속하신 대로 내가 그 말씀을 다 지켰으니 그 약속을 이루어주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기도대로 통치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기뻐하셨고,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부귀영화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열왕기상 8:61절에서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라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믿음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했던 솔로몬의 마음이 우상을 숭배하는 많은 이방 여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는 정략결혼을 포함하여 무려 일천 명의 처와 첩들을 두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왕의 법규를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명기 17:16-17절을 봅시다.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왕 된 자가 지켜야 하는 하나님이 명하신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그토록 훌륭하던 솔로몬의 믿음도 환경을 따라서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자리까지도 같이 가겠다.”던 제자들이 상황이 바뀌자 그들의 믿음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위하여 모두 도망가 버렸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아니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딱 잡아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아니하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마음이 뜨거워져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때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 때의 믿음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이 더욱 든든해지고 사랑이 더욱 깊어져 있습니까? 혹시 그 때와 달라진 환경과 상황 따라 변하여 있지나 않습니까? 요즈음 같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2. 믿음을 좌우하는 내 주변의 환경을 살펴봅시다.
환경의 힘은 대단합니다. 사람을 완전히 딴 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1920년 영국의 인류학자들이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도의 어느 지방에서 ‘늑대들의 무리 속에서 두 아이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인도로 가서 늑대 무리 속에 있는 아이들을 사로잡는데 성공했습니다. 두 아이는 여자였고, 늑대처럼 네 발로 뛰어다녔으며, 손을 사용하지 않고 입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날고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고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일반 사람들보다 귀가 훨씬 밝았습니다. 또한 야행성 동물과 마찬가지로 밝은 낮에는 잘 보지 못했지만, 어둠 속에서는 자유롭게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어떤 경위로 늑대 무리 속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환경이 그들을 늑대의 습성을 갖도록 했으며, 그들 또한 그 환경에 잘 적응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향한 든든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도 환경이었습니다. 열왕기상 3:1절에, “솔로몬이 애굽왕 바로로 더불어 인연을 맺어 그 딸을 취하고 데려다가 다윗 성에 두고…”라고 했습니다. 본문 1절에서는 ‘모압 여자들과 에돔, 시돈, 헷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법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2절에서 “여호와께서 일찌기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라고 했으며, 출애굽기 34:15-16절에서는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16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경고하신 이유는 ‘유혹의 작은 틈이 든든한 믿음의 둑을 능히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전쟁을 보면, 하나님께서 대부분의 점령지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예 죄를 부르는 모든 싹을 제거하라는 의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2절에서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고, 마가복음 9:43-47절에서는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인생을 무너뜨리는 죄악의 틈을 철저히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환경을 지배하기를 원하십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은 곧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우리 성도들도 역시 세상의 환경을 지배할 수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물론 환경을 지배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유혹에 약한 육신의 의지를 부인하고, 그로인하여 다가오는 어려움과 핍박과 불이익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즐거움을 모두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3. 내 인생을 무너뜨리는 틈을 찾읍시다.
‘세월이 약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마음이나 육신의 아픔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고 치유된다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시간의 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은 개미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물방울에 시간이라는 힘이 더해지면 바위도 뚫어버리는 위력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생애가 다해가는 말년에 우상을 위한 신전들을 세우고, 우상 숭배까지 했습니다(본문 4,5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징계를 결정하셨습니다. 그 위대하던 지혜와 믿음은 어디로 가고, 우상 숭배를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되었습니다. 한참 힘과 능력과 믿음이 왕성한 시기에는 유혹적인 환경들이 작은 물방울처럼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밀가루 반죽을 할 때에 넣는 누룩의 양은 밀가루의 양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적은 양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시간이라는 힘에 업혀서 바위를 뚫고, 온 반죽을 부풀게 만드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그 위대한 지혜로도 작은 죄악의 틈 하나가 자신을 무너뜨릴 줄 몰랐습니다. 아니, 알면서도 작다고 방치했을지도 모릅니다.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 작은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좋을 때는 천 명의 아내라 할지라도 그들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었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되는 아내들의 유혹에 나이 많은 솔로몬은 끝내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본문 9절에,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큰 핍박이나 환난이 아닙니다. 핍박이나 환난은 오히려 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반작용이 있습니다. 가장 큰 위협은 시간을 두고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작은 죄의 유혹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깊은 책망을 들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부터 사랑이 없었습니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켰으며,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핍박도 이겼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믿음이 식어가고 사랑을 잃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바쁘다고 예배에 한 번 빠지고, 피곤하다고 하루 기도를 쉬고,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 번 거짓말하고, 살림이 쪼들린다고 십일조 감사헌금 한 번씩 빼먹고, 나 살기 바빠서 남을 위한 봉사도 섬김도 미루다 보면, 이것이 시간의 힘을 업고 사단의 비호아래서 인생을 무너뜨릴 틈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틈을 계속 방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기 전에 잘라 내야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옛 습관들인 묵은 누룩을 내어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는 진정한 사랑을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의 입맛이 변하듯이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도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 또한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방치하고 있는 작은 습관과 유혹이 나를 무너뜨린다는 것도 기억합시다. 역시 작은 생활의 염려가 진리의 말씀을 자라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지금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거든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하고 실천하십시오. 그리하여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더욱 깊어지는 믿음으로, 주어진 환경을 다스리는 능력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고린도전서 5:6-8,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열왕기상 11:1-8
우리가 가끔 사용하는 말 중에, ‘도루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은어’라는 항목을 찾아보면 두 종류의 물고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회귀성을 가진 20-30cm크기의 날씬한 물고기인‘은어’이며, 다른 하나는 ‘도루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잘 되다가 어그러져 원래 상태로 돌아갔을 때, ‘말짱 도루묵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생기게 된 유래가 있습니다.
조선 선조 때, 임금이 국난으로 인하여 궁궐을 떠나 피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식량이 귀하던 차에 마침 한 백성이 ‘묵’이라는 물고기를 임금께 바쳤습니다. 임금이 그 고기를 먹어보니 그 맛이 천하일품이었습니다. 그 맛이 하도 기가 막혀서 임금을 그 물고기의 이름을 ‘은어’라 부르도록 명했습니다. 물고기의 맛과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얼마 후, 난리는 끝이 났고 임금을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피난길에서 먹었던 은어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 요리를 해오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산해진미로 입맛이 길들여진 임금에게 그 물고기가 맛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맛있었던 은어의 맛이 영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도루 ‘묵’이라고 불러라”고 명했습니다. 여기서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처지를 비유해서 잠언 26:11절에서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솔로몬의 경우와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사실, ‘묵’이라는 고기의 맛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입맛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음식이라도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의 맛을 달라집니다. 솔로몬의 경우에는 입맛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믿음이 변질 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믿음뿐만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믿음의 변질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변질은 무시하기 쉬운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천천히 속도를 높여가며 변질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생명체의 탄생이 하나의 작은 세포로부터 시작되며, 사람의 지식도, 일도 모두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33절에서 천국을 비유하시면서 ‘누룩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누룩의 확장성’을 말하는 것인데 좋은 쪽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멸망케 하는 죄와 악한 것의 시작도 역시 작은 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 한 이 누룩의 비유는 좋지 않은 쪽으로 해석한 ‘누룩의 확장성’입니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저수지도 작은 개미가 구멍을 뚫는 것에서 시작하여 무너져 내린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하잘 것 없는 미혹이나 유혹을 방치하다가 결국 깊은 죄악의 구덩이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이 시간의 구약 본문에서 등장하는 솔로몬의 경우입니다. 이 두 본문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의 삶의 형태를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지금 나 자신의 믿음을 살펴봅시다.
솔로몬이 왕이 될 때의 믿음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가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의 내용이 그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8:25절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말씀 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로 좇아나서 이스라엘 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허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와 약속하신 대로 내가 그 말씀을 다 지켰으니 그 약속을 이루어주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기도대로 통치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기뻐하셨고,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부귀영화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열왕기상 8:61절에서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라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믿음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했던 솔로몬의 마음이 우상을 숭배하는 많은 이방 여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는 정략결혼을 포함하여 무려 일천 명의 처와 첩들을 두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왕의 법규를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명기 17:16-17절을 봅시다.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왕 된 자가 지켜야 하는 하나님이 명하신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그토록 훌륭하던 솔로몬의 믿음도 환경을 따라서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자리까지도 같이 가겠다.”던 제자들이 상황이 바뀌자 그들의 믿음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위하여 모두 도망가 버렸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아니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딱 잡아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아니하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마음이 뜨거워져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때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 때의 믿음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이 더욱 든든해지고 사랑이 더욱 깊어져 있습니까? 혹시 그 때와 달라진 환경과 상황 따라 변하여 있지나 않습니까? 요즈음 같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2. 믿음을 좌우하는 내 주변의 환경을 살펴봅시다.
환경의 힘은 대단합니다. 사람을 완전히 딴 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1920년 영국의 인류학자들이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도의 어느 지방에서 ‘늑대들의 무리 속에서 두 아이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인도로 가서 늑대 무리 속에 있는 아이들을 사로잡는데 성공했습니다. 두 아이는 여자였고, 늑대처럼 네 발로 뛰어다녔으며, 손을 사용하지 않고 입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날고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고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일반 사람들보다 귀가 훨씬 밝았습니다. 또한 야행성 동물과 마찬가지로 밝은 낮에는 잘 보지 못했지만, 어둠 속에서는 자유롭게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어떤 경위로 늑대 무리 속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환경이 그들을 늑대의 습성을 갖도록 했으며, 그들 또한 그 환경에 잘 적응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향한 든든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도 환경이었습니다. 열왕기상 3:1절에, “솔로몬이 애굽왕 바로로 더불어 인연을 맺어 그 딸을 취하고 데려다가 다윗 성에 두고…”라고 했습니다. 본문 1절에서는 ‘모압 여자들과 에돔, 시돈, 헷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법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2절에서 “여호와께서 일찌기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라고 했으며, 출애굽기 34:15-16절에서는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16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경고하신 이유는 ‘유혹의 작은 틈이 든든한 믿음의 둑을 능히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전쟁을 보면, 하나님께서 대부분의 점령지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예 죄를 부르는 모든 싹을 제거하라는 의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2절에서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고, 마가복음 9:43-47절에서는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인생을 무너뜨리는 죄악의 틈을 철저히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환경을 지배하기를 원하십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은 곧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우리 성도들도 역시 세상의 환경을 지배할 수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물론 환경을 지배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유혹에 약한 육신의 의지를 부인하고, 그로인하여 다가오는 어려움과 핍박과 불이익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즐거움을 모두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3. 내 인생을 무너뜨리는 틈을 찾읍시다.
‘세월이 약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마음이나 육신의 아픔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고 치유된다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시간의 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은 개미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물방울에 시간이라는 힘이 더해지면 바위도 뚫어버리는 위력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생애가 다해가는 말년에 우상을 위한 신전들을 세우고, 우상 숭배까지 했습니다(본문 4,5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징계를 결정하셨습니다. 그 위대하던 지혜와 믿음은 어디로 가고, 우상 숭배를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되었습니다. 한참 힘과 능력과 믿음이 왕성한 시기에는 유혹적인 환경들이 작은 물방울처럼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밀가루 반죽을 할 때에 넣는 누룩의 양은 밀가루의 양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적은 양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시간이라는 힘에 업혀서 바위를 뚫고, 온 반죽을 부풀게 만드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그 위대한 지혜로도 작은 죄악의 틈 하나가 자신을 무너뜨릴 줄 몰랐습니다. 아니, 알면서도 작다고 방치했을지도 모릅니다.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 작은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좋을 때는 천 명의 아내라 할지라도 그들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었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되는 아내들의 유혹에 나이 많은 솔로몬은 끝내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본문 9절에,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큰 핍박이나 환난이 아닙니다. 핍박이나 환난은 오히려 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반작용이 있습니다. 가장 큰 위협은 시간을 두고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작은 죄의 유혹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깊은 책망을 들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부터 사랑이 없었습니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켰으며,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핍박도 이겼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믿음이 식어가고 사랑을 잃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바쁘다고 예배에 한 번 빠지고, 피곤하다고 하루 기도를 쉬고,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 번 거짓말하고, 살림이 쪼들린다고 십일조 감사헌금 한 번씩 빼먹고, 나 살기 바빠서 남을 위한 봉사도 섬김도 미루다 보면, 이것이 시간의 힘을 업고 사단의 비호아래서 인생을 무너뜨릴 틈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틈을 계속 방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기 전에 잘라 내야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옛 습관들인 묵은 누룩을 내어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는 진정한 사랑을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의 입맛이 변하듯이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도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 또한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방치하고 있는 작은 습관과 유혹이 나를 무너뜨린다는 것도 기억합시다. 역시 작은 생활의 염려가 진리의 말씀을 자라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지금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거든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하고 실천하십시오. 그리하여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더욱 깊어지는 믿음으로, 주어진 환경을 다스리는 능력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