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도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560회 작성일 2007-12-17 11:48
***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도 / 눅 14:15-24

** 들어가는 말

눅 14:15-24, “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은 대강절 세 번째 주간이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대강절을 대변하는 세 의미는 예수님의 ‘오셨음’, ‘오심’, ‘다시 오실’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일 것입니다. 그래서 대강절은 ‘기다림’이라고 하는 기대와 설레임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가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준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르심과 응답’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일에 시달리던 중년의 성도가 심한 두통 때문에 잔뜩 찌푸린 얼굴로 집을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좀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기다리던 동료가 “무리하면 큰일 나니까 좀 쉬지 그래요.” 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동료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안돼요. 아시다시피 난 토요일마다 클럽에서 기사를 읽어야 하거든요. 지금 가야 돼요. 두통약을 먹었으니까 좀 낫겠죠.” 하며 기어코 집을 나섰습니다.
이튿날 주일 아침에 깨우는 아내에게 그 성도는 “오늘 두통 때문에 교회에 못 가겠어. 아마 누군가 교회학교 반을 대신 가르쳐 줄 수 있을 거야. 부장님께 전화할 필요는 없겠지. 누군가 대신 맡을 테니까.”라며 다시 자리에 누워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성도의 간증 속에 들어 있는 한 토막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세상의 부름’과 ‘하나님의 부르심’ 사이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합니다. 직장이나 세상적인 어떤 모임에서 필요로 해서 부를 때에는 무리를 해서라도 응답하려 하면서도, 교회의 직분이나 섬김의 모임에서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응답하는 일에 너무나 인색합니다. 그러다가도 자신이 어떤 위기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도 속히 응답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가 없는 현상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사사시대에 그 예가 있습니다. 사사시대에는 태평성대 - 하나님을 배반함 - 하나님의 징벌 - 백성들의 회개 - 사사를 통한 구원과 회복 - 다시 태평성대 - 사사가 죽으면 다시 배반 … 이런 일이 주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무려 13명의 사사가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이기적인 신앙을 이어왔습니다. 일곱 번째 사사가 지나가고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 암몬 자손을 불러들여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고통 중에서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삿 10:11-14)고 하셨습니다.

마치 ‘내가 너희를 수없이 구원하고, 나를 멀리하고 너희 마음대로 하더니만, 너희가 힘들 때에는 잘도 찾는구나. 나도 이제는 구원하지 않을 테니 너희들이 의지하던 세상에 도움을 구하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좀 편안하면 세상의 풍요와 즐거움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요. 이것이 정말 어리석은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평안할 때 위기의 때를 생각하며 준비합니다. 우리도 기회가 있을 때에 ‘지금’,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시편 50:14-15절을 봅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성실하게 섬기는 것이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이 부담스럽고 아프더라도 지금 점검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주어지던 기회도 끝이 날 것입니다. 상처가 너무나 깊어서 더 이상 치료할 수 없을 때는 돌이켜도 이미 늦어 있을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적 위치를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본문의 의도를 살펴봅시다.

이 말씀은 ‘큰 잔치의 비유’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비유적인 가르침입니다. 비유의 주제는 ‘부르심과 응답’입니다.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열고 손님을 초청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잔치는 결혼 잔치일 것입니다. 이미 초대장은 보내진 상태이며, 잔칫날에 모든 준비를 끝낸 주인은 종들을 다시 초청자들에게 보내어 모셔오도록 분부했습니다. 그런데 초청 받은 사람들의 응답이 영 시원치가 않습니다. 정식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다 일치하게 사양했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초대받은 사람들이 담합했음을 느끼게 합니다. 초대받은 자들이 계획적으로 잔치 자체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들의 악한 의도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첫 번째 거절 자는 ‘새로 밭을 샀기 때문에 불가불 나가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밭을 사기 위해서 살펴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놓은 밭이 어떠한가를 둘러보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미 산 밭을 둘러보는 것은 잔치를 거절할 만큼 어쩔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잔치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거리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거절 자도 역시 ‘이미 사놓은 소 열 마리를 시험하러 가야한다.’는 핑계를 내세웠습니다. 소 열 마리로 갈아야 할 정도의 밭이라면 대단히 큰 땅을 소유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어의 표현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소 장수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사람이 농사꾼이었든 소 장수였던, 중요한 것은 잔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이 새로 산 소 열 마리에 있었습니다.

세 번째 거절 자는 ‘결혼 한지 얼마 안 된 새신랑’이라는 핑계를 댔습니다. 보통 유대 결혼식은 밤늦게까지 진행되는데, 아내를 집에 혼자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신혼부부라 해도 다른 결혼잔치에 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가면 될 것이고, 혼자 간다 하더라도 신부 혼자 집에 있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앞의 두 경우처럼 잔치를 거절하는 핑계일 뿐입니다.

주인은 정식 초대자들이 담합하여 거절하는 것을 알고는 화가 났습니다. 종들을 불러서 ‘시내나 변두리나 어디서든지 사람들을 불러다가 내 잔치자리를 채우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즉석 초대자들입니다. 본 의미에 있어서 정식 초대자들은 선민인 유대인들이며, 즉석 초대자들은 이방인들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정식 초대자들은 택하심을 받고 은혜를 입어 복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하여 택하신 자들을 일터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핑계로 부르심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0:31절에서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 성도는 불러주실 때 지체 없이 응답해야 합니다.

이사야 55:6절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시고, 만나주시는 기회는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끼지 않습니까! 내가 원한다고 나를 불러주고 써줍니까? 어떤 단체라도 그곳에서 필요한 인물이 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인정 될 때, 불러주고 써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해서 부르신다면, 감지덕지하면서 응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더 없는 영광의 기회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성도에게는 영적인 복과 육신적인 복을 주시며, 도움을 구할 때에는 언제든지 응답하십니다.

불러줄 때가 좋은 때입니다. 나중에는 찾아다녀도 외면당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가령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거절한다고 칩시다. 그런다고 하나님의 일이 차질이 생기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9:4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실질적인 예가 에스더서에 나옵니다.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 때에 총리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유대인‘모르드개’로 인하여 유대인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 때에 모르드개의 조카인 에스더가 왕후로 있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을 몰살시키려는 하만 총리의 계략을 에스더에게 알리고, 왕에게 탄원하도록 했습니다. 에스더는 ‘왕이 부르지 않을 때에 왕에게 나아가면 죽게 된다.’고 하면서 ‘내가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지 이미 한 달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모르드개는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3-14)라고 했습니다. 내가 응답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른 것을 통하여 내게 맡기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한 나는 당연히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대복교회로 부름 받은 것이 지금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로마서 11:29절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이 부르지도 않으십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고 부르신 것은 이 시대에,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거절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바빠서 못합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하겠습니다.’ 등등. 또 하나는 간접적인 완곡한 거절입니다. 일을 맡거나, 직분을 받고서도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에도 듣지 않으십니다. 스가랴 7:13절을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라고 하시며, 이사야 50:2절에서는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라고 하십니다. 어떤 거절이든지 이는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과 전혀 연결 될 수가 없습니다.

시카고의 빈민거리를 목사와 회의론자인 이발사가 나란히 걷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그 주변은 몹시 지저분하여 악취가 풍겼습니다. 그 모양을 보고 이발사가
“만약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세상에 어찌 저렇게 처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신단 말입니까?”
라고 비난했습니다. 마침 그 때 지저분한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히피족이 하나 지나갔습니다. 목사가
“저 친구를 보십니까? 저 친구는 수염도 깍지 않고, 머리는 어깨를 덮으니 어찌 당신 같은 이발사가 젊은이들이 저렇게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발사는
“그야 저 친구들이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니까 그렇죠. 이발소에 들어오기만 하면 멋진 신사로 만들어 줄 텐데 말입니다.”
라고 변명합니다. 목사는 그 말을 받아
“하나님도 당신과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느낌이 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바꾸어놓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천국잔치를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7-9절을 봅시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바로 이 잔치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잔치를 준비해야 합니다. 신혼집이 완성이 되면 신랑 되신 주님께서 신부인 성도들을 데리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3절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약속을 확실하게 신뢰하십니까?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그 나라에 가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까? 이 둘이 확실하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약속이 내게 이루어질 것이니까요. 육신이 사는 일로 핑계하지 않아야 합니다. 핑계는 거절의 뜻이며, 주인께서는 그 초대장을 다른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어떤 부르심이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필요로 하실 때에 기쁘게 응답하셔서 지금의 삶과 영원한 삶의 풍성한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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