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결과 앞에서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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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12-03 14:32
*** 내 인생의 결과 앞에서 / 마 25:31-46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 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밀레니엄 대란을 염려하며 술렁거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7년이 지난 2007년도 저물어가는 마지막 달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교회의 일 년 살림살이를 결산하면서 여러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짧게 느낄 정도로 바쁘게, 또한 건강하게 살아온 삶이 감사했습니다. 가정과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지나온 추억이 서린 사진들을 보면서 어느 듯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깊이 생각한 것은 ‘내 인생의 결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면 분명히 결산을 해야 할 텐데, 그동안 나는 무엇을 남겼나?!”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죽음에 대하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가장 두렵고 떨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히 9: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내 인생의 결과가 어느 편에 설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고, 앞날을 새롭게 계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나온 한 해가 어떠했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주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점수를 매기신다면 몇 점이나 주실 것 같습니까? 이시간의 본문말씀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종말적인 비유 세 가지 중의 마지막 비유입니다. 흔히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부르는데, 이 비유의 핵심은 ‘결산’입니다. 양과 염소로 비유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적 인생과 반항적 인생이라는 ‘분류’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적 인생과 하나님을 거역한 인생, 이 둘로 나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본문 46절 말씀처럼 ‘거역한 자는 영벌에, 순종한 의인들은 영생’ 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중간 정산해 두는 것은 정말 중요하고 지혜로운 일입니다.
본문의 대략적인 의도를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이 세 비유는 ‘천국 비유’입니다. 그런데 세 비유 모두 인류의 ‘마지막 시점(omega point)'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의 특징은 세 비유가 모두 신앙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절대 조건인 ‘믿음’과 ‘행함’조차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잣대로 재신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믿음과 순종으로 판단하고, 믿음과 순종 즉 행함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저울로 계량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저울이 본문인 ‘양과 염소의 비유’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최후의 심판이라고 부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는 단 두 부류로만 나뉩니다. 양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오른편과 염소로 표현된 하나님의 왼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들로 분류된 오른편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런데 오른편의 사람들은 ‘우리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의도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염소로 분류된 왼편의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 그런데 왼편의 사람들은 ‘우리가 했는데 왜 하지 않았다고 하십니까?’라고 항변합니다. 정말 반대되는 두 무리입니다.
이 두 부류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며,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는 것입니다. 즉 가치 없고, 보잘 것 없고, 무시할 수 있는 그런 소외된 한 사람에게 한 것을 기준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 선언은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는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결과는 어느 편에 서게 될지를 살펴봅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남의 인생이 아니라 바로 내 인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하고 간섭을 하는 것을 봅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목적을 잃어버리고 쓸데없는 방법에만 매달려 집착하는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율법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3:13절에서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중견 기업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할 신입사원을 채용했습니다. 한 신입사원이 처음 써서 올린 보고서를 보고 그의 상사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보고서는 철자법과 띄어쓰기가 너무나 엉망이었고, 도무지 최소한의 격식도 갖추지 못한 엉터리 보고서였기 때문입니다.
“오널 나넌 돈두 한푼도 엄는 것 가튼 사람에게 물거늘 파랏슴니다.”
그리고 아래에는 물건을 판매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보고서는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물거늘 마니 파는 방버블 차자 내씀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판매 전략이 두서없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상사는 이 어이없는 신입사원의 보고서를 사장에게 올리고 그를 당장 해고시킬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다음날 사장으로부터 결재서류가 내려왔습니다. 사장의 결재서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회사에 정말 피료한 인재가 드러왔소! 그의 복오서의 철짜에만 너무 신경을 쓰지말고, 그가 쓴 보고서를 잘 일거보고 당신들도 그대로 따라서 물거늘 마니 파는 방버블 연구하시오. -사장-\"
상품을 많이 팔아서 이윤을 많이 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보고서의 철자 틀리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 집착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현대판 바리새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 경우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인생의 결과를 진정한 순종과 외식적 순종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시고 자녀로 삼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자녀인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자꾸만 바리새인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즉 신앙의 모양만 가진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을 봅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신앙에는 입으로만 하는 이론적인 신앙이 있고, 틀에 박힌 형식에만 그치는 외식적 신앙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가 따르는 진정한 신앙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3:18절을 봅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하십니다. 이론적인 신앙이나 외식적인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오른편인 ‘양의 무리’에 속할 수가 없습니다. 양의 무리에 속하지 못하게 되면 ‘영벌’이라는 참담한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영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은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도록’가르치십니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의 항의입니다. 44절을 봅시다.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 하더이까”라고 불만스럽게 항의합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우리도 주님 말씀대로 다 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마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는 말과 똑 같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그들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했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나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는’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상이 엉뚱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내게 유익이 되는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자신과 관계가 되는 사람. 그들에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소외된 자들, 버려진 자들, 내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자들. 그런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32-34절을 봅시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며,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14:2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또한 잠언 19:17절에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자신의 한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일치되는 행동입니다. 마태복음 6:3-4절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저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했을 뿐입니다. 그 일이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기억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시면서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곳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과만 친하게 지내지는 않으셨습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왼편의 염소 무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베풀고, 자신의 것으로 섬기며 봉사했다면 기뻐하십시오. 주님의 영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오른편의 양의 무리에 서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조금 어렵고 힘든 생애를 산다할지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기를 바랍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내 인생의 결과’를 보게 될 그날을 생각합시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결산해 보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복된 연말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 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밀레니엄 대란을 염려하며 술렁거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7년이 지난 2007년도 저물어가는 마지막 달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교회의 일 년 살림살이를 결산하면서 여러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짧게 느낄 정도로 바쁘게, 또한 건강하게 살아온 삶이 감사했습니다. 가정과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지나온 추억이 서린 사진들을 보면서 어느 듯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깊이 생각한 것은 ‘내 인생의 결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면 분명히 결산을 해야 할 텐데, 그동안 나는 무엇을 남겼나?!”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죽음에 대하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가장 두렵고 떨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히 9: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내 인생의 결과가 어느 편에 설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고, 앞날을 새롭게 계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나온 한 해가 어떠했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주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점수를 매기신다면 몇 점이나 주실 것 같습니까? 이시간의 본문말씀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종말적인 비유 세 가지 중의 마지막 비유입니다. 흔히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부르는데, 이 비유의 핵심은 ‘결산’입니다. 양과 염소로 비유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적 인생과 반항적 인생이라는 ‘분류’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적 인생과 하나님을 거역한 인생, 이 둘로 나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본문 46절 말씀처럼 ‘거역한 자는 영벌에, 순종한 의인들은 영생’ 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중간 정산해 두는 것은 정말 중요하고 지혜로운 일입니다.
본문의 대략적인 의도를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이 세 비유는 ‘천국 비유’입니다. 그런데 세 비유 모두 인류의 ‘마지막 시점(omega point)'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의 특징은 세 비유가 모두 신앙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절대 조건인 ‘믿음’과 ‘행함’조차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잣대로 재신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믿음과 순종으로 판단하고, 믿음과 순종 즉 행함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저울로 계량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저울이 본문인 ‘양과 염소의 비유’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최후의 심판이라고 부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는 단 두 부류로만 나뉩니다. 양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오른편과 염소로 표현된 하나님의 왼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들로 분류된 오른편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런데 오른편의 사람들은 ‘우리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의도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염소로 분류된 왼편의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 그런데 왼편의 사람들은 ‘우리가 했는데 왜 하지 않았다고 하십니까?’라고 항변합니다. 정말 반대되는 두 무리입니다.
이 두 부류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며,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는 것입니다. 즉 가치 없고, 보잘 것 없고, 무시할 수 있는 그런 소외된 한 사람에게 한 것을 기준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 선언은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는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결과는 어느 편에 서게 될지를 살펴봅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남의 인생이 아니라 바로 내 인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하고 간섭을 하는 것을 봅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목적을 잃어버리고 쓸데없는 방법에만 매달려 집착하는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율법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3:13절에서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중견 기업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할 신입사원을 채용했습니다. 한 신입사원이 처음 써서 올린 보고서를 보고 그의 상사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보고서는 철자법과 띄어쓰기가 너무나 엉망이었고, 도무지 최소한의 격식도 갖추지 못한 엉터리 보고서였기 때문입니다.
“오널 나넌 돈두 한푼도 엄는 것 가튼 사람에게 물거늘 파랏슴니다.”
그리고 아래에는 물건을 판매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보고서는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물거늘 마니 파는 방버블 차자 내씀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판매 전략이 두서없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상사는 이 어이없는 신입사원의 보고서를 사장에게 올리고 그를 당장 해고시킬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다음날 사장으로부터 결재서류가 내려왔습니다. 사장의 결재서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회사에 정말 피료한 인재가 드러왔소! 그의 복오서의 철짜에만 너무 신경을 쓰지말고, 그가 쓴 보고서를 잘 일거보고 당신들도 그대로 따라서 물거늘 마니 파는 방버블 연구하시오. -사장-\"
상품을 많이 팔아서 이윤을 많이 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보고서의 철자 틀리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 집착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현대판 바리새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 경우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인생의 결과를 진정한 순종과 외식적 순종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시고 자녀로 삼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자녀인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자꾸만 바리새인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즉 신앙의 모양만 가진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을 봅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신앙에는 입으로만 하는 이론적인 신앙이 있고, 틀에 박힌 형식에만 그치는 외식적 신앙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가 따르는 진정한 신앙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3:18절을 봅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하십니다. 이론적인 신앙이나 외식적인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오른편인 ‘양의 무리’에 속할 수가 없습니다. 양의 무리에 속하지 못하게 되면 ‘영벌’이라는 참담한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영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은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도록’가르치십니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의 항의입니다. 44절을 봅시다.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 하더이까”라고 불만스럽게 항의합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우리도 주님 말씀대로 다 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마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는 말과 똑 같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그들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했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나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는’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상이 엉뚱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내게 유익이 되는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자신과 관계가 되는 사람. 그들에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소외된 자들, 버려진 자들, 내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자들. 그런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32-34절을 봅시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며,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14:2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또한 잠언 19:17절에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자신의 한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일치되는 행동입니다. 마태복음 6:3-4절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저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했을 뿐입니다. 그 일이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기억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시면서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곳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과만 친하게 지내지는 않으셨습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왼편의 염소 무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베풀고, 자신의 것으로 섬기며 봉사했다면 기뻐하십시오. 주님의 영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오른편의 양의 무리에 서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조금 어렵고 힘든 생애를 산다할지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기를 바랍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내 인생의 결과’를 보게 될 그날을 생각합시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결산해 보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복된 연말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