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힘써 지켜야 할 것
*** 힘써 지켜야 할 것 / 에베소서 3:14-4:4
에베소서 3:14-4:4,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 들어가는 말
예전에 신학교 교수가 강의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신학생이 헬라어를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 말은 ‘신학생에게 헬라어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의 유혹 앞에서 신앙적 확신을 지키는 용기’라는 뜻입니다. ‘아니오.’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길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부귀영화 명예, 권세로 유혹하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것도 무척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서로 누가 높은지를 두고 말다툼을 했던 것처럼, 이런 유혹은 외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이것을 명하는 이유는, 이것이 교회를 무너지는 결정적인 요인(要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되는 것,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기본은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기본이 지켜지지 않으면, 자신의 믿음과 생활의 일치, 가정 안에서의 일치,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써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하나인 교회에 대하여 깊이 있게 강조합니다. 특히 읽은 본문 말씀은 3장의 결론부로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간구로 시작됩니다. 그 간구는 첫째, 성령님이 내주로 속 사람이 강건하며,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來住)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깨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한 이유는 19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우리가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이것을 이루시며 보증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로 말미암는 영광이 영원하기를 구합니다. 특히,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20절의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넘치도록 하신다.”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구하는 것만 아니라, 주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조차 살피시고 채우십니다. 빌립보서 3:15-16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이 말씀처럼, 주님 안에서 사는 우리는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며, 생각하는 것까지도 주님이 아시며 인도하십니다. 4장에서는 3장의 결론에서 말씀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충만한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4장 본문의 주제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는 내용입니다. 왜 에베소 교회에 이런 내용이 강조되었을까요?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최대 도시였으며, 그 지방의 로마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괄목할만한 것은 에베소를 신전시(神殿市)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명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고, 후에는 황제숭배를 목적으로 세워진 신전들까지 많은 신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세우고 그 지방 전체에 복음을 전하는 기지로 사용했습니다. 후에 사도 요한도 이곳에서 사역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에베소가 그러했듯이, 에베소 교회도 소아시아 교회들의 중심 된 위치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유대인도 많이 살고 회당도 있었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에는 유대인들도 대단히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를 분열하게 하는 위험요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분열을 미리 방지하고 교회가 하나 되게 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언합니다. 에베소서 2:16-18절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우리 시대의 교회들도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하고, 십자가로 이루신 하나 됨을 수행해야 합니다.
※ 우리가 무엇을 힘써야 합니까?
저는 예배, 특히 설교 중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나 우스갯거리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 예배와 설교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말씀과 연관된 개인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저는 60 후반이 되도록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 응급실에도 갔었고, 입원도 했었습니다. 올해로 목회 37년이 되는데, 그동안 성도들의 병과 입원, 임종, 장례를 위하여 심방하거나 예배 인도로 수없이 병원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환자가 되어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고, 특히, 고린도후서 1:3-5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이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옛말에 “홀아비 사정 과부가 안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 일을 당해보지 않으면, 그 일 당한 사람의 진실한 사정을 알아줄 수가 없습니다. 전임 전도사 시절에 어느 집사님이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었었습니다. 후에 그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위로하기 위해 왔었고, 많은 위로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위로되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어느 성도님이 오셔서 ‘자기도 사고로 두 아들을 잃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제 손을 잡아주는데’ 그렇게 눈물이 났고, 마음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히브리서 2:18절입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그래서 이번 기회가 입원한 성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조금만이라도 쉬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37년 목회, 그중에서, 대복교회를 설립하고 만 30년이 되도록, 4일 이상 교회를 비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4일을 비웠을 때는 총회나 세미나 참석 때였습니다.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주님은 내 생각을 아셨는지, 이렇게라도 조금 쉬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일에 바빠서 식사할 겨를도 없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31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 말씀처럼, 주님은 지금까지 제가 기도한 것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 아니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수없이 이루어주셨습니다. 본문 20절의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넘치도록 하신다.”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주님은 이런 기회를 통하여서도 받은 은혜를 더 깊이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의 기도 속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즉,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시는 것이며, 은혜의 손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이루신 은혜를 안다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항상 ‘주님께서 나와 가정과 교회에 이루신 일들을, 내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잊지 않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겠다.’라고 다짐하며 그렇게 최선을 다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당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일을 행할 때, 분쟁이나 다툼이나 시기, 질투가 아니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평안의 매는 줄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는 말은, RSV(개역표준성경)에서는 ‘eager to maintain the unity,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노력하여 지키라.’ASV(미국표준역)에서는 ‘Endeavouring to keep the unity,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성실하게 지키라.’ KJV에서는 ‘giving diligence to keep the unity,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간절하게 지키라.’라고 했습니다. 공통점은 ‘하나 됨’이라는 말에 정관사 THE를 붙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 됨은 통상적인 연합이나 통일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명령임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17:11절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도 하나 됨을 위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14-18절을 봅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우리가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에베소서 5:1-7절의 말씀, 하나님을 본받고, 사랑과 감사를 넘치게 하며, 깨끗하고 덕스러운 말을 가려서 하는 것과 속지 않도록 지혜롭게 악한 자들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빌립보서 2:1-4절의 말씀, 사랑으로 한 마음을 이루며, 겸손하게 서로 돌아보는 것이며, 셋째는 골로새서 3:14-15절 말씀, 용서와 사랑으로 평강과 감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위로하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겸손하게 서로 돌아보며 위로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한 사회복지단체에서 만든 1분 24초짜리 동영상 광고가 유튜브에 올라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시내 사거리 가운데 귀여운 곰의 옷을 입고, 곰의 탈을 쓴 사람이 팔을 벌리고 서 있습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한 사람이 달려가서 안기자, 너나 할 것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함박웃음을 띠며 기꺼이 그의 품에 안깁니다.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들, 뒤에서 옆에서도 달려와서 포옹합니다. 광고가 끝날 무렵, 탈을 벗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단번에 장애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장애인이 사람들을 향하여 묻습니다. “Do we need to disguise ourselves to get closer? /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꼭 변장이 필요하나요?”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나, 그의 경력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프랑스 소설 ‘노틀담의 꼽추’에 나오는 꼽추 ‘콰지모도’처럼 흉하게 생긴 외모만 보고 사람들은 무서워하고 외면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무엘상 16: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세상과 악한 영들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온갖 술수로 우리를 미혹할 것입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 중에 위험한 것은 ‘분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하나 되는 사랑의 마음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이렇게 해야합니다. 이 같은 마음으로, 이번 명절에도 만나는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하나 되는 평강의 복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까지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