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아름답게 살기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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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7-28 22:02
*** 세상 아름답게 살기 / 고린도후서 1:3-7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1:3-7,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언젠가 ‘월스리트 저널’이라고 하는 유명한 경제 전문지에서 보았던 광고 한 편이 생각납니다.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United Technology)라는 회사의 광고였는데, 어떤 사람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낙심해 있다면 이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학력은 국민 학교를 중퇴했고, 시골에서 구멍가게를 열었지만 그나마 파산하였습니다. 남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장가를 갔지만 악처를 만나 가정생활이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상원의원에 두 번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하원의원 선거에도 두 번씩이나 고배를 마셨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연설을 했지만 그 당시의 청중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문은 연일 그를 비난했고 나라의 절반에서는 그를 벌레처럼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이 사람 때문에 고무를 받고 용기를 얻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죽은 지 백 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의 존재는 더욱 새롭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우리는 링컨 대통령의 삶을 “힘겨운 전쟁을 치렀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평가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생각할 줄 알았던 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죽은 후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되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멋진 생애였다.”, “참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이다.”라는 평가를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비결을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보려 합니다.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사신 분은 분명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세상 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인생의 실패자입니다. 돈이 많았습니까? 명예를 얻었습니까? 권력을 가졌습니까? 학식이 많았습니까? 하다못해 추종자라도 많았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나이 33세에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한 실패자입니다. 이사야 53:2-3절에서 이 사실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예수님의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를 보면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사셨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도 인정하고 칭찬하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나,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실망하고 낙심하여 고기잡이로 돌아갔던 제자들이나 모두 인생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책망과 훈계보다는 삶으로 격려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빈 배로 돌아왔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1:9절에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똑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새벽에 빈 배로 돌아오는 제자들을 위하여 불을 피우시고 음식까지 준비하셔서 위로하고 격려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에 화평을 이루고,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세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아름답게, 살맛나게 가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름답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삶을 조금 살펴보고 우리도 닮아갔으면 합니다.
1.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첫 번째 비결은 위로의 삶입니다.
본문에는 “위로”라는 말이 무려 10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위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parakalevw (parakaleo)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가까이서 부르다.’, ‘위로하다.’, ‘용기를 북돋아주다.’, ‘슬픔을 없애주는 행위’ 등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면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고, 위로해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특히 가족 중의 누군가가 죽어서 초상이 났을 때는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초상집에서 밤을 새워주는 그런 미덕이 있었습니다. 전도서 7:2절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즐거울 때에 함께하는 것은 쉽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함께 하는 것은 그리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이 힘들 때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오래 기억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잠언 17:17절에서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고 하십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인생의 위기 때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사업에 실패하여 많은 빚을 안고 도산했습니다. 온 가족이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물질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자신은 견딘다고 해도 가족들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괴로운 마음으로 밖에 나가서 밤늦도록 거리로 강변으로 배회하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아주 이대로 집을 나가버릴까, 아니면 그만 죽어버릴까’ 결국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는 온통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하며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잡고는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잠깐 함께 기도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손가락질한다 해도 나는 당신의 진실을 믿습니다. 비록 부도가 나서 많은 빚을 졌지만, 당신의 진실은 부도나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당신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옛날 욥이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일어난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당신을 가장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은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도 없이 아내를 안고는 울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아내의 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죄인으로 보더라도 당신만 나의 진실을 믿어 준다면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 이 장로님은 다시 용기를 얻었고 몇 년이 지난 후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지금도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거나 함부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들이나 친한 친구들, 또는 친한 이웃들에게 악한 생각 없이 던진 말 한 마디가 상처를 주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많 위로해야 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사람일수록 생활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하면 그 영향은 곧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진정한 위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위로는 큰 힘을 주지만, 영원한 생명에 영향력을 주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 “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위로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며, 우리 삶에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려 하지만 끊임없는 육신의 욕망으로 늘 실패합니다. 신앙의 길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생활에 매이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생활, 섬김의 생활,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고 싶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고, 피곤과 욕망에 갇혀서 늘 주님 앞에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이 알고 계시며 위로하고 격려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잠든 제자들을 보시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시며, 그래도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것을 아십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빠진 채로 살아도 좋다고 격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비록 힘겹고 고난이 있더라도 부활과 영생의 삶을 생각하면서 이겨내라는 격려를 하시는 것입니다. 곧 본문 6-7절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위로와 격려를 힘입어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40:1절에서도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비록 자신의 죄악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며 그들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도 핍박과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성도들에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전하여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위로와 격려로 가득한 삶이 아름답게 사는 비결입니다.
2.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두 번째 비결은 인정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아름다운 것은 아무리 약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였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며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도우심을 간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자신의 죄를 가슴아파하는 세리의 기도를 인정하셨습니다. 또 결단하고 행하는 믿음의 소유자였던 세리장 삭개오를 칭찬하셨으며,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칭찬은 사람에게 힘을 주며,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격려가 됩니다. 모 텔레비전 방송의 ‘칭찬 릴레이’라는 프로그램이 많은 호응을 얻은 것도 칭찬이 주는 효력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약점 중 하나는 남을 깎아 내리는 버릇입니다. 자기보다 낫다 싶으면 그 꼴을 못 보는 것입니다. 요즘 대통령 후보들 간의 흠집 내기 경쟁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결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 남을 가장 많이 비판한다.”고 지적합니다. 미국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심장에 치명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과 남을 깎아 내리는 것이다.” 남의 약점과 실수를 꼬집는 것은 상대방과 자신을 동시에 죽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비결이 됩니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인들에게 용기를 준 말이 있습니다. 당시의 인도는 가난과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간디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길에 엎드려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간디는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요. 그러나 나에게는 손이 모자라는군요.”
이 말 한 마디가 인도인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습니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사랑의 말에 힘을 얻어 많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독립을 부르짖었습니다.
소련의 장수학자인 ‘구리아닌’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단명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대화를 석권하거나,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인정하는 말이나 칭찬은 사람을 더 아름답고 선하게, 분발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칭찬은 내면의 긍정적인 잠재력을 깨우는 원동력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격려하고 칭찬하십시오. 커다랗게 보였던 단점이나 높게만 느껴졌던 관계의 벽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을 때, 상대방 역시 마음의 문을 열고 당신을 좋은 친구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 안에서 함께 세워주고 함께 자라가는 좋은 위로자가 됩시다. 요한복음 13: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세상은 서로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실천을 미루지 말고, 이 시간 이후부터 가장 가까운 가정부터 시작해서 위로와 격려와 인정하는 칭찬의 말을 실천하여 아름다운 삶의 자리를 넓혀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1:3-7,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언젠가 ‘월스리트 저널’이라고 하는 유명한 경제 전문지에서 보았던 광고 한 편이 생각납니다.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United Technology)라는 회사의 광고였는데, 어떤 사람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낙심해 있다면 이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학력은 국민 학교를 중퇴했고, 시골에서 구멍가게를 열었지만 그나마 파산하였습니다. 남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장가를 갔지만 악처를 만나 가정생활이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상원의원에 두 번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하원의원 선거에도 두 번씩이나 고배를 마셨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연설을 했지만 그 당시의 청중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문은 연일 그를 비난했고 나라의 절반에서는 그를 벌레처럼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이 사람 때문에 고무를 받고 용기를 얻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죽은 지 백 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의 존재는 더욱 새롭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우리는 링컨 대통령의 삶을 “힘겨운 전쟁을 치렀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평가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생각할 줄 알았던 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죽은 후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되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멋진 생애였다.”, “참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이다.”라는 평가를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비결을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보려 합니다.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사신 분은 분명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세상 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인생의 실패자입니다. 돈이 많았습니까? 명예를 얻었습니까? 권력을 가졌습니까? 학식이 많았습니까? 하다못해 추종자라도 많았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나이 33세에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한 실패자입니다. 이사야 53:2-3절에서 이 사실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예수님의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를 보면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사셨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도 인정하고 칭찬하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나,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실망하고 낙심하여 고기잡이로 돌아갔던 제자들이나 모두 인생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책망과 훈계보다는 삶으로 격려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빈 배로 돌아왔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1:9절에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똑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새벽에 빈 배로 돌아오는 제자들을 위하여 불을 피우시고 음식까지 준비하셔서 위로하고 격려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에 화평을 이루고,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세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아름답게, 살맛나게 가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름답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삶을 조금 살펴보고 우리도 닮아갔으면 합니다.
1.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첫 번째 비결은 위로의 삶입니다.
본문에는 “위로”라는 말이 무려 10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위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parakalevw (parakaleo)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가까이서 부르다.’, ‘위로하다.’, ‘용기를 북돋아주다.’, ‘슬픔을 없애주는 행위’ 등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면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고, 위로해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특히 가족 중의 누군가가 죽어서 초상이 났을 때는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초상집에서 밤을 새워주는 그런 미덕이 있었습니다. 전도서 7:2절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즐거울 때에 함께하는 것은 쉽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함께 하는 것은 그리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이 힘들 때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오래 기억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잠언 17:17절에서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고 하십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인생의 위기 때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사업에 실패하여 많은 빚을 안고 도산했습니다. 온 가족이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물질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자신은 견딘다고 해도 가족들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괴로운 마음으로 밖에 나가서 밤늦도록 거리로 강변으로 배회하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아주 이대로 집을 나가버릴까, 아니면 그만 죽어버릴까’ 결국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는 온통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하며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잡고는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잠깐 함께 기도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손가락질한다 해도 나는 당신의 진실을 믿습니다. 비록 부도가 나서 많은 빚을 졌지만, 당신의 진실은 부도나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당신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옛날 욥이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일어난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당신을 가장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은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도 없이 아내를 안고는 울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아내의 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죄인으로 보더라도 당신만 나의 진실을 믿어 준다면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 이 장로님은 다시 용기를 얻었고 몇 년이 지난 후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지금도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거나 함부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들이나 친한 친구들, 또는 친한 이웃들에게 악한 생각 없이 던진 말 한 마디가 상처를 주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많 위로해야 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사람일수록 생활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하면 그 영향은 곧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진정한 위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위로는 큰 힘을 주지만, 영원한 생명에 영향력을 주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 “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위로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며, 우리 삶에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려 하지만 끊임없는 육신의 욕망으로 늘 실패합니다. 신앙의 길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생활에 매이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생활, 섬김의 생활,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고 싶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고, 피곤과 욕망에 갇혀서 늘 주님 앞에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이 알고 계시며 위로하고 격려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잠든 제자들을 보시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시며, 그래도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것을 아십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빠진 채로 살아도 좋다고 격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비록 힘겹고 고난이 있더라도 부활과 영생의 삶을 생각하면서 이겨내라는 격려를 하시는 것입니다. 곧 본문 6-7절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위로와 격려를 힘입어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40:1절에서도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비록 자신의 죄악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며 그들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도 핍박과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성도들에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전하여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위로와 격려로 가득한 삶이 아름답게 사는 비결입니다.
2.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두 번째 비결은 인정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아름다운 것은 아무리 약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였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며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도우심을 간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자신의 죄를 가슴아파하는 세리의 기도를 인정하셨습니다. 또 결단하고 행하는 믿음의 소유자였던 세리장 삭개오를 칭찬하셨으며,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칭찬은 사람에게 힘을 주며,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격려가 됩니다. 모 텔레비전 방송의 ‘칭찬 릴레이’라는 프로그램이 많은 호응을 얻은 것도 칭찬이 주는 효력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약점 중 하나는 남을 깎아 내리는 버릇입니다. 자기보다 낫다 싶으면 그 꼴을 못 보는 것입니다. 요즘 대통령 후보들 간의 흠집 내기 경쟁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결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 남을 가장 많이 비판한다.”고 지적합니다. 미국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심장에 치명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과 남을 깎아 내리는 것이다.” 남의 약점과 실수를 꼬집는 것은 상대방과 자신을 동시에 죽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비결이 됩니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인들에게 용기를 준 말이 있습니다. 당시의 인도는 가난과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간디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길에 엎드려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간디는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요. 그러나 나에게는 손이 모자라는군요.”
이 말 한 마디가 인도인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습니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사랑의 말에 힘을 얻어 많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독립을 부르짖었습니다.
소련의 장수학자인 ‘구리아닌’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단명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대화를 석권하거나,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인정하는 말이나 칭찬은 사람을 더 아름답고 선하게, 분발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칭찬은 내면의 긍정적인 잠재력을 깨우는 원동력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격려하고 칭찬하십시오. 커다랗게 보였던 단점이나 높게만 느껴졌던 관계의 벽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을 때, 상대방 역시 마음의 문을 열고 당신을 좋은 친구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 안에서 함께 세워주고 함께 자라가는 좋은 위로자가 됩시다. 요한복음 13: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세상은 서로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실천을 미루지 말고, 이 시간 이후부터 가장 가까운 가정부터 시작해서 위로와 격려와 인정하는 칭찬의 말을 실천하여 아름다운 삶의 자리를 넓혀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