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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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12-30 22:20
*** 꿈꾸는 사람 / 창 39:1-3, 20-23
** 들어가는 말
창세기 39:1-3, 20-23(공동번역), “1 요셉은 이집트로 끌려 내려갔다. 그를 끌고 내려 온 이스마엘 사람에게서 파라오의 한 신하인 경호 대장 이집트 사람 보디발이 그를 샀다. 2 그러나 요셉은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으므로 앞길이 열려 이집트 사람 주인집의 한 식구처럼 되었다. 3 주인은 야훼께서 그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야훼께서 잘 되게 해 주셨던 것이다. / 20 그래서 요셉의 주인은 그를 잡아 감옥에 넣었다. 그 곳은 왕의 죄수들을 가두어 두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도 21 야훼께서는 요셉을 돌보시었다. 그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쏟으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해 주셨다. 22 그리하여 간수장은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을 요셉의 손에 맡겨 무슨 일이고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23 간수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겨 놓고는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다. 야훼께서 그를 돌보시어 그가 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잘되게 해 주셨던 것이다.”
미국의 작가인 '토마스 월트'의 글 중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젊어서 꿈꾸던 모든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돈도 벌었고, 명예도 얻었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똑똑한 자녀도 생겨서 좋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꿈꾸던 자리에 오른 주인공은 오랫동안 그리던 고향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어느 날, 주인공은 기차를 타고 옛날에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애쉬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부푼 마음으로 기차에서 내렸는데, 고향땅을 바라보는 순간 당황스럽고 실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고향은 너무나 변해 있었습니다. 거리는 현대화되고 인심도 변해 있었습니다. 친구는 남이 되고, 고향 땅에 온 자기는 오히려 이방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자기가 꿈에 그리던 마음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돌아오는 기차에 다시 올라 독백처럼 고백합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제의 평화와 고요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길이 있다면 앞으로 가는 길뿐이다. 뒤로 가는 길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요즈음 찻집이나 음식점, 휴식 공간, 음식에 이르기까지 변하고 있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복고풍’입니다. 옛 향수에 젖어서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굶지 않고 잘 사는 성공시대를 꿈꾸며 앞만 향해 달려왔습니다. 이제는 살 만하고, 어느 정도의 성공적이 생활권에 이르렀다고 느끼니까 옛 날이 그리워진 것입니다. 현실의 삶이 비록 편리하고 즐기기에 좋은 환경이기는 하지만, 인심은 각박해지고, 옛날처럼 정겨움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그런 옛스러운 분위기라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인간미 풍기는 삶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향수에 젖는 마음도 잠시 뿐, 흘러가버린 강물처럼 옛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곧 현실의 경쟁사회로 돌아와야 하니까요.
신앙에 있어서도 옛날로 돌아가려는 두 경향이 있습니다.
좋은 면과 좋지 않은 면입니다. 좋지 않는 면에서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형통할 때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의 모습입니다. 형통할 때에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이렇습니다. 어렵던 시절에는 하나님께 매어달리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느 듯 생활도 나아지고, 사회적인 신분도 얻으면서, 세상적인 즐거움과 분주함에 빠져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시간이 줄어갑니다. 이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이전의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필요한 만큼 채웠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4:7절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는데, 바로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모든 것을 얻었는데, 살만하니까 마치 자기 힘으로 이룬 것처럼 자랑했던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탈출했습니다. 처음에는 종살이에서 벗어난 것이 좋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다가 길이 험하고, 먹는 것조차 박해지고, 삶이 어려워지니까 ‘아, 그때가 좋았는데!’라며 종살이 하던 옛날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민수기 11:4-6절에서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라고 했으며, 14:2-4절에서는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삶이 조금만 힘들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세상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옛날로 돌아가려는 좋지 않는 두 모습은 죽음으로 향하는 퇴보입니다.
한편 좋은 면에서의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의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했던 그 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에 책망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요한계시록 2:4-5절에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처음 사랑과 열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이 되살아나는 전진의 길입니다.
이제, 2007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일이면 2007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해를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좋지 않은 면에서 옛날로 돌아가는 삶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향하는 처음 사랑과 열정을 회복해 가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까? 세상으로 돌아가는 신앙의 퇴보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길이며 죽음의 길입니다. 2008년의 대복교회는 ‘처음 사랑과 열정으로 날아오르는 교회’라는 푯대를 세웠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것을 구하는 옛 생활도 안 되며, 이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향하여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새로운 꿈을 향하여 날아올라야 합니다.
동물연구 학자가 ‘동물의 습성’에 대하여 실험한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동물들의 ‘환경적응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동물들이 어떤 환경에 처하면 그 환경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벼룩 실험’이었습니다. 상자에 수십 마리의 벼룩을 담았습니다. 벼룩들은 저마다 한껏 뛰어올랐습니다. 그런 다음에 상자 중간쯤에 유리판을 올려놓았습니다. 벼룩들은 뛸 때마다 유리판에 부딪쳤습니다. 한동안 유리판에 부딪치며 뛰어오르던 벼룩들이 어느 순간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유리판을 치웠지만 벼룩들은 여전히 유리판이 있던 높이까지만 뛰어올랐습니다.
다음으로는 ‘코끼리 실험’이었습니다. 거대한 힘을 가진 코끼리의 뒷 발목에 튼튼한 쇠사슬을 묶어 역시 튼튼한 나무에 쇠사슬 끝을 묶었습니다. 코끼리는 한 동안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코끼리는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쉽게 끊을 수 있는 가는 줄만 매어두어도 끊으려고 시도하지도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동물 실험은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들도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뛰어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좋은 면도 많지만, 좋지 않은 면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이나 능력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 더 이상 나아가여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안 돼’, ‘할 수 없어’, ‘이게 내 한계야’라며, 그 자리에서 만족하고 머물려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지금 그러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본문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며,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 때에 형들의 시기로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 개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상인들은 애굽에서 바로 왕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습니다. 부모의 사랑받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그것도 형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노예의 생명은 오직 주인에게 달려있습니다. 자유란 꿈도 꿀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명령에 의해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한계였으며, 절망의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의지하는 마지막 보루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믿음에 응답하셨습니다. 본문 3절에서 “주인은 야훼께서 그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야훼께서 잘 되게 해 주셨던 것이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을 주인인 보디발이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경험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보디발이 요셉이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를 통한 유혹적인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은 자신의 분량 밖의 일에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요셉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절개였습니다. 그 결과는 보디발 아내의 참소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노예도 모자라서 억울한 감옥살이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생명은 바람 앞의 촛불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라도 보디발의 말 한마디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더 이상 악화될 일도 없을 만큼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시 요셉의 믿음에 대하여 응답하셨습니다. 본문 21절에서 “야훼께서는 요셉을 돌보시었다. 그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쏟으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해 주셨다.” 고 했습니다.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걸핏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최악의 환경에 이르도록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으며, 결단코 인간의 방법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의 결과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압니다.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하고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요셉은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형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당시의 초강국이었던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후에 자신을 판 형들을 만난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이 형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은 ‘꿈꾸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꿈이 있습니까? 그 꿈이 여러분의 생애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십시오. 어떤 환경과 어려운 여건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에게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며, 그 꿈을 이루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꿈은 위대한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빌립보서 2: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 즉 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꿈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꿈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우리 모두에게는 꿈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교회로 부르실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 속에 꿈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꿈의 실현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꿈이 실현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했던 것이 자신의 꿈에 가까워지는 길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곧 나 자신의 꿈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디모데전서 6:17절에서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하십니다. 이제 2008년에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꿈꾸는 사람’이 됩시다. 비전이 분명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매튜 헨리’라는 위대한 성경학자가 있습니다. ‘매튜 헨리 성경 주해서’영어계통의 주해서로는 가장 좋은 것으로 인정되어 수세기 동안 많은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헨리의 청년기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처가인 ‘매튜 가’는 유명한 귀족이었습니다. 그 집의 무남독녀와 헨리 사이에 혼담이 시작되었을 때, 그 여자의 부모는 헨리의 인품에는 만족했지만 집안의 배경이 약하다 해서 혼사를 반대했습니다.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하는 할 때, 여자의 부모는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남자에게 우리 외동딸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당사자인 그 처녀는 “아버지,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디로 갈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딸의 이 말에 감동한 부모는 결혼을 허락했고, 헨리는 매튜 가에 입양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디로 갈지가 분명해야합니다. 육신의 삶에서도 그렇고, 신앙의 삶에서도 더욱 그러합니다. 여러분의 꿈은 분명합니까? 인생의 목적지가 확실합니까? 세상적인 옛 삶으로 돌아가려 하지 말고, 지나 온 길이 비록 어두웠다 할지라도 모두 씻어버립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2008년의 꿈을 향하여 ‘꿈꾸는 사람’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꿈꾸는 사람이 됩시다. 그리하여 모든 일에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대복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창세기 39:1-3, 20-23(공동번역), “1 요셉은 이집트로 끌려 내려갔다. 그를 끌고 내려 온 이스마엘 사람에게서 파라오의 한 신하인 경호 대장 이집트 사람 보디발이 그를 샀다. 2 그러나 요셉은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으므로 앞길이 열려 이집트 사람 주인집의 한 식구처럼 되었다. 3 주인은 야훼께서 그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야훼께서 잘 되게 해 주셨던 것이다. / 20 그래서 요셉의 주인은 그를 잡아 감옥에 넣었다. 그 곳은 왕의 죄수들을 가두어 두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도 21 야훼께서는 요셉을 돌보시었다. 그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쏟으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해 주셨다. 22 그리하여 간수장은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을 요셉의 손에 맡겨 무슨 일이고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23 간수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겨 놓고는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다. 야훼께서 그를 돌보시어 그가 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잘되게 해 주셨던 것이다.”
미국의 작가인 '토마스 월트'의 글 중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젊어서 꿈꾸던 모든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돈도 벌었고, 명예도 얻었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똑똑한 자녀도 생겨서 좋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꿈꾸던 자리에 오른 주인공은 오랫동안 그리던 고향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어느 날, 주인공은 기차를 타고 옛날에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애쉬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부푼 마음으로 기차에서 내렸는데, 고향땅을 바라보는 순간 당황스럽고 실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고향은 너무나 변해 있었습니다. 거리는 현대화되고 인심도 변해 있었습니다. 친구는 남이 되고, 고향 땅에 온 자기는 오히려 이방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자기가 꿈에 그리던 마음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돌아오는 기차에 다시 올라 독백처럼 고백합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제의 평화와 고요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길이 있다면 앞으로 가는 길뿐이다. 뒤로 가는 길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요즈음 찻집이나 음식점, 휴식 공간, 음식에 이르기까지 변하고 있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복고풍’입니다. 옛 향수에 젖어서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굶지 않고 잘 사는 성공시대를 꿈꾸며 앞만 향해 달려왔습니다. 이제는 살 만하고, 어느 정도의 성공적이 생활권에 이르렀다고 느끼니까 옛 날이 그리워진 것입니다. 현실의 삶이 비록 편리하고 즐기기에 좋은 환경이기는 하지만, 인심은 각박해지고, 옛날처럼 정겨움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그런 옛스러운 분위기라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인간미 풍기는 삶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향수에 젖는 마음도 잠시 뿐, 흘러가버린 강물처럼 옛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곧 현실의 경쟁사회로 돌아와야 하니까요.
신앙에 있어서도 옛날로 돌아가려는 두 경향이 있습니다.
좋은 면과 좋지 않은 면입니다. 좋지 않는 면에서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형통할 때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의 모습입니다. 형통할 때에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이렇습니다. 어렵던 시절에는 하나님께 매어달리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느 듯 생활도 나아지고, 사회적인 신분도 얻으면서, 세상적인 즐거움과 분주함에 빠져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시간이 줄어갑니다. 이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이전의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필요한 만큼 채웠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4:7절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는데, 바로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모든 것을 얻었는데, 살만하니까 마치 자기 힘으로 이룬 것처럼 자랑했던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탈출했습니다. 처음에는 종살이에서 벗어난 것이 좋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다가 길이 험하고, 먹는 것조차 박해지고, 삶이 어려워지니까 ‘아, 그때가 좋았는데!’라며 종살이 하던 옛날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민수기 11:4-6절에서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라고 했으며, 14:2-4절에서는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삶이 조금만 힘들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세상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옛날로 돌아가려는 좋지 않는 두 모습은 죽음으로 향하는 퇴보입니다.
한편 좋은 면에서의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의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했던 그 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에 책망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요한계시록 2:4-5절에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처음 사랑과 열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이 되살아나는 전진의 길입니다.
이제, 2007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일이면 2007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해를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좋지 않은 면에서 옛날로 돌아가는 삶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향하는 처음 사랑과 열정을 회복해 가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까? 세상으로 돌아가는 신앙의 퇴보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길이며 죽음의 길입니다. 2008년의 대복교회는 ‘처음 사랑과 열정으로 날아오르는 교회’라는 푯대를 세웠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것을 구하는 옛 생활도 안 되며, 이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향하여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새로운 꿈을 향하여 날아올라야 합니다.
동물연구 학자가 ‘동물의 습성’에 대하여 실험한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동물들의 ‘환경적응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동물들이 어떤 환경에 처하면 그 환경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벼룩 실험’이었습니다. 상자에 수십 마리의 벼룩을 담았습니다. 벼룩들은 저마다 한껏 뛰어올랐습니다. 그런 다음에 상자 중간쯤에 유리판을 올려놓았습니다. 벼룩들은 뛸 때마다 유리판에 부딪쳤습니다. 한동안 유리판에 부딪치며 뛰어오르던 벼룩들이 어느 순간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유리판을 치웠지만 벼룩들은 여전히 유리판이 있던 높이까지만 뛰어올랐습니다.
다음으로는 ‘코끼리 실험’이었습니다. 거대한 힘을 가진 코끼리의 뒷 발목에 튼튼한 쇠사슬을 묶어 역시 튼튼한 나무에 쇠사슬 끝을 묶었습니다. 코끼리는 한 동안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코끼리는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쉽게 끊을 수 있는 가는 줄만 매어두어도 끊으려고 시도하지도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동물 실험은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들도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뛰어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좋은 면도 많지만, 좋지 않은 면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이나 능력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 더 이상 나아가여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안 돼’, ‘할 수 없어’, ‘이게 내 한계야’라며, 그 자리에서 만족하고 머물려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지금 그러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본문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며,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 때에 형들의 시기로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 개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상인들은 애굽에서 바로 왕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습니다. 부모의 사랑받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그것도 형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노예의 생명은 오직 주인에게 달려있습니다. 자유란 꿈도 꿀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명령에 의해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한계였으며, 절망의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의지하는 마지막 보루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믿음에 응답하셨습니다. 본문 3절에서 “주인은 야훼께서 그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야훼께서 잘 되게 해 주셨던 것이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을 주인인 보디발이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경험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보디발이 요셉이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를 통한 유혹적인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은 자신의 분량 밖의 일에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요셉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절개였습니다. 그 결과는 보디발 아내의 참소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노예도 모자라서 억울한 감옥살이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생명은 바람 앞의 촛불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라도 보디발의 말 한마디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더 이상 악화될 일도 없을 만큼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시 요셉의 믿음에 대하여 응답하셨습니다. 본문 21절에서 “야훼께서는 요셉을 돌보시었다. 그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쏟으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해 주셨다.” 고 했습니다.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걸핏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최악의 환경에 이르도록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으며, 결단코 인간의 방법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의 결과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압니다.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하고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요셉은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형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당시의 초강국이었던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후에 자신을 판 형들을 만난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이 형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은 ‘꿈꾸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꿈이 있습니까? 그 꿈이 여러분의 생애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십시오. 어떤 환경과 어려운 여건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에게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며, 그 꿈을 이루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꿈은 위대한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빌립보서 2: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 즉 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꿈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꿈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우리 모두에게는 꿈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교회로 부르실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 속에 꿈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꿈의 실현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꿈이 실현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했던 것이 자신의 꿈에 가까워지는 길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곧 나 자신의 꿈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디모데전서 6:17절에서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하십니다. 이제 2008년에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꿈꾸는 사람’이 됩시다. 비전이 분명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매튜 헨리’라는 위대한 성경학자가 있습니다. ‘매튜 헨리 성경 주해서’영어계통의 주해서로는 가장 좋은 것으로 인정되어 수세기 동안 많은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헨리의 청년기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처가인 ‘매튜 가’는 유명한 귀족이었습니다. 그 집의 무남독녀와 헨리 사이에 혼담이 시작되었을 때, 그 여자의 부모는 헨리의 인품에는 만족했지만 집안의 배경이 약하다 해서 혼사를 반대했습니다.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하는 할 때, 여자의 부모는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남자에게 우리 외동딸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당사자인 그 처녀는 “아버지,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디로 갈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딸의 이 말에 감동한 부모는 결혼을 허락했고, 헨리는 매튜 가에 입양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디로 갈지가 분명해야합니다. 육신의 삶에서도 그렇고, 신앙의 삶에서도 더욱 그러합니다. 여러분의 꿈은 분명합니까? 인생의 목적지가 확실합니까? 세상적인 옛 삶으로 돌아가려 하지 말고, 지나 온 길이 비록 어두웠다 할지라도 모두 씻어버립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2008년의 꿈을 향하여 ‘꿈꾸는 사람’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꿈꾸는 사람이 됩시다. 그리하여 모든 일에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대복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