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208회
작성일
2007-07-28 22:00
*** 만남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 / 삼상 9:1-6
** 들어가는 말
사무엘상 9:1-6, “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라 베냐민 사람이더라. 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3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4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니되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니라. 5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6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영국의 작가 ‘다니엘 데포’의 장편소설인 ‘로빈슨 크루소’를 아시지요? 원제가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인 소설은 주인공인 모험가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 표류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로빈슨은 모험 여행을 떠났다가 표류하여 무인도에 정착합니다. 로빈슨은 그 무인도를 ‘절망도’라 이름하고 2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람을 그리워하며 고독한 삶을 삽니다.
작가는 주인공의 고독한 삶을 통하여 사람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각자의 고유한 삶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만, 서로서로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일가친척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과 선생의 관계로, 또는 친구의 관계로 살며, 상업에서는 사고파는 관계로, 일터에서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한 마디로 서로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게 보여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하와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때에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고 부르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부부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가정 공동체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과정에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모든 삶이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라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두메산골 교회에서 착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가난한 집 여자 아이가, ‘서울 가서 신앙 좋은 가정에서 식모살이라도 하며 야간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무렵, 서울의 강 권사님은 식모문제로 하도 속을 썩이다 못해, ‘잘 믿는 착한 시골처녀 하나 보내 주시면 딸처럼 사랑해 주겠다.’고 주님께 기도 했습니다.
강 권사님은 막연한 기대감으로 서울 역 대합실로 갔습니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의자에 앉아 무릎 위 성경책을 두 손으로 붙잡고 기도 하는 여자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권사님이 다가가서 ‘혹시 직장을 구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이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소녀는 강 권사님 댁에서 야간 성경학교를 다니며 가족처럼 살다가, 독실한 총각 집사님과 결혼하여 성실한 교회봉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만남도 있습니다. 요즈음 심심찮게 뉴스를 장식하는 가출 청소년의 사건들이 있습니다.
어느 여고생이 가정불화 때문에 가출을 했습니다. 며칠을 전전하며 다니다가 또래의 가출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소녀들이 오토바이 폭주족들을 만나서 그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가출 소녀들이 폭주족들과 짝을 이루어 오토바이 뒤에 타고 밤거리를 질주하다가 뒤에 탔던 소녀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매일 숱한 만남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모든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만남들은 자신의 관심과 결정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즉 세상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면 세상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세상 물질에 눈이 어두워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육신의 쾌락에 관심을 가지면 술친구들, 성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반면에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면, 신실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안다.”고 했습니다. 잠언 27:17절에서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만남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많은 일들을 사람들의 만남을 통하여 섭리하시며 역사하십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만남들이 있습니다. 말씀 속의 주인공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입니다. 우리는 그가 인생의 실패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작은 참으로 아름답고 진실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만남의 자리로 가 봅시다. 그리고 나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남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만남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봅시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대표적인 만남들을 봅시다. 이삭의 신붓감을 데려오라는 명을 받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서, 나홀의 성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형들의 시기를 받아 노예로 팔린 요셉은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을 만났고, 억울한 감옥 생활 중에 바로의 관리들을 만나서 꿈 해몽한 일로 바로를 만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아람 나라의 문둥병 장군인 ‘나아만’은 노예로 잡혀온 이스라엘의 어린 계집종을 만나 병을 고침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바울이 유럽 전도를 시작하면서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서 그의 집이 복음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받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기스’라는 사람이 암나귀 몇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기스는 아들 사울을 불러서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사환과 함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나섰습니다. 며칠에 걸쳐 에브라임 산지, 살리사, 사알림, 베냐민 지파 지역까지 두루 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숩’땅에 이르렀을 때 사울은 걱정이 생겼습니다. 부모가 잃은 나귀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더 걱정할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숩 지역에는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성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도록 하기 위하여 ‘암나귀 도주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그 이면에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 일에서 만남을 주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1) 사울을 위하여 사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6-8절을 봅시다. 사울이 암나귀를 찾아 떠난 지 며칠이 지났을 때, 사울은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하여 돌아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바로 그 때, 동행하던 사환이 중요한 제안을 합니다. “이 성에는 하나님이 사람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선뜻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사환은 자신에게 있었던 은 1/4세겔을 선뜻 내놓아 선지자를 만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위하여 사환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아람의 장군이면서 문둥병을 앓고 있던 ‘나아만’에게도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와서 식모 노릇을 하는 이스라엘의 계집아이에게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영접하지도 않는 엘리사에게 분노하여 돌아설 때에도 수행하던 종의 권유로 결국 병을 고침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도에게 있어서 좋은 만남은 영의 삶이나 육신의 모든 삶에 있어서 큰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이 안내자들은 의견을 존중받을 수 없는 비천한 계급의 사람들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선하시는 만남에는 우리가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할 수 있는 환경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겸손한 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5:5절에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고, 이사야29:19절에서는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다.”고 하셨으며, 이사야57:15절에서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사울을 위하여 좋은 이웃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삼상 9:11-13절을 봅시다. 사울은 사환의 독려를 힘입어 선지자가 사는 성으로 향했습니다. 사울은 성 입구에 있는 우물가에서 한 무리의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소녀들은 사울에게 선지자의 근황을 상세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차 은혜를 입게 합니다. 유대인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주변의 애굽 사람들에게 물질을 요구할 때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할 때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들을 위하여 은혜를 예비하십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어떤 환경도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잠언 3:3,4절에서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3) 사울을 위하여 선지자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삼상 9:14절을 봅시다.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소녀들 덕분에 머뭇거림도 없이 사무엘 선지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뜻하신 최종적인 목적지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삼상 9:15-17절을 봅시다. 사울이 도착하기 하루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에게는 모든 만남이 중요하지만 특히 좋은 선지자, 즉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자도 좋은 성도를 만나야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는 목회자를 만나는 것이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마태복음 15: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을 삯꾼에게 맡기겠습니까? 사울이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인 사무엘을 만났기 때문에 왕으로 세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5:17절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바른 목회자를 만났다고 생각합니까?
2. 만남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루시는 뜻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이해를 구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사람에게는 우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살고 있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즉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일로 여기고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지금의 일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아버지로부터 집안의 가축을 잃어버렸다는 말과 함께 찾아오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살고 있는 ‘기브아’를 출발하여 주변 지역을 멀리까지 힘을 다해 찾아 다녔습니다. 사울이 나귀를 찾아다닌 지역은 직선거리로만 40Km가 넘는 길이었습니다. 만일 사울이 성실하지 못하게 주변을 대강만 훑어보았더라면 사무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일을 맡길 수 있는 자질을 시험하시는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많은 일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21절에서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4:2절에서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이라고 하시고, 요한계시록 2:10절에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2) 하나님의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열려진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울은 동행하는 사환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비록 신분도 차이가 나고,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견해였지만 들어줄 줄 아는 열린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많은 닫힌 마음의 소유자들과 소수의 열려진 마음의 소유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무리들이 닫힌 마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57절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무리들이 마음의 찔림을 받고 취한 행동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열려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무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유로 가르치면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1:15, 13:9)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이 열린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자세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환을 통하여 사울이 하나님을 의지하는지의 여부를 보려 하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묻기 위하여 선지자 사무엘이 사는 성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반드시 분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나아가는 일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한 인도하심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는 화합과 일치, 성결, 사랑의 일들입니다. 만일 세상적 향락이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거나 거룩함을 방해하며 거룩함과 사랑함을 거스른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의 욕망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만남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만남은 주님과의 만남이며, 이 만남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길은 우리의 삶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매 순간마다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아름다운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무엘상 9:1-6, “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라 베냐민 사람이더라. 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3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4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니되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니라. 5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6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영국의 작가 ‘다니엘 데포’의 장편소설인 ‘로빈슨 크루소’를 아시지요? 원제가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인 소설은 주인공인 모험가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 표류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로빈슨은 모험 여행을 떠났다가 표류하여 무인도에 정착합니다. 로빈슨은 그 무인도를 ‘절망도’라 이름하고 2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람을 그리워하며 고독한 삶을 삽니다.
작가는 주인공의 고독한 삶을 통하여 사람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각자의 고유한 삶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만, 서로서로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일가친척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과 선생의 관계로, 또는 친구의 관계로 살며, 상업에서는 사고파는 관계로, 일터에서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한 마디로 서로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게 보여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하와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때에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고 부르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부부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가정 공동체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과정에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모든 삶이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라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두메산골 교회에서 착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가난한 집 여자 아이가, ‘서울 가서 신앙 좋은 가정에서 식모살이라도 하며 야간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무렵, 서울의 강 권사님은 식모문제로 하도 속을 썩이다 못해, ‘잘 믿는 착한 시골처녀 하나 보내 주시면 딸처럼 사랑해 주겠다.’고 주님께 기도 했습니다.
강 권사님은 막연한 기대감으로 서울 역 대합실로 갔습니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의자에 앉아 무릎 위 성경책을 두 손으로 붙잡고 기도 하는 여자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권사님이 다가가서 ‘혹시 직장을 구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이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소녀는 강 권사님 댁에서 야간 성경학교를 다니며 가족처럼 살다가, 독실한 총각 집사님과 결혼하여 성실한 교회봉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만남도 있습니다. 요즈음 심심찮게 뉴스를 장식하는 가출 청소년의 사건들이 있습니다.
어느 여고생이 가정불화 때문에 가출을 했습니다. 며칠을 전전하며 다니다가 또래의 가출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소녀들이 오토바이 폭주족들을 만나서 그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가출 소녀들이 폭주족들과 짝을 이루어 오토바이 뒤에 타고 밤거리를 질주하다가 뒤에 탔던 소녀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매일 숱한 만남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모든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만남들은 자신의 관심과 결정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즉 세상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면 세상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세상 물질에 눈이 어두워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육신의 쾌락에 관심을 가지면 술친구들, 성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반면에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면, 신실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안다.”고 했습니다. 잠언 27:17절에서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만남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많은 일들을 사람들의 만남을 통하여 섭리하시며 역사하십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만남들이 있습니다. 말씀 속의 주인공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입니다. 우리는 그가 인생의 실패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작은 참으로 아름답고 진실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만남의 자리로 가 봅시다. 그리고 나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남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만남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봅시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대표적인 만남들을 봅시다. 이삭의 신붓감을 데려오라는 명을 받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서, 나홀의 성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형들의 시기를 받아 노예로 팔린 요셉은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을 만났고, 억울한 감옥 생활 중에 바로의 관리들을 만나서 꿈 해몽한 일로 바로를 만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아람 나라의 문둥병 장군인 ‘나아만’은 노예로 잡혀온 이스라엘의 어린 계집종을 만나 병을 고침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바울이 유럽 전도를 시작하면서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서 그의 집이 복음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받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기스’라는 사람이 암나귀 몇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기스는 아들 사울을 불러서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사환과 함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나섰습니다. 며칠에 걸쳐 에브라임 산지, 살리사, 사알림, 베냐민 지파 지역까지 두루 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숩’땅에 이르렀을 때 사울은 걱정이 생겼습니다. 부모가 잃은 나귀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더 걱정할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숩 지역에는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성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도록 하기 위하여 ‘암나귀 도주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그 이면에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 일에서 만남을 주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1) 사울을 위하여 사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6-8절을 봅시다. 사울이 암나귀를 찾아 떠난 지 며칠이 지났을 때, 사울은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하여 돌아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바로 그 때, 동행하던 사환이 중요한 제안을 합니다. “이 성에는 하나님이 사람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선뜻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사환은 자신에게 있었던 은 1/4세겔을 선뜻 내놓아 선지자를 만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위하여 사환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아람의 장군이면서 문둥병을 앓고 있던 ‘나아만’에게도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와서 식모 노릇을 하는 이스라엘의 계집아이에게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영접하지도 않는 엘리사에게 분노하여 돌아설 때에도 수행하던 종의 권유로 결국 병을 고침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도에게 있어서 좋은 만남은 영의 삶이나 육신의 모든 삶에 있어서 큰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이 안내자들은 의견을 존중받을 수 없는 비천한 계급의 사람들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선하시는 만남에는 우리가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할 수 있는 환경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겸손한 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5:5절에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고, 이사야29:19절에서는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다.”고 하셨으며, 이사야57:15절에서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사울을 위하여 좋은 이웃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삼상 9:11-13절을 봅시다. 사울은 사환의 독려를 힘입어 선지자가 사는 성으로 향했습니다. 사울은 성 입구에 있는 우물가에서 한 무리의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소녀들은 사울에게 선지자의 근황을 상세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차 은혜를 입게 합니다. 유대인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주변의 애굽 사람들에게 물질을 요구할 때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할 때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들을 위하여 은혜를 예비하십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어떤 환경도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잠언 3:3,4절에서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3) 사울을 위하여 선지자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삼상 9:14절을 봅시다.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소녀들 덕분에 머뭇거림도 없이 사무엘 선지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뜻하신 최종적인 목적지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삼상 9:15-17절을 봅시다. 사울이 도착하기 하루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에게는 모든 만남이 중요하지만 특히 좋은 선지자, 즉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자도 좋은 성도를 만나야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는 목회자를 만나는 것이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마태복음 15: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을 삯꾼에게 맡기겠습니까? 사울이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인 사무엘을 만났기 때문에 왕으로 세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5:17절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바른 목회자를 만났다고 생각합니까?
2. 만남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루시는 뜻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이해를 구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사람에게는 우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살고 있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즉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일로 여기고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지금의 일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아버지로부터 집안의 가축을 잃어버렸다는 말과 함께 찾아오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살고 있는 ‘기브아’를 출발하여 주변 지역을 멀리까지 힘을 다해 찾아 다녔습니다. 사울이 나귀를 찾아다닌 지역은 직선거리로만 40Km가 넘는 길이었습니다. 만일 사울이 성실하지 못하게 주변을 대강만 훑어보았더라면 사무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일을 맡길 수 있는 자질을 시험하시는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많은 일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21절에서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4:2절에서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이라고 하시고, 요한계시록 2:10절에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2) 하나님의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열려진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울은 동행하는 사환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비록 신분도 차이가 나고,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견해였지만 들어줄 줄 아는 열린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많은 닫힌 마음의 소유자들과 소수의 열려진 마음의 소유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무리들이 닫힌 마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57절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무리들이 마음의 찔림을 받고 취한 행동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열려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무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유로 가르치면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1:15, 13:9)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이 열린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자세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환을 통하여 사울이 하나님을 의지하는지의 여부를 보려 하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묻기 위하여 선지자 사무엘이 사는 성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반드시 분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나아가는 일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한 인도하심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는 화합과 일치, 성결, 사랑의 일들입니다. 만일 세상적 향락이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거나 거룩함을 방해하며 거룩함과 사랑함을 거스른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의 욕망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만남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만남은 주님과의 만남이며, 이 만남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길은 우리의 삶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매 순간마다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아름다운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