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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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01-13 16:05
***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 고전 13:1-3, 마 22:37-40
** 들어가는 말
고린도전서 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22:37-40,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생후 19개월 되던 해에 열병을 앓은 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의 장애자가 된 사람. 미국의 사회복지 사업가이며, ‘세 가지 고통을 안은 기적의 사람’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헬렌 켈러’ 여사입니다. 그녀는 비슷한 고통을 안고 있었던 ‘설리반’ 여사의 도움과 노력으로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생애를 장애인들의 사회복지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헬렌 켈러 여사에게 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눈을 가지고 있으되 제대로 볼 줄 모르고, 귀를 가지고 있으되 제대로 들을 줄 모르며, 입을 가지고 있으되 제대로 말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육체적인 모든 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른다면 그것이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잠언 17:1절에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한 말씀처럼, 재물이 없어서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가정이 있지만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줄도 모르고 사는 것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인간다움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물론 세상적인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과 세상적인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세상적인 사랑은 가장 흔하게 ‘에로스(e[rw\", 성적인 사랑)’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스트로게(stroghv, 가족혈족에 대한 자연적인사랑)’, 또는 ‘필리아(fivlia, 친구에 대한 우정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모두 대가성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가페(ajgavph, 희생적 사랑)’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구절인 예레미야 31:3절을 봅시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직역,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아-하브, hb;h}a). 그러므로 인자함(헤세드, dseje)으로 너를 인도하였다.”)고 했습니다. 곧 아무런 대가도 전제되지 않은 완전한 희생적 사랑과 인자하심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사랑입니다.
1. 왜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1-3절을 봅시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말과 지식과 행함, 이 세 가지 모두가 완벽하게 채워지고, 모든 행함이 희생적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근본이 되지 않으면 무의미한 소리,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6:14절에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시고, 마태복음 22:37-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을 이루는 것이며, 선지자를 통하여 증거 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한일서 4:16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즉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안에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또 다른 신비가 들어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의 존재 원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존재원리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삶이 유지되는 근본원인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이 유지될 수 있는 근본원인이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같은 내용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한복음 15:9-10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요한복음 17:21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로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적인 거장인 ‘프랜시스 A. 쉐이퍼’목사는 그의 저서 ‘20세기말의 교회’라는 책에서
“교회는 죽어가는 문화 속에서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죽어가는 이 문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를 주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내가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세상에 주고 계십니다. 그 판단의 기준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라는 말씀에 대하여 쉐이퍼는
“여기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실례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예수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이 사실이며 기독교 신앙이 진리임을 믿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쉐이퍼 목사님의 글에서 사랑으로 행하여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보면서 ‘한 통속인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2. 어떻게 사랑으로 행할 수 있습니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야 하겠지요. 사랑으로 행한다는 말은 너무 범위가 넓습니다. 그래서 듣는 순간에 그냥 ‘옳은 말이야!’라고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지,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즉 생활로 전혀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사랑, 가슴만 두근거리는 사랑, 실천되지 않는 사랑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잠언 27: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공동번역, ‘속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터놓고 꾸짖는 것이 낫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랑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누는 손길이 기도하는 입술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15-16절에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사랑 첫 번째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5: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의미를 모르는 분은 없지요? 순종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생활 속에서 실천합니까? 아니면 듣고는 ‘좋은 말이야!’라고 고개 꺼덕이고는 잊어버립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사랑은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40절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즉 세상에서 실력 없고, 능력 없고, 물질도 없고, 볼품도 없어서 소외된 사람, 버려진 사람에게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큰 증거는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 중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라는 말의 의미가 곧 이것을 말합니다. 나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고, 나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일의 1순위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1순위로 여기는 성도라면, 마땅히 모든 예배를 거룩하게 여기고 예배하는 일을 모든 일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 하나의 헌신의 증거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입니다. 예배 시간의 헌금은 바로 나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입니다. 요즈음은 중학생만 되어도 천 원짜리 정도는 우습게 여깁니다. 친구의 자녀라든지 친척의 자녀라든지, 그들에게 천 원을 줘보십시오. 그런데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헌신한다면서 준비되지 못한 돈을 대충 눈가림만 하려고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결코 형식적이거나 허술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사랑 두 번째는 ‘서로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이란 그리스도인들 서로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여 하나를 이루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속이고, 미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욕하는 비방거리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요한일서 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6:10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심으로 사랑의 우선적인 대상이 믿음의 식구들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사랑 세 번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무조건 주고, 무조건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고 무작정 감싸주고 덮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제가 되며, 하나님의 뜻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만 살찌우는 것은 지옥의 고통만 더하게 할 뿐입니다.
6.25 전쟁 직후, 나병 환자 수용소에 미국 로터리 클럽 회원들이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미국에서 파견 나온 ‘간호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방문했을 때에 마침 선교사가 나병환자의 고름이 흐르고 있는 상처를 간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회원 중의 한 사업가가 그 장면을 카메라로 찍으면서 “이것은 백만 불짜리 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나에게 백만 불을 주어도 이 일을 못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간호선교사는 그 사업가를 보면서 “저도 그 일을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업가는 당황하면서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하실 때에 비로소 진실한 마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보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주인이 되시며, 우리의 힘이 되시고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교양정도로 들어 둘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완전히 접수해서 실천하여 열매가 맺혀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 성령을 의지하여 힘쓰고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인정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가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고린도전서 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22:37-40,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생후 19개월 되던 해에 열병을 앓은 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의 장애자가 된 사람. 미국의 사회복지 사업가이며, ‘세 가지 고통을 안은 기적의 사람’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헬렌 켈러’ 여사입니다. 그녀는 비슷한 고통을 안고 있었던 ‘설리반’ 여사의 도움과 노력으로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생애를 장애인들의 사회복지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헬렌 켈러 여사에게 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눈을 가지고 있으되 제대로 볼 줄 모르고, 귀를 가지고 있으되 제대로 들을 줄 모르며, 입을 가지고 있으되 제대로 말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육체적인 모든 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른다면 그것이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잠언 17:1절에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한 말씀처럼, 재물이 없어서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가정이 있지만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줄도 모르고 사는 것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인간다움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물론 세상적인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과 세상적인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세상적인 사랑은 가장 흔하게 ‘에로스(e[rw\", 성적인 사랑)’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스트로게(stroghv, 가족혈족에 대한 자연적인사랑)’, 또는 ‘필리아(fivlia, 친구에 대한 우정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모두 대가성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가페(ajgavph, 희생적 사랑)’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구절인 예레미야 31:3절을 봅시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직역,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아-하브, hb;h}a). 그러므로 인자함(헤세드, dseje)으로 너를 인도하였다.”)고 했습니다. 곧 아무런 대가도 전제되지 않은 완전한 희생적 사랑과 인자하심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사랑입니다.
1. 왜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1-3절을 봅시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말과 지식과 행함, 이 세 가지 모두가 완벽하게 채워지고, 모든 행함이 희생적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근본이 되지 않으면 무의미한 소리,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6:14절에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시고, 마태복음 22:37-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을 이루는 것이며, 선지자를 통하여 증거 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한일서 4:16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즉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안에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또 다른 신비가 들어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의 존재 원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존재원리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삶이 유지되는 근본원인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이 유지될 수 있는 근본원인이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같은 내용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한복음 15:9-10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요한복음 17:21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로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적인 거장인 ‘프랜시스 A. 쉐이퍼’목사는 그의 저서 ‘20세기말의 교회’라는 책에서
“교회는 죽어가는 문화 속에서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죽어가는 이 문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를 주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내가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세상에 주고 계십니다. 그 판단의 기준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라는 말씀에 대하여 쉐이퍼는
“여기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실례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예수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이 사실이며 기독교 신앙이 진리임을 믿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쉐이퍼 목사님의 글에서 사랑으로 행하여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보면서 ‘한 통속인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2. 어떻게 사랑으로 행할 수 있습니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야 하겠지요. 사랑으로 행한다는 말은 너무 범위가 넓습니다. 그래서 듣는 순간에 그냥 ‘옳은 말이야!’라고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지,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즉 생활로 전혀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사랑, 가슴만 두근거리는 사랑, 실천되지 않는 사랑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잠언 27: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공동번역, ‘속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터놓고 꾸짖는 것이 낫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랑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누는 손길이 기도하는 입술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15-16절에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사랑 첫 번째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5: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의미를 모르는 분은 없지요? 순종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생활 속에서 실천합니까? 아니면 듣고는 ‘좋은 말이야!’라고 고개 꺼덕이고는 잊어버립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사랑은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40절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즉 세상에서 실력 없고, 능력 없고, 물질도 없고, 볼품도 없어서 소외된 사람, 버려진 사람에게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큰 증거는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 중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라는 말의 의미가 곧 이것을 말합니다. 나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고, 나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일의 1순위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1순위로 여기는 성도라면, 마땅히 모든 예배를 거룩하게 여기고 예배하는 일을 모든 일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 하나의 헌신의 증거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입니다. 예배 시간의 헌금은 바로 나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입니다. 요즈음은 중학생만 되어도 천 원짜리 정도는 우습게 여깁니다. 친구의 자녀라든지 친척의 자녀라든지, 그들에게 천 원을 줘보십시오. 그런데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헌신한다면서 준비되지 못한 돈을 대충 눈가림만 하려고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결코 형식적이거나 허술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사랑 두 번째는 ‘서로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이란 그리스도인들 서로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여 하나를 이루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속이고, 미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욕하는 비방거리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요한일서 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6:10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심으로 사랑의 우선적인 대상이 믿음의 식구들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사랑 세 번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무조건 주고, 무조건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고 무작정 감싸주고 덮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제가 되며, 하나님의 뜻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만 살찌우는 것은 지옥의 고통만 더하게 할 뿐입니다.
6.25 전쟁 직후, 나병 환자 수용소에 미국 로터리 클럽 회원들이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미국에서 파견 나온 ‘간호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방문했을 때에 마침 선교사가 나병환자의 고름이 흐르고 있는 상처를 간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회원 중의 한 사업가가 그 장면을 카메라로 찍으면서 “이것은 백만 불짜리 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나에게 백만 불을 주어도 이 일을 못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간호선교사는 그 사업가를 보면서 “저도 그 일을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업가는 당황하면서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하실 때에 비로소 진실한 마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보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주인이 되시며, 우리의 힘이 되시고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교양정도로 들어 둘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완전히 접수해서 실천하여 열매가 맺혀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 성령을 의지하여 힘쓰고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인정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