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무리의 큰 능력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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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9-16 14:07
*** 적은 무리의 큰 능력 / 누가복음 12:29-34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2:29-34,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했는데, 현대 사회가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많이, 더 많이 가지려합니다. 높이 더 높이 올라가려 합니다. 편할수록 더 많이 편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세상 정치는 다수결의 원칙을 고수하는 민주주의를 선호합니다. 사람들은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좋다.)’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다수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 아닙니다.
금세기 최고의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의 걸작 ‘A Study of History(역사연구)’가 있습니다. 총 열 두 권으로 이루어진 역사연구서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풀이합니다. 즉 인간의 역사는 계속적으로 도전이 있고, 이 도전에 대하여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에는 수많은 문명들이 등장했었습니다. 그런데 잉카문명, 마야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등은 수세기에 걸쳐 불가사의할 정도로 화려하게 꽃피웠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반면에 중국을 중심으로 한 극동문명, 인도문명, 이집트문명 등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이러한 인간역사를 연구하던 토인비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자연재해나 외세의 침략 같은 도전을 받지 않은 문명은 스스로 멸망해 버렸지만, 심각할 정도로 도전을 받았던 문명은 지금도 찬란하게 꽃피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도전에 대한 응전의 저력을 갖추지 못한 민족이나 국가는 자연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Creative Minority(창조적 소수) 와 Dominant Minority(지배적 소수) 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결국 인간역사는 창조적이고 지배적인 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움직여져 왔습니다. 히틀러, 칼 막스, 스탈린, 레닌, 김일성 등의 소수 미친 지배자들 때문에 온 인류가 고생을 했습니다. 에디슨, 베토벤, 미켈란젤로, 마틴 루터 등의 창조적 소수로 인하여 인류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2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즉 죄의 지배를 받은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온 인류가 죄에 빠졌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음도 소수에 의해서, 생명도 소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나 성도들 중에서도 다수를 중시하고 많은 것, 큰 것만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큰 교회, 많이 가진 사람을 좋아하고 신앙이 좋다고 인정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선민을 이끌어내셨으며, 헌신된 모세, 아론, 훌, 여호수아, 갈렙 같은 창조적인 소수의 사람들로 민족을 이끄셨습니다. 기드온의 300 용사로 수십만 명의 군사를 대적하게 하셨으며,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로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은 작은 것에서부터 성장한다 하셨고, 적은 능력을 가졌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믿음을 지킨 교회’로 칭찬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역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한 소수의 사람을 사용하셔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적은 무리가 큰 능력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1.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큰 능력을 이루는 길입니다.
본문 29-30절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따르는 사람들에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필요를 위하여 구태여 구할 필요가 없으며, 근심하는 것까지도 헛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세상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의지하기 때문에 육신의 필요를 염려하며,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5절에서도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육신이 살아가는 일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기 시작하면 성령님의 존재감도 점점 작아집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과 계획이 인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인생 경영자가 되면 잘 될 것 같지만,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인생의 경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인생 최상의 경영자 중 한 사람이었던 솔로몬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라고 하면서 과수원을 만들고, 저수지를 만들고, 노비와 은금을 많게 하고, 처와 첩들을 수없이 많이 두었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소유하였고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은 그 무엇 하나 막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어려운 일에서도 큰 즐거움을 느꼈다. 이 즐거움이야말로 진실로 내 모든 수고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었다. 그러나 뒤돌아보니 내가 애써 구하였던 그 모든 것은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된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귀중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현대어성경, 전 2:10-11)고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지혜를 가졌다는 솔로몬도 자신의 경영을 돌아보면서 “내가 애써 구하였던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된 일이었다.”고 합니다.
중국 ‘열자(列子)’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取金之時(취금지시) 不見人(불견인)하고. 徒見金(도견금)이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금을 훔칠 때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한갓 금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이 어떤 일에 너무 집착 하면 그것만 보이지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비유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옛날 제나라 때 일입니다. 대낮에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와서 금을 훔쳐 달아나다가 즉각 포졸에게 잡혔습니다. 포졸은 그를 끌고 가면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금을 훔쳐가는 못난 놈이 어디 있느냐?”
그러자 그 도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을 훔칠 때는 금만 보였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물질 욕심에 집착이 심하면 심할수록 약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묶어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돈의 노예가 되고, 명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노예가 되고, 쾌락의 노예가 됩니다. 이 말은 결국 사단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의지하는 결과는 스스로를 죽게 만드는 멸망의 길입니다.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소유인 밭을 하나님께 헌납했습니다. 아나니아가 밭을 팔아서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돈을 보니 욕심이 생겨서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를 사도 베드로에게 내놓으면서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미 성령 충만하심으로 아나니아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으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게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즉시로 아나니아가 죽었습니다. 정직하게 일부라고만 해도 되었을 텐데 거짓말을 했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몸이 살아가는 일 때문에 염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구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적인 추구는 세상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큰 능력을 이루는 길입니다.
본문 31-32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얻을 수 있는 위대하고 큰 능력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6:33절에서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자체가 순종의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의 순종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요즈음 전자제품들 다루기 힘들지요? 휴대전화나 홈시어터, 컴퓨터나 각종 전자제품 등은 설명서 없이는 다루기가 무척 힘듭니다. 또한 설명서를 잘 읽고 따라 해야 제대로 제품의 성능을 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제품 속에 들어 있는 ‘매뉴얼(제품설명서)’과 같습니다. 어떤 제품을 사든지 그 속에는 사용설명서가 있습니다. 매뉴얼은 제품을 만든 사람이 사용자가 제품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인생 매뉴얼입니다. 디모데후서 3: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하십니다. 즉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기를 원한다면 인생 매뉴얼인 성경말씀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선교사가 자기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졌다가 회복하게 된 과정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가까이 살지 않는 죄와 그 위험성과 감사치 못하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기도도 했고, 고민도 하고, 금식도 하고, 각오도 해 보았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오랫동안 묵상도 해 보았고, 열심히 봉사도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 거듭거듭 실패하였고, 능력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다른 해결 방책은 없는 것일까? 이렇게 계속 실패하는 삶을 끝까지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자녀로서 갖는 특권을 내세울 수 없을 만큼 내게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예수 안에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음을 확신했지만 그것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믿음은 생겨나지 않았고, 또 믿음을 활용해 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내 영혼의 고민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한 친구로부터 온 편지가 내 눈을 뜨게 했으며, 성령께서는 내가 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얻으려고 노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신실하신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분 안에서 쉼으로만 얻을 수 있다네…’
이 편지를 읽고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나는 그의 몸의 한 부분이며, 그의 육신과 뼈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사실은 그리스도와 내가 한 몸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실 수 있으며. 그의 뜻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길,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길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 뿐입니다. 그래서 잠언 16:1절에서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했고, 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37:2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얻을 수 있는 위대하고 큰 능력의 길은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3. 큰 능력을 이루는 길은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본문 33-34절입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이 말씀은 세상에 대한 욕망을 비우는 자기 비움의 길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세상적인 욕망을 비울 때에 가능합니다. 신앙이 성장하고 보존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소유욕’입니다. 세상의 물질이든지, 돈이든지, 지식이든지 권력이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소유욕’은 말씀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 중에서 가시덤불 같은 마음 밭에 떨어진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가시덤불에 덮인 땅은 가르침을 듣기는 하지만 생활에 대한 걱정과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막아버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현대어성경, 마 13:22)
사람들은 자기가 관심을 많이 가진 곳에 아낌없이 내어놓기도 하고 투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물질을 내어놓은 곳에 당연히 마음을 많이 둡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고 간파하신 대로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베푸는 일, 하나님께 드리는 일, 주의 이름으로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이며 저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 인색한 사람은 후일에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를 비워내면 그 빈자리는 하나님께서 그 크신 능력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19절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말씀을 종합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크고 많은 것이 인정을 받는다거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입게 됩니다. 내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며,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큰 능력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함이 없는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나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신을 비우는 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머물게 하는 길이 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2:29-34,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했는데, 현대 사회가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많이, 더 많이 가지려합니다. 높이 더 높이 올라가려 합니다. 편할수록 더 많이 편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세상 정치는 다수결의 원칙을 고수하는 민주주의를 선호합니다. 사람들은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좋다.)’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다수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 아닙니다.
금세기 최고의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의 걸작 ‘A Study of History(역사연구)’가 있습니다. 총 열 두 권으로 이루어진 역사연구서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풀이합니다. 즉 인간의 역사는 계속적으로 도전이 있고, 이 도전에 대하여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에는 수많은 문명들이 등장했었습니다. 그런데 잉카문명, 마야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등은 수세기에 걸쳐 불가사의할 정도로 화려하게 꽃피웠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반면에 중국을 중심으로 한 극동문명, 인도문명, 이집트문명 등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이러한 인간역사를 연구하던 토인비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자연재해나 외세의 침략 같은 도전을 받지 않은 문명은 스스로 멸망해 버렸지만, 심각할 정도로 도전을 받았던 문명은 지금도 찬란하게 꽃피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도전에 대한 응전의 저력을 갖추지 못한 민족이나 국가는 자연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Creative Minority(창조적 소수) 와 Dominant Minority(지배적 소수) 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결국 인간역사는 창조적이고 지배적인 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움직여져 왔습니다. 히틀러, 칼 막스, 스탈린, 레닌, 김일성 등의 소수 미친 지배자들 때문에 온 인류가 고생을 했습니다. 에디슨, 베토벤, 미켈란젤로, 마틴 루터 등의 창조적 소수로 인하여 인류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2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즉 죄의 지배를 받은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온 인류가 죄에 빠졌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음도 소수에 의해서, 생명도 소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나 성도들 중에서도 다수를 중시하고 많은 것, 큰 것만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큰 교회, 많이 가진 사람을 좋아하고 신앙이 좋다고 인정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선민을 이끌어내셨으며, 헌신된 모세, 아론, 훌, 여호수아, 갈렙 같은 창조적인 소수의 사람들로 민족을 이끄셨습니다. 기드온의 300 용사로 수십만 명의 군사를 대적하게 하셨으며,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로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은 작은 것에서부터 성장한다 하셨고, 적은 능력을 가졌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믿음을 지킨 교회’로 칭찬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역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한 소수의 사람을 사용하셔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적은 무리가 큰 능력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1.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큰 능력을 이루는 길입니다.
본문 29-30절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따르는 사람들에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필요를 위하여 구태여 구할 필요가 없으며, 근심하는 것까지도 헛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세상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의지하기 때문에 육신의 필요를 염려하며,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5절에서도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육신이 살아가는 일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기 시작하면 성령님의 존재감도 점점 작아집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과 계획이 인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인생 경영자가 되면 잘 될 것 같지만,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인생의 경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인생 최상의 경영자 중 한 사람이었던 솔로몬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라고 하면서 과수원을 만들고, 저수지를 만들고, 노비와 은금을 많게 하고, 처와 첩들을 수없이 많이 두었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소유하였고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은 그 무엇 하나 막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어려운 일에서도 큰 즐거움을 느꼈다. 이 즐거움이야말로 진실로 내 모든 수고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었다. 그러나 뒤돌아보니 내가 애써 구하였던 그 모든 것은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된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귀중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현대어성경, 전 2:10-11)고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지혜를 가졌다는 솔로몬도 자신의 경영을 돌아보면서 “내가 애써 구하였던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된 일이었다.”고 합니다.
중국 ‘열자(列子)’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取金之時(취금지시) 不見人(불견인)하고. 徒見金(도견금)이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금을 훔칠 때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한갓 금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이 어떤 일에 너무 집착 하면 그것만 보이지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비유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옛날 제나라 때 일입니다. 대낮에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와서 금을 훔쳐 달아나다가 즉각 포졸에게 잡혔습니다. 포졸은 그를 끌고 가면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금을 훔쳐가는 못난 놈이 어디 있느냐?”
그러자 그 도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을 훔칠 때는 금만 보였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물질 욕심에 집착이 심하면 심할수록 약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묶어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돈의 노예가 되고, 명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노예가 되고, 쾌락의 노예가 됩니다. 이 말은 결국 사단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의지하는 결과는 스스로를 죽게 만드는 멸망의 길입니다.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소유인 밭을 하나님께 헌납했습니다. 아나니아가 밭을 팔아서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돈을 보니 욕심이 생겨서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를 사도 베드로에게 내놓으면서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미 성령 충만하심으로 아나니아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으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게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즉시로 아나니아가 죽었습니다. 정직하게 일부라고만 해도 되었을 텐데 거짓말을 했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몸이 살아가는 일 때문에 염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구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적인 추구는 세상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큰 능력을 이루는 길입니다.
본문 31-32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얻을 수 있는 위대하고 큰 능력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6:33절에서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자체가 순종의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의 순종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요즈음 전자제품들 다루기 힘들지요? 휴대전화나 홈시어터, 컴퓨터나 각종 전자제품 등은 설명서 없이는 다루기가 무척 힘듭니다. 또한 설명서를 잘 읽고 따라 해야 제대로 제품의 성능을 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제품 속에 들어 있는 ‘매뉴얼(제품설명서)’과 같습니다. 어떤 제품을 사든지 그 속에는 사용설명서가 있습니다. 매뉴얼은 제품을 만든 사람이 사용자가 제품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인생 매뉴얼입니다. 디모데후서 3: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하십니다. 즉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기를 원한다면 인생 매뉴얼인 성경말씀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선교사가 자기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졌다가 회복하게 된 과정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가까이 살지 않는 죄와 그 위험성과 감사치 못하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기도도 했고, 고민도 하고, 금식도 하고, 각오도 해 보았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오랫동안 묵상도 해 보았고, 열심히 봉사도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 거듭거듭 실패하였고, 능력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다른 해결 방책은 없는 것일까? 이렇게 계속 실패하는 삶을 끝까지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자녀로서 갖는 특권을 내세울 수 없을 만큼 내게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예수 안에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음을 확신했지만 그것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믿음은 생겨나지 않았고, 또 믿음을 활용해 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내 영혼의 고민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한 친구로부터 온 편지가 내 눈을 뜨게 했으며, 성령께서는 내가 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얻으려고 노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신실하신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분 안에서 쉼으로만 얻을 수 있다네…’
이 편지를 읽고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나는 그의 몸의 한 부분이며, 그의 육신과 뼈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사실은 그리스도와 내가 한 몸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실 수 있으며. 그의 뜻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길,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길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 뿐입니다. 그래서 잠언 16:1절에서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했고, 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37:2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얻을 수 있는 위대하고 큰 능력의 길은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3. 큰 능력을 이루는 길은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본문 33-34절입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이 말씀은 세상에 대한 욕망을 비우는 자기 비움의 길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세상적인 욕망을 비울 때에 가능합니다. 신앙이 성장하고 보존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소유욕’입니다. 세상의 물질이든지, 돈이든지, 지식이든지 권력이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소유욕’은 말씀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 중에서 가시덤불 같은 마음 밭에 떨어진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가시덤불에 덮인 땅은 가르침을 듣기는 하지만 생활에 대한 걱정과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막아버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현대어성경, 마 13:22)
사람들은 자기가 관심을 많이 가진 곳에 아낌없이 내어놓기도 하고 투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물질을 내어놓은 곳에 당연히 마음을 많이 둡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고 간파하신 대로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베푸는 일, 하나님께 드리는 일, 주의 이름으로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이며 저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 인색한 사람은 후일에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를 비워내면 그 빈자리는 하나님께서 그 크신 능력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19절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말씀을 종합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크고 많은 것이 인정을 받는다거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입게 됩니다. 내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며,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큰 능력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함이 없는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나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신을 비우는 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머물게 하는 길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