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하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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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01-20 22:56
***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하라. / 골 3:22-25, 마 20:25-27
** 들어가는 말
골로새서 3:22-25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20:25-27,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어떤 농가의 주인이 파종기가 되어 종을 불렀습니다. 주인은 ‘거름이 잘 되고 볕이 잘 드는 좋은 밭에 보리를 심으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말을 들은 종은 보리 대신 주인이 가장 싫어하는 밀을 심었습니다. 밀과 보리는 자랄 때에는 잘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주인이 밭에 나가보니 보리가 있어야 할 밭에는 온통 밀뿐이었습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종을 불렀습니다. “내가 보리를 심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어찌하여 밀을 심었단 말이냐?”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때 종은 “주인이여, 보리가 나오기를 바라며 밀을 심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기가 막혀서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느냐? 밀을 심고 보리를 거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 종은 “주인이여, 주인께서는 쉬지 않고 세상 밭에 악의 씨를 심으시면서, 부활의 날에는 선한 열매를 거둬들이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밀을 심고 보리를 거둬들여 보려고 심었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7,8절 말씀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16:27절에서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무엇을 행했든지 그 행위대로 보응을 받게 됩니다. 지금 당장에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 때에는 반드시 징벌이든지 상급이든지 자신의 행한 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조심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지막 때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옛말에도 “최후에 웃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다.”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장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며, 육신의 평안과 안일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도서 9:12절에서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고 하시며, 데살로니가전서 5:3절에서는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갑자기 닥치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가 됩니다.
이러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지금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으며, 다음 주일에는 ‘모든 일을 소망 중에 믿음으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상급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인 골로새서 3:24절에서 “유업의 상을 주께 받는다.”고 했으며, 히브리서 11:6절에서도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상급을 위하여 우리는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하여야 하는데, 그 의미부터 생각해 봅시다.
1. 주께 하듯 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골로새서 본문을 봅시다.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초대교회 당시의 사회 환경을 적용한 가르침입니다.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음을 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부조리한 제도를 인정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세상의 제도를 뒤집어엎지는 않으십니다. 비록 부조리하다 할지라도 그 제도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폐일언하고, 당시 초대교회 성도 중에는 상당수가 노예들(팔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모두를 형제자매로 대하며 서로 사랑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사회에서는 신분의 차별이 존재했지만, 교회에서는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생활로 인하여 주인이나 종의 신분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상당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이 말씀으로 경계를 삼으셨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는 형제자매로 서로 사랑으로 섬기지만, 사회에서는 종의 신분으로서 육신의 상전으로 두려움과 성실함으로 섬기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중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종들이 육신적으로는 육신의 상전에게 순종하고 섬기지만, 마음으로는 주님께 순종하고 섬기듯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둘의 섬김을 하나로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행위의 근본이 되는 마음을 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만 순종하는 척 하면서 속마음으로는 비웃고 욕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5절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4:12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인을 사람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옛날의 종이나 노예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오늘 우리 중에는 종도 없고, 노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봅시다. 마태복음 본문입니다.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르시는 분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겸손함으로 하나님으로서의 권위와 신분을 벗으시고 스스로 사람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 겸손함을 가져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질 때 높아지는 것이며, 자신의 생명을 버릴 때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 지는 것이며, 그런 자세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치 그 사람이 주님이신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에게 봉사하고 섬기지만 그것을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입니다.
2. 어떻게 하는 것이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누구를 주님이라고 부르십니까? 왜 주님이라고 부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주인님’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주인은 다름 아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시고,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시고, 힘과 능력이 되시며, 구원의 보증이신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까?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엇을 하든지 생명을 다하는 정성과 최선의 섬김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더 잘 하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신명기 10:12절을 봅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하십니다.
왕이 잔치를 열었습니다. 왕은 이날 참석자 중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을 선발해 왕과 왕후 사이에 앉히고 푸짐한 상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모든 손님들이 급하게 손 매무새를 내면서 손을 내밀고 왕의 앞을 지나갔습니다. 옆에 섰던 신하들은 부지런히 부드럽고 예쁜 손을 찾으면서 저마다 아름답다고 생각한 사람을 왕에게 추천했습니다.
모든 조사가 끝나고 왕이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을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너무도 뜻밖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궁궐에서 일하는 청소부 할머니였습니다. 왕은 할머니에게 큰 상을 베풀고, 거칠고 투박한 청소부 할머니의 손을 잡아 올리고는 백성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의 손이 가장 아름답다. 일하지 않는 손을 누가 아름답다 하겠는가!”
일하는 손,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손은 바로 ‘섬기는 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섬김으로서 주님께 하듯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섬기신 일들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대표적인 것만 하나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13:14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위하여 식탁에 앉았을 때입니다. 누군가는 더러워진 발을 씻겨야 하는데, 누구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발을 씻기는 것은 그 집의 종들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높아지기를 원했던 제자들은 결코 멸시당하는 종의 자리에 앉기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본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럽고 어려운 일은 서로 하지 않으려 합니다. 반면에 이름이 나고 생색이 나는 곳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듭니다. 이것은 결코 주님께 하듯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하는 것은 주님이 본을 보이신 그 일을 나도 행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시인 ‘터들리언’은 “햇빛은 하수구까지 고르게 비추어 주어도 햇빛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훌륭한 사람은 진흙 속에 있는 진주와 같아서 주위 환경에 오염되지 않으며 또 금방 알아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겸손하게 종의 자리에 앉으며, 다른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할지라도 결코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맑고 영롱한 빛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송 중에도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 섬김 속에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전함과 최상의 헌신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주께 하듯 행하라는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시간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이정도만 해도 무슨 뜻이며,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든 것은 ‘고마움을 아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감사한다면, 이제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행하는 일에서 주님께 하듯이 행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섬김과 행함을 주님께서 받으실 것입니다. 내가 결심한다고 한 순간에 이렇게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합시다. 한 가지씩, 한 걸음씩,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합시다. 내 가정과 교회에서부터 시작합시다. 그래서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그런 교회를 이루어 갑시다.
** 들어가는 말
골로새서 3:22-25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20:25-27,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어떤 농가의 주인이 파종기가 되어 종을 불렀습니다. 주인은 ‘거름이 잘 되고 볕이 잘 드는 좋은 밭에 보리를 심으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말을 들은 종은 보리 대신 주인이 가장 싫어하는 밀을 심었습니다. 밀과 보리는 자랄 때에는 잘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주인이 밭에 나가보니 보리가 있어야 할 밭에는 온통 밀뿐이었습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종을 불렀습니다. “내가 보리를 심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어찌하여 밀을 심었단 말이냐?”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때 종은 “주인이여, 보리가 나오기를 바라며 밀을 심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기가 막혀서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느냐? 밀을 심고 보리를 거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 종은 “주인이여, 주인께서는 쉬지 않고 세상 밭에 악의 씨를 심으시면서, 부활의 날에는 선한 열매를 거둬들이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밀을 심고 보리를 거둬들여 보려고 심었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7,8절 말씀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16:27절에서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무엇을 행했든지 그 행위대로 보응을 받게 됩니다. 지금 당장에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 때에는 반드시 징벌이든지 상급이든지 자신의 행한 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조심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지막 때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옛말에도 “최후에 웃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다.”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장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며, 육신의 평안과 안일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도서 9:12절에서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고 하시며, 데살로니가전서 5:3절에서는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갑자기 닥치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가 됩니다.
이러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지금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으며, 다음 주일에는 ‘모든 일을 소망 중에 믿음으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상급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인 골로새서 3:24절에서 “유업의 상을 주께 받는다.”고 했으며, 히브리서 11:6절에서도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상급을 위하여 우리는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하여야 하는데, 그 의미부터 생각해 봅시다.
1. 주께 하듯 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골로새서 본문을 봅시다.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초대교회 당시의 사회 환경을 적용한 가르침입니다.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음을 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부조리한 제도를 인정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세상의 제도를 뒤집어엎지는 않으십니다. 비록 부조리하다 할지라도 그 제도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폐일언하고, 당시 초대교회 성도 중에는 상당수가 노예들(팔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모두를 형제자매로 대하며 서로 사랑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사회에서는 신분의 차별이 존재했지만, 교회에서는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생활로 인하여 주인이나 종의 신분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상당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이 말씀으로 경계를 삼으셨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는 형제자매로 서로 사랑으로 섬기지만, 사회에서는 종의 신분으로서 육신의 상전으로 두려움과 성실함으로 섬기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중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종들이 육신적으로는 육신의 상전에게 순종하고 섬기지만, 마음으로는 주님께 순종하고 섬기듯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둘의 섬김을 하나로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행위의 근본이 되는 마음을 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만 순종하는 척 하면서 속마음으로는 비웃고 욕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5절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4:12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인을 사람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옛날의 종이나 노예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오늘 우리 중에는 종도 없고, 노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봅시다. 마태복음 본문입니다.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르시는 분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겸손함으로 하나님으로서의 권위와 신분을 벗으시고 스스로 사람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 겸손함을 가져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질 때 높아지는 것이며, 자신의 생명을 버릴 때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 지는 것이며, 그런 자세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치 그 사람이 주님이신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에게 봉사하고 섬기지만 그것을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입니다.
2. 어떻게 하는 것이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누구를 주님이라고 부르십니까? 왜 주님이라고 부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주인님’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주인은 다름 아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시고,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시고, 힘과 능력이 되시며, 구원의 보증이신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까?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엇을 하든지 생명을 다하는 정성과 최선의 섬김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더 잘 하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신명기 10:12절을 봅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하십니다.
왕이 잔치를 열었습니다. 왕은 이날 참석자 중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을 선발해 왕과 왕후 사이에 앉히고 푸짐한 상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모든 손님들이 급하게 손 매무새를 내면서 손을 내밀고 왕의 앞을 지나갔습니다. 옆에 섰던 신하들은 부지런히 부드럽고 예쁜 손을 찾으면서 저마다 아름답다고 생각한 사람을 왕에게 추천했습니다.
모든 조사가 끝나고 왕이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을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너무도 뜻밖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궁궐에서 일하는 청소부 할머니였습니다. 왕은 할머니에게 큰 상을 베풀고, 거칠고 투박한 청소부 할머니의 손을 잡아 올리고는 백성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의 손이 가장 아름답다. 일하지 않는 손을 누가 아름답다 하겠는가!”
일하는 손,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손은 바로 ‘섬기는 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섬김으로서 주님께 하듯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섬기신 일들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대표적인 것만 하나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13:14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위하여 식탁에 앉았을 때입니다. 누군가는 더러워진 발을 씻겨야 하는데, 누구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발을 씻기는 것은 그 집의 종들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높아지기를 원했던 제자들은 결코 멸시당하는 종의 자리에 앉기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본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럽고 어려운 일은 서로 하지 않으려 합니다. 반면에 이름이 나고 생색이 나는 곳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듭니다. 이것은 결코 주님께 하듯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행하는 것은 주님이 본을 보이신 그 일을 나도 행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시인 ‘터들리언’은 “햇빛은 하수구까지 고르게 비추어 주어도 햇빛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훌륭한 사람은 진흙 속에 있는 진주와 같아서 주위 환경에 오염되지 않으며 또 금방 알아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겸손하게 종의 자리에 앉으며, 다른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할지라도 결코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맑고 영롱한 빛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송 중에도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 섬김 속에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전함과 최상의 헌신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주께 하듯 행하라는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시간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이정도만 해도 무슨 뜻이며,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든 것은 ‘고마움을 아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감사한다면, 이제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행하는 일에서 주님께 하듯이 행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섬김과 행함을 주님께서 받으실 것입니다. 내가 결심한다고 한 순간에 이렇게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합시다. 한 가지씩, 한 걸음씩,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합시다. 내 가정과 교회에서부터 시작합시다. 그래서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그런 교회를 이루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