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행복을 소유하는 행복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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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11-25 22:39
*** 주님의 행복을 소유하는 행복 / 마 5:1-12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5:1-12(공동번역),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 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다가 왔다. 2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7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0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을 지나서, 대강절을 한 주간 앞 둔 시점이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행복과 감사의 계절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들뜨고, 마냥 행복해지고 싶은 그런 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 시기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영원한 소망을 기대하면서 행복에 잠기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행복’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에 행복이 배가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계적인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를 설립한 프랑스의 ‘아베 삐에르’ 신부가 있습니다. 그는 1949년 당시 프랑스 국회 상원의원이었으며, 파리 교외에 부모로 부터 상속받은 퇴락한 큰집을 수리하여 국제 유스호스텔로 이용하려고 계획했습니다. 그 즈음에 한 사람의 자살 미수자를 만났습니다. 고통에 짓눌린 그 사람의 모습을 본 삐에르 신부는 이런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처음으로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인 그의 집을 '엠마우스'라고 부르고, 이후 엠마우스 운동은 전 세계로 확산 되었습니다. 엠마우스 공동체를 시작하게 했던 그 자살 미수자의 이야기가 이 분이 쓴 ‘단순한 기쁨’이라는 비망록에 들어있습니다.
한 청년 신사가 자실 직전에 신부님을 찾아와서 자문을 구했습니다. 청년은 자살하려고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가정적인 문제, 경제의 파탄, 사회적인 지위 등등. 모든 상황으로 나는 지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청년의 이야기를 다 들은 삐에르 신부는 깊은 동정과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군요.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수가 없겠습니다. 자살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그런데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시고 그리고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지요.”라고 합의하에서 그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집을 짓는 일을 옆에서 같이 돕게 됩니다. 얼마 후에 이 사람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부님께서 내게 돈을 주었든지,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던지, 이렇게 베풀었더라면 나는 다시 자살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과 같이 내가 일을 하면서 섬기면서 이제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았고, 이제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의 고백에서 ‘행복’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청년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을 찾았을 때에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동물들은 힘으로 서열을 정하고 먹고 즐기고 번식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느 동물들처럼 단순하게 번식과 육적인 쾌락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은 물질문명을 발전시키면서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것이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처럼 몰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추구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자살하거나, 자포자기 하거나, 정신병으로 몰락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15절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7:31절에서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먼저, 본문의 대략적인 내용부터 살펴봅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진정한 행복은 본문 말씀에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세상 사람들도 ‘문학의 백미’라고 극찬하는 ‘산상수훈’의 출입문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시작으로 하여 산상수훈의 내용들이 어떤 성질의 말씀인지를 가르치십니다. ‘팔복’이라고 부르는 산상수훈의 출입문은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는 예수님의 태도부터 의미심장함을 느끼게 합니다.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는 말씀으로 굳이 예수님의 태도를 설명한 것은 ‘권위 있는 말씀’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입장에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앉는다.’는 표현은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포하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행동수칙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말씀을 들을 대상에 대해서입니다.
본문 앞의 4:25절에서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한 말씀대로,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이방인, 유대인 할 것 없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들을 보시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특별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은 보내시고 제자들만 모아서 가르치신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전개될 말씀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실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아니고는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깨닫기도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말씀인 ‘팔복’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후렴처럼 있는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 된 makarios(makavrio\")는 영어로 blessed로 번역이 되었으며, ‘최고의 축복’을 의미하는 ‘행복’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행복함이여!’라는 말이 8번이 나온다고 해서 ‘팔복’이라고 합니다. 사실 11절에서 전체적인 결론으로 ‘행복이여!’라는 말이 한 번 더 나옵니다. 이는 전체적인 결론이기 때문에 ‘구복’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논하신 3절에서 10절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행복’은 모두 ‘감탄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음이 가난한 자의 행복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팔복의 구절들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이 가지신 행복이며, 따라오는 뒷부분은 예수님의 행복을 소유하는 제자들이 누릴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행복은 이러합니다.
‘행복은 소유에 만족하는데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마음이 가난한데 있습니다. 행복은 웃고 즐기는데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죄를 슬퍼하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강한데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온유한데 있습니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에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무정하고 차가운데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자비롭게 여기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더러운 마음에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깨끗한 마음에게 주어집니다. 행복은 다투고 갈등하는데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평화를 위해 일하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불의와 타협하는데 있지 않으며, 차라리 예수님처럼 옳은 일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행복 론입니다. 이러한 행복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많이 가지려하면 사기치고 빼앗으려 하겠지만, 다 내어주고 가난하게 되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행복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이 행복을 가질 수 있습니까?
주님의 행복을 소유하는 것은 주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행복을 소유하려면 주님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로운 현상을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행복이여!”라고 진정한 행복을 노래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비움의 삶’에서 오는 행복감입니다. 예수님의 비움에 대하여 빌립보서 2:6-7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가지신 ‘비움의 행복’을 소유하려면 우리도 ‘모든 욕망을 비워야’합니다. 욕망을 비워내고 가난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행복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벨기에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모리스 메테르링크(Maurice Maeterlinck)’가 쓴 'Blue Bird'(파랑새)라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할 수 있는 희곡이 있습니다. 이 극은 두 아이의 모험을 통하여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한 우리 일상 속에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 극을 성경적으로 적용하여 드라마 화한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는 버림받은 천한 인간입니다. 여러 귀신이 들어서 인격이 완전히 깨져 버리고 파산한 사람입니다. 또 신분상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미루어 보아 창녀 출신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행복을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 사람이 됩니다. 그 드라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행복에 겨워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전에 알지 못한 행복을 가져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모든 자들은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행복해질 수 있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헤맵니다. 이 일을 하면 행복할까! 저것을 가지면 행복할까! 나도 저렇게 되면 행복할까! 마치 ‘파랑새’에 나오는 ‘틸틸’과 ‘미틸’ 두 아이처럼,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여러 신기한 나라들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불행의 화신처럼 보였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어서 파랑새는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늘 가까이 계셨던 예수님이 완전한 행복을 주시는 파랑새 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소유된 마리아는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세상이 버린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하는 사랑에서 예수님의 행복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예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서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시는 순간부터 행복은 시작됩니다. 내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내 마음에 새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한꺼번에 혹은 하루아침에 순식간에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새기시는 대로,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한 가지씩 마음의 생각이 달라지고, 말투가 변화되고, 행동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욕망들을 비울 수 있게 되고, 세상의 죄악 된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부드럽게 품을 수 있으며, 옳은 일을 위하여 힘쓰게 되고, 불쌍히 여기며, 마음조차 깨끗하게 되고, 화평을 위하여 박해까지도 행복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게 여겨지게 되면,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상급이 준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복을 소유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위대한 행복이지만, 이 행복을 위하여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마가복음 8:34절에서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제 이 주님을 생각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대강절이 시작되고, 예수님이 세상에 처음 오셨던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이러한 감사와 행복의 계절에 주님의 행복을 소유하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5:1-12(공동번역),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 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다가 왔다. 2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7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0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을 지나서, 대강절을 한 주간 앞 둔 시점이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행복과 감사의 계절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들뜨고, 마냥 행복해지고 싶은 그런 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 시기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영원한 소망을 기대하면서 행복에 잠기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행복’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에 행복이 배가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계적인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를 설립한 프랑스의 ‘아베 삐에르’ 신부가 있습니다. 그는 1949년 당시 프랑스 국회 상원의원이었으며, 파리 교외에 부모로 부터 상속받은 퇴락한 큰집을 수리하여 국제 유스호스텔로 이용하려고 계획했습니다. 그 즈음에 한 사람의 자살 미수자를 만났습니다. 고통에 짓눌린 그 사람의 모습을 본 삐에르 신부는 이런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처음으로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인 그의 집을 '엠마우스'라고 부르고, 이후 엠마우스 운동은 전 세계로 확산 되었습니다. 엠마우스 공동체를 시작하게 했던 그 자살 미수자의 이야기가 이 분이 쓴 ‘단순한 기쁨’이라는 비망록에 들어있습니다.
한 청년 신사가 자실 직전에 신부님을 찾아와서 자문을 구했습니다. 청년은 자살하려고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가정적인 문제, 경제의 파탄, 사회적인 지위 등등. 모든 상황으로 나는 지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청년의 이야기를 다 들은 삐에르 신부는 깊은 동정과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군요.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수가 없겠습니다. 자살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그런데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시고 그리고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지요.”라고 합의하에서 그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집을 짓는 일을 옆에서 같이 돕게 됩니다. 얼마 후에 이 사람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부님께서 내게 돈을 주었든지,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던지, 이렇게 베풀었더라면 나는 다시 자살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과 같이 내가 일을 하면서 섬기면서 이제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았고, 이제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의 고백에서 ‘행복’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청년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을 찾았을 때에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동물들은 힘으로 서열을 정하고 먹고 즐기고 번식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느 동물들처럼 단순하게 번식과 육적인 쾌락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은 물질문명을 발전시키면서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것이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처럼 몰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추구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자살하거나, 자포자기 하거나, 정신병으로 몰락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15절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7:31절에서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먼저, 본문의 대략적인 내용부터 살펴봅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진정한 행복은 본문 말씀에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세상 사람들도 ‘문학의 백미’라고 극찬하는 ‘산상수훈’의 출입문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시작으로 하여 산상수훈의 내용들이 어떤 성질의 말씀인지를 가르치십니다. ‘팔복’이라고 부르는 산상수훈의 출입문은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는 예수님의 태도부터 의미심장함을 느끼게 합니다.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는 말씀으로 굳이 예수님의 태도를 설명한 것은 ‘권위 있는 말씀’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입장에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앉는다.’는 표현은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포하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행동수칙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말씀을 들을 대상에 대해서입니다.
본문 앞의 4:25절에서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한 말씀대로,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이방인, 유대인 할 것 없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들을 보시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특별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은 보내시고 제자들만 모아서 가르치신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전개될 말씀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실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아니고는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깨닫기도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말씀인 ‘팔복’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후렴처럼 있는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 된 makarios(makavrio\")는 영어로 blessed로 번역이 되었으며, ‘최고의 축복’을 의미하는 ‘행복’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행복함이여!’라는 말이 8번이 나온다고 해서 ‘팔복’이라고 합니다. 사실 11절에서 전체적인 결론으로 ‘행복이여!’라는 말이 한 번 더 나옵니다. 이는 전체적인 결론이기 때문에 ‘구복’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논하신 3절에서 10절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행복’은 모두 ‘감탄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음이 가난한 자의 행복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팔복의 구절들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이 가지신 행복이며, 따라오는 뒷부분은 예수님의 행복을 소유하는 제자들이 누릴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행복은 이러합니다.
‘행복은 소유에 만족하는데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마음이 가난한데 있습니다. 행복은 웃고 즐기는데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죄를 슬퍼하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강한데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온유한데 있습니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에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무정하고 차가운데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자비롭게 여기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더러운 마음에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깨끗한 마음에게 주어집니다. 행복은 다투고 갈등하는데 있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평화를 위해 일하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불의와 타협하는데 있지 않으며, 차라리 예수님처럼 옳은 일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행복 론입니다. 이러한 행복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많이 가지려하면 사기치고 빼앗으려 하겠지만, 다 내어주고 가난하게 되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행복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이 행복을 가질 수 있습니까?
주님의 행복을 소유하는 것은 주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행복을 소유하려면 주님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로운 현상을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행복이여!”라고 진정한 행복을 노래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비움의 삶’에서 오는 행복감입니다. 예수님의 비움에 대하여 빌립보서 2:6-7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가지신 ‘비움의 행복’을 소유하려면 우리도 ‘모든 욕망을 비워야’합니다. 욕망을 비워내고 가난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행복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벨기에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모리스 메테르링크(Maurice Maeterlinck)’가 쓴 'Blue Bird'(파랑새)라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할 수 있는 희곡이 있습니다. 이 극은 두 아이의 모험을 통하여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한 우리 일상 속에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 극을 성경적으로 적용하여 드라마 화한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는 버림받은 천한 인간입니다. 여러 귀신이 들어서 인격이 완전히 깨져 버리고 파산한 사람입니다. 또 신분상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미루어 보아 창녀 출신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행복을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 사람이 됩니다. 그 드라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행복에 겨워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전에 알지 못한 행복을 가져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모든 자들은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행복해질 수 있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헤맵니다. 이 일을 하면 행복할까! 저것을 가지면 행복할까! 나도 저렇게 되면 행복할까! 마치 ‘파랑새’에 나오는 ‘틸틸’과 ‘미틸’ 두 아이처럼,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여러 신기한 나라들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불행의 화신처럼 보였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어서 파랑새는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늘 가까이 계셨던 예수님이 완전한 행복을 주시는 파랑새 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소유된 마리아는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세상이 버린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하는 사랑에서 예수님의 행복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예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서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시는 순간부터 행복은 시작됩니다. 내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내 마음에 새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한꺼번에 혹은 하루아침에 순식간에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새기시는 대로,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한 가지씩 마음의 생각이 달라지고, 말투가 변화되고, 행동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욕망들을 비울 수 있게 되고, 세상의 죄악 된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부드럽게 품을 수 있으며, 옳은 일을 위하여 힘쓰게 되고, 불쌍히 여기며, 마음조차 깨끗하게 되고, 화평을 위하여 박해까지도 행복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게 여겨지게 되면,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상급이 준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복을 소유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위대한 행복이지만, 이 행복을 위하여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마가복음 8:34절에서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제 이 주님을 생각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대강절이 시작되고, 예수님이 세상에 처음 오셨던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이러한 감사와 행복의 계절에 주님의 행복을 소유하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