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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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8-29 15:53
*** 쉼 / 마가복음 6:30-44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6:30-4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유치원 가방을 멘 아이 둘이 달려옵니다. “아저씨, 같이 가요!” 숨을 헐떡이며 달려 온 꼬마가 “아이 힘들어!”라며 벽에 기댑니다. 다른 꼬마가 “나도 피곤해!” 라며 친구 옆에 기댑니다.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뭐가 그렇게 피곤하니?”라고 물었습니다. 꼬마가 당돌하게 “아저씨, 유치원 가야지요. 피아노 치러 가고, 미술학원에도 가야하고, 학습지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안 힘들어요?”라고 되레 따지고 듭니다.
정말 피곤할 만합니다. 그렇지요? 사람에게는 일이 필요합니다. 배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살아 있는 유기체여서 쉼도 필요합니다. 너무 여유시간이 많고 놀기만 해도 문제가 되지만, 일에 매이고 삶에 매여서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금세기 독일의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그의 저서인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쉬는 방법에 따라서 인간은 변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향하신 뜻이 그러합니다. 예레미야 29:11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목적을 ‘쉼’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단순하게 살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고,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때가 되어 죽는, 그런 단순한 동물적인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라서 목표가 있고 목적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7절입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후에 빌립보서 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자신의 삶의 목표를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도들은 이러한 말씀들을 근거로, 쉴 틈 없이 바쁘게 일하고, 봉사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목회자들도 끊임없이 움직이도록 성도들을 몰아세웁니다. 마치 잠시라도 쉬는 것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지극히 죄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몰아세우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흙으로 지음 받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정하시고 쉬도록 배려하셨으며, ‘안식년’과 ‘희년’이라는 장기적인 제도를 통하여 사람과 모든 피조물들이 쉼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2:27절에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느라고 지친 여러분,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을 향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쁘고 피곤하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고, 앞으로의 생애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 내용과 말씀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마가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마을에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신 일과 열 두 제자를 부르셔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둘씩 짝을 지어 파송하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전도 활동을 마치고 돌아 온 제자들에게 쉬도록 따로 자리를 배려하십니다. 예수님은 밀려드는 사람들로부터 제자들을 쉬게 하시려고 배를 타고 조용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는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주도면밀하신 사랑의 배려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78:39절에서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라고 하신대로 우리의 약함을 위한 배려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청중들은 예수님 일행을 쉬도록 버려두지를 않았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예수님 일행보다 훨씬 더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더 빨리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얼마나 갈급해 하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의 청중들은 대부분이 노예들이거나, 종, 여인들과 노약자들이었습니다. 즉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이며, 삶이 찌들어버린 피곤한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갈급해 한 것은 육체적인 쉼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영혼의 생수를 갈망한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들의 피곤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부려먹고, 더 많이 이용하려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고충을 아셨으며, 그들의 아픈 마음을 아시고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힌 피곤한 인생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신”(막 6:7)것입니다.
예수님은 청중들의 갈급한 심령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생수의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른 쉼을 보여주십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데, 청중들이 거의 종일토록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능력의 역사가 이제 막 일어날 찰나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배고픈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신 능력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또 다른 쉼을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 성도는 영의 쉼을 누려야 합니다.
4세기의 수도사였던 ‘요한 카시아누스(Joannes Cassianus)’의 글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냥꾼이 숲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을 만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한가롭게 새를 안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냥꾼은 “왜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당신은 왜 활의 줄을 늘 팽팽하게 해 두지 않소?”라고 사냥꾼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냥꾼은 “활의 줄을 늘 팽팽하게 해 두면 줄이 탄력을 잃어버리지요.”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렇다면 내가 가끔은 휴식하는 것에 놀라지 마시오. 조금 쉬고 나면 더 잘 집중할 수 있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육신의 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바캉스다, 여름휴가다 해서 산과 바다로 쉼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오히려 쉼보다는 도로의 정체, 휴가지의 복잡함과 시끄러움으로 더 피곤해지기 일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배려 속에도 두 가지의 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영의 쉼이요, 다음은 육체와 정신의 쉼입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영의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조용하게 쉴 수 있는 장소를 자주 찾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35절에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셨고, 누가복음 5:16절에서는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영적인 쉼을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따르는 군중들에게 생수의 말씀으로 먹이신 것도 영적인 쉼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영의 삶이 우선권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25-26절에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의 소유나 육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의 생명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요한의 세 번째 서신에서도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피곤을 무릅쓰며 부지런히 자신의 소유를 늘리고, 육신의 안락한 삶을 위하여 땀 흘려 일합니다. 그들은 “남들이 놀 때 다 놀면 언제 돈을 버느냐?”라며 쉼도 잊은 채 일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언젠가는 육신의 생명이 끝날 것이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의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시고, 디모데전서 6:7절에서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을 혹사시키며 잠시 누릴 세상의 소유에 집착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육신과 더불어 영의 쉼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깊은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쉼을 누립니다. 이는 매일의 삶에서 육신이 먹는 것과 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이 건강하고 잘 되어야 육신도 건강하고 육신의 일도 형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가지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건하게 지키는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과 육신이 더욱 건강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의 쉼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2. 성도는 육신의 쉼도 누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40대에 급사하는 사람들이 꾸준하게 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의 우울증, 대인 기피증과 같은 정신질환자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젊었을 때에 부지런히 모아두어야 늙어서 편하다.”는 세상적인 삶의 논리 때문입니다. 젊을 때에는 조금 무리해도 표시가 잘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육체가 시들어가는 40대가 되면서 무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2:22-23절에서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탄식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쉬게 하시고, 따르는 군중들에게도 영의 쉼과 더불어 육신의 쉼을 주셨습니다. 청중들은 종일토록 말씀을 듣느라 먹는 것도 잊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도들의 육신의 쉼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2-3절에서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작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풍족하게 먹이셨습니다.
이처럼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이나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은 모두 성도의 육신의 쉼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푸른 초장에서 배불리 먹고 쉬게 하심으로 새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칠일 마다 하루를 쉬는 안식일과 칠년 마다 한 해를 쉬게 하시는 안식년과 50년마다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시는 희년의 제도는 모두 사람과 더불어 짐승과 식물, 토지까지도 쉬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이며 피조물을 향하신 배려입니다. 십계명의 제 사계명에서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이 건강하고 오래 살고 싶으면 주일을 지키십시오. 주일은 결코 우리 사람의 날이 아닙니다. 주일을 하나님의 날로 여기고 거룩하게 구별하며,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하는 것은 우리 영이 생수를 공급받고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기쁘게 서로 섬기고 봉사하면서 음식을 먹고 즐거워하는 것은 육신과 정신의 쉼을 얻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 온 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조상들과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일까지 일한다고 부자 되지 않습니다. 주일을 휴일로 알고 육신의 쉼과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한다고 건강해지는 것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살아야 하듯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강건한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육신이 피곤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까? 그것은 건강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엡 3:20)이십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정말 피곤한 삶의 시대입니다. 전도서 1:8절에서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라고 하셨듯이 정말 삶이 피곤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영과 육신의 모든 필요를 하십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쉼을 주시고 새 힘을 얻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한다면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고 따라서 주님이 공급하시는 영과 육신의 쉼을 누리고, 풍성하고 강건한 삶을 누리는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6:30-4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유치원 가방을 멘 아이 둘이 달려옵니다. “아저씨, 같이 가요!” 숨을 헐떡이며 달려 온 꼬마가 “아이 힘들어!”라며 벽에 기댑니다. 다른 꼬마가 “나도 피곤해!” 라며 친구 옆에 기댑니다.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뭐가 그렇게 피곤하니?”라고 물었습니다. 꼬마가 당돌하게 “아저씨, 유치원 가야지요. 피아노 치러 가고, 미술학원에도 가야하고, 학습지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안 힘들어요?”라고 되레 따지고 듭니다.
정말 피곤할 만합니다. 그렇지요? 사람에게는 일이 필요합니다. 배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살아 있는 유기체여서 쉼도 필요합니다. 너무 여유시간이 많고 놀기만 해도 문제가 되지만, 일에 매이고 삶에 매여서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금세기 독일의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그의 저서인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쉬는 방법에 따라서 인간은 변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향하신 뜻이 그러합니다. 예레미야 29:11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목적을 ‘쉼’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단순하게 살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고,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때가 되어 죽는, 그런 단순한 동물적인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라서 목표가 있고 목적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7절입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후에 빌립보서 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자신의 삶의 목표를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도들은 이러한 말씀들을 근거로, 쉴 틈 없이 바쁘게 일하고, 봉사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목회자들도 끊임없이 움직이도록 성도들을 몰아세웁니다. 마치 잠시라도 쉬는 것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지극히 죄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몰아세우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흙으로 지음 받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정하시고 쉬도록 배려하셨으며, ‘안식년’과 ‘희년’이라는 장기적인 제도를 통하여 사람과 모든 피조물들이 쉼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2:27절에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느라고 지친 여러분,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을 향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쁘고 피곤하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고, 앞으로의 생애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 내용과 말씀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마가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마을에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신 일과 열 두 제자를 부르셔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둘씩 짝을 지어 파송하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전도 활동을 마치고 돌아 온 제자들에게 쉬도록 따로 자리를 배려하십니다. 예수님은 밀려드는 사람들로부터 제자들을 쉬게 하시려고 배를 타고 조용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는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주도면밀하신 사랑의 배려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78:39절에서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라고 하신대로 우리의 약함을 위한 배려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청중들은 예수님 일행을 쉬도록 버려두지를 않았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예수님 일행보다 훨씬 더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더 빨리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얼마나 갈급해 하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의 청중들은 대부분이 노예들이거나, 종, 여인들과 노약자들이었습니다. 즉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이며, 삶이 찌들어버린 피곤한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갈급해 한 것은 육체적인 쉼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영혼의 생수를 갈망한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들의 피곤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부려먹고, 더 많이 이용하려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고충을 아셨으며, 그들의 아픈 마음을 아시고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힌 피곤한 인생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신”(막 6:7)것입니다.
예수님은 청중들의 갈급한 심령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생수의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른 쉼을 보여주십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데, 청중들이 거의 종일토록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능력의 역사가 이제 막 일어날 찰나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배고픈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신 능력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또 다른 쉼을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 성도는 영의 쉼을 누려야 합니다.
4세기의 수도사였던 ‘요한 카시아누스(Joannes Cassianus)’의 글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냥꾼이 숲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을 만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한가롭게 새를 안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냥꾼은 “왜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당신은 왜 활의 줄을 늘 팽팽하게 해 두지 않소?”라고 사냥꾼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냥꾼은 “활의 줄을 늘 팽팽하게 해 두면 줄이 탄력을 잃어버리지요.”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렇다면 내가 가끔은 휴식하는 것에 놀라지 마시오. 조금 쉬고 나면 더 잘 집중할 수 있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육신의 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바캉스다, 여름휴가다 해서 산과 바다로 쉼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오히려 쉼보다는 도로의 정체, 휴가지의 복잡함과 시끄러움으로 더 피곤해지기 일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배려 속에도 두 가지의 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영의 쉼이요, 다음은 육체와 정신의 쉼입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영의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조용하게 쉴 수 있는 장소를 자주 찾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35절에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셨고, 누가복음 5:16절에서는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영적인 쉼을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따르는 군중들에게 생수의 말씀으로 먹이신 것도 영적인 쉼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영의 삶이 우선권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25-26절에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의 소유나 육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의 생명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요한의 세 번째 서신에서도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피곤을 무릅쓰며 부지런히 자신의 소유를 늘리고, 육신의 안락한 삶을 위하여 땀 흘려 일합니다. 그들은 “남들이 놀 때 다 놀면 언제 돈을 버느냐?”라며 쉼도 잊은 채 일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언젠가는 육신의 생명이 끝날 것이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의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시고, 디모데전서 6:7절에서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을 혹사시키며 잠시 누릴 세상의 소유에 집착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육신과 더불어 영의 쉼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깊은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쉼을 누립니다. 이는 매일의 삶에서 육신이 먹는 것과 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이 건강하고 잘 되어야 육신도 건강하고 육신의 일도 형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가지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건하게 지키는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과 육신이 더욱 건강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의 쉼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2. 성도는 육신의 쉼도 누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40대에 급사하는 사람들이 꾸준하게 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의 우울증, 대인 기피증과 같은 정신질환자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젊었을 때에 부지런히 모아두어야 늙어서 편하다.”는 세상적인 삶의 논리 때문입니다. 젊을 때에는 조금 무리해도 표시가 잘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육체가 시들어가는 40대가 되면서 무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2:22-23절에서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탄식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쉬게 하시고, 따르는 군중들에게도 영의 쉼과 더불어 육신의 쉼을 주셨습니다. 청중들은 종일토록 말씀을 듣느라 먹는 것도 잊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도들의 육신의 쉼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2-3절에서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작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풍족하게 먹이셨습니다.
이처럼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이나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은 모두 성도의 육신의 쉼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푸른 초장에서 배불리 먹고 쉬게 하심으로 새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칠일 마다 하루를 쉬는 안식일과 칠년 마다 한 해를 쉬게 하시는 안식년과 50년마다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시는 희년의 제도는 모두 사람과 더불어 짐승과 식물, 토지까지도 쉬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이며 피조물을 향하신 배려입니다. 십계명의 제 사계명에서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이 건강하고 오래 살고 싶으면 주일을 지키십시오. 주일은 결코 우리 사람의 날이 아닙니다. 주일을 하나님의 날로 여기고 거룩하게 구별하며,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하는 것은 우리 영이 생수를 공급받고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기쁘게 서로 섬기고 봉사하면서 음식을 먹고 즐거워하는 것은 육신과 정신의 쉼을 얻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 온 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조상들과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일까지 일한다고 부자 되지 않습니다. 주일을 휴일로 알고 육신의 쉼과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한다고 건강해지는 것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살아야 하듯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강건한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육신이 피곤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까? 그것은 건강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엡 3:20)이십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정말 피곤한 삶의 시대입니다. 전도서 1:8절에서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라고 하셨듯이 정말 삶이 피곤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영과 육신의 모든 필요를 하십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쉼을 주시고 새 힘을 얻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한다면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고 따라서 주님이 공급하시는 영과 육신의 쉼을 누리고, 풍성하고 강건한 삶을 누리는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