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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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12-24 15:06
*** 나누는 삶 / 고후 8:1-9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8:1-9,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인천에서 목회하셨던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대심방을 하던 어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날은 환자의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그 가정을 둘러보면서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처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같이 수행한 장로님이 환자가 누워있는 아랫목에 손을 넣어 보고는 “어이구, 연탄불이 꺼졌는가 보구먼!”이라면서 당장 부엌으로 나가보더니 정말 연탄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들어와서는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병원에 가보았느냐?”고 물어 봅니다. 환자 성도는 “병원에 갈 돈이 있어야지요!”라고 힘없이 대답합니다.
심방을 마치고 나오면서 장로님은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가만히 환자 성도의 이불 밑에 넣어놓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장로님은 생활이 그렇게 넉넉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자그마한 구멍가게 같은 데서 장사를 하는 분이었습니다. 바로 그 돈은 그날 물건을 구입할 장사 밑천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장로님 얼마나 드린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장로님은 자기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장사는 무엇으로 하시렵니까?”라고 했더니 장로님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아! 장사야 내일 또 벌면 되지요, 뭐!”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보는 것 같은 감회도 들었습니다. 저의 목회의 꿈 중에 하나도 이런 베풂과 나눔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기에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늘이 대강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지금 내게 임하여 계신 주님께 감사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틀 후면 성탄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당신께서 만드신 사람들을 위하여 종의 형체로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 사랑과 은혜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성도라면, 주님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 합당한 도리이며 사명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고 부탁하신 ‘나누는 삶’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우리의 현실적인 삶을 재정립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마게도냐 교회’가 행했던 나눔의 삶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고린도교회도 행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의 실례를 든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미 일 년 전에 바울이 ‘디도’를 권면하여 ‘구제헌금’을 작정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하게 되어 일 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헌금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교회를 예로 들어서 독려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8장과 9장에 걸쳐 권면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로 제시한 마게도냐 교회는 고린도교회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전서 1:6, 2:14, 3:3-4절 데살로니가후서 1:4-10절 등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이 당한 환난의 많은 시련들이 거론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당한 환난의 많은 시련은 “극한 가난”과 “유대인들의 핍박”, “정치적인 박해”, “로마 제국의 내전으로 인한 기근”등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조차 감당하지 못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넘치도록 풍성한 헌금을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어려움 속에서 풍성한 나눔을 실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나눔의 삶의 원리를 찾아봅시다.
1. 나누는 삶의 필요성과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지 12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세계의 귀감이 될 만한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에 대한 공헌도 커서 국가가 부강하게 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습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물질적인 풍요로 인하여 내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 것과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생각이 큰 작용을 했기 때문입니다. 왜 한국교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부정적인 관심으로 돌아서게 했겠습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섬김을 위한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는 헌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창조주 하나님의 기이한 베풂이며 나눔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적인 생명과 풍성함을 우리 인간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살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고린도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7절에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탄식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만큼 살게 된 것이 누구 덕분입니까? 여러분의 능력입니까? 아니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때문입니까? 우리는 이 땅에 오면서 실오라기 하나 가져온 것이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다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잘 산다고, 먹고 살만 하다고 어려울 때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분명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게 바로 “개구리가 올챙이 때를 잊어버렸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문 9절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권위를 모두 버리시고 낮고 비천한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로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부요하게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더 직접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신명기 15:10-11절입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9:12절에서는 나누는 삶을 “봉사의 직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눔의 삶이 선택덕목이 아니라 필수덕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13-15절을 봅시다.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누는 삶의 목적입니다.
2. 나누는 삶의 자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본문 3-5절을 봅시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여기서는 두 가지의 중요한 나누는 삶의 자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원리는 나누는 삶뿐만 아니라, 성도가 행하는 모든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만일 첫 번째 원리만 행한다면 이는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며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섬김과 봉사의 나누는 삶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6절에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으며, 빌립보서 4:18절에서도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족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생활과 선교를 돕는 물질을 드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나누는 삶에 동참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받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헌신한 후에 생활로 실천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누는 삶의 자세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3. 그들은 나누는 삶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누는 삶은 하나님의 율법의 핵심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제나 나누는 것은 돈이 풍족하게 있어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구제도 나누는 삶도 봉사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돈이 없어도 사랑의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나누는 사역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적인 계산은 전보다 소득이 줄면 헌금이나 나누는 삶을 줄이거나 없애게 됩니다. ‘내게 들어오는 것이 줄었기 때문에 헌금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돈을 쓰면 내 생활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봅시다. 잠언 11:24절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고 하시며 시편 112:9절에서는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6:38절에서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마게도냐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로 이 땅에 세워진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영화로운 삶을 약속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항상 함께 하시며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인도하시는 은혜를 입고 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에 이 일을 하셨으며, 이제는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잠언 21:13절의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만일 우리가 이 일을 게을리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외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내가 인색한 마음으로 나누고, 생활이 어렵다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끊어버린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생활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말라기 3:8-9절을 봅시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삶과 이웃에게 나누는 삶은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2007년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어떻게 나누었는지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2008년도에는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이 있는 나누는 삶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풍성한 삶을 이룰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8:1-9,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인천에서 목회하셨던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대심방을 하던 어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날은 환자의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그 가정을 둘러보면서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처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같이 수행한 장로님이 환자가 누워있는 아랫목에 손을 넣어 보고는 “어이구, 연탄불이 꺼졌는가 보구먼!”이라면서 당장 부엌으로 나가보더니 정말 연탄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들어와서는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병원에 가보았느냐?”고 물어 봅니다. 환자 성도는 “병원에 갈 돈이 있어야지요!”라고 힘없이 대답합니다.
심방을 마치고 나오면서 장로님은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가만히 환자 성도의 이불 밑에 넣어놓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장로님은 생활이 그렇게 넉넉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자그마한 구멍가게 같은 데서 장사를 하는 분이었습니다. 바로 그 돈은 그날 물건을 구입할 장사 밑천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장로님 얼마나 드린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장로님은 자기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장사는 무엇으로 하시렵니까?”라고 했더니 장로님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아! 장사야 내일 또 벌면 되지요, 뭐!”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보는 것 같은 감회도 들었습니다. 저의 목회의 꿈 중에 하나도 이런 베풂과 나눔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기에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늘이 대강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지금 내게 임하여 계신 주님께 감사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틀 후면 성탄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당신께서 만드신 사람들을 위하여 종의 형체로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 사랑과 은혜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성도라면, 주님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 합당한 도리이며 사명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고 부탁하신 ‘나누는 삶’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우리의 현실적인 삶을 재정립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마게도냐 교회’가 행했던 나눔의 삶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고린도교회도 행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의 실례를 든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미 일 년 전에 바울이 ‘디도’를 권면하여 ‘구제헌금’을 작정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하게 되어 일 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헌금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교회를 예로 들어서 독려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8장과 9장에 걸쳐 권면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로 제시한 마게도냐 교회는 고린도교회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전서 1:6, 2:14, 3:3-4절 데살로니가후서 1:4-10절 등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이 당한 환난의 많은 시련들이 거론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당한 환난의 많은 시련은 “극한 가난”과 “유대인들의 핍박”, “정치적인 박해”, “로마 제국의 내전으로 인한 기근”등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조차 감당하지 못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넘치도록 풍성한 헌금을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어려움 속에서 풍성한 나눔을 실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나눔의 삶의 원리를 찾아봅시다.
1. 나누는 삶의 필요성과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지 12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세계의 귀감이 될 만한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에 대한 공헌도 커서 국가가 부강하게 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습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물질적인 풍요로 인하여 내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 것과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생각이 큰 작용을 했기 때문입니다. 왜 한국교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부정적인 관심으로 돌아서게 했겠습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섬김을 위한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는 헌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창조주 하나님의 기이한 베풂이며 나눔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적인 생명과 풍성함을 우리 인간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살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고린도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7절에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탄식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만큼 살게 된 것이 누구 덕분입니까? 여러분의 능력입니까? 아니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때문입니까? 우리는 이 땅에 오면서 실오라기 하나 가져온 것이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다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잘 산다고, 먹고 살만 하다고 어려울 때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분명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게 바로 “개구리가 올챙이 때를 잊어버렸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문 9절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권위를 모두 버리시고 낮고 비천한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로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부요하게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더 직접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신명기 15:10-11절입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9:12절에서는 나누는 삶을 “봉사의 직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눔의 삶이 선택덕목이 아니라 필수덕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13-15절을 봅시다.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누는 삶의 목적입니다.
2. 나누는 삶의 자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본문 3-5절을 봅시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여기서는 두 가지의 중요한 나누는 삶의 자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원리는 나누는 삶뿐만 아니라, 성도가 행하는 모든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만일 첫 번째 원리만 행한다면 이는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며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섬김과 봉사의 나누는 삶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6절에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으며, 빌립보서 4:18절에서도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족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생활과 선교를 돕는 물질을 드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나누는 삶에 동참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받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헌신한 후에 생활로 실천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누는 삶의 자세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3. 그들은 나누는 삶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누는 삶은 하나님의 율법의 핵심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제나 나누는 것은 돈이 풍족하게 있어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구제도 나누는 삶도 봉사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돈이 없어도 사랑의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나누는 사역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적인 계산은 전보다 소득이 줄면 헌금이나 나누는 삶을 줄이거나 없애게 됩니다. ‘내게 들어오는 것이 줄었기 때문에 헌금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돈을 쓰면 내 생활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봅시다. 잠언 11:24절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고 하시며 시편 112:9절에서는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6:38절에서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마게도냐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로 이 땅에 세워진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영화로운 삶을 약속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항상 함께 하시며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인도하시는 은혜를 입고 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에 이 일을 하셨으며, 이제는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잠언 21:13절의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만일 우리가 이 일을 게을리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외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내가 인색한 마음으로 나누고, 생활이 어렵다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끊어버린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생활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말라기 3:8-9절을 봅시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삶과 이웃에게 나누는 삶은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2007년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어떻게 나누었는지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2008년도에는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이 있는 나누는 삶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풍성한 삶을 이룰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