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보답할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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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11-19 16:23
*** 무엇으로 보답할꼬! / 시편 116:1-14
** 들어가는 말
시편 116:1-14,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2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9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11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다음에 이야기 하는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첫째, 부자 되는 것. 둘째, 좋은 건강. 셋째, 주님과의 사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 것을 택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여겨집니다.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 어떤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서부의 아마고사 사막을 지나다 보면 중간 지점쯤에 물 펌프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낮 기온이 60도 가까이 되는 뜨거운 한낮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여행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물이 없다면 곧 죽음입니다. 그런데 여행자들이 그 뜨거운 사막에서 물 펌프를 발견하고는 달려갑니다. 물 펌프의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깡통을 발견하고, 깡통 속에 있는 메모지를 보게 됩니다.
“이 펌프에 물을 붓고 펌프질만 하면 물은 틀림없이 나옵니다. 이 땅 밑의 샘에는 언제나 물이 있습니다. 이 펌프 옆의 흰 바위 밑에는 큰 병에 물이 담겨져 모래에 파묻혀 있습니다. 햇볕에 증발치 않도록 마개를 잘 막았지요. 그 병을 꺼내어 물을 펌프에 부으십시오. 만약에 그 물을 먼저 마시면 물이 모자랍니다. 그 물을 펌프에다 다 붓고 펌프질을 하십시오. 제 말을 믿으세요. 물은 틀림없이 나오며 당신이 필요한 대로 충분히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물을 다 쓴 후에는 그 병에 물을 가득히 채워서 마개를 꼭 막아 처음 있던 대로 모래 속에 묻어 두십시오. 당신 다음에 오는 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추신: 병의 물을 먼저 마셔 버리면 안 됩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제가 어렸을 때에도 펌프가 있었습니다. 샘의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펌프에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샘물이 올라오도록 마중 가는 물이라는 것이지요. 누가 표현했는지, 참 정겨운 표현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갈증과 뜨거움으로 초죽음이 되어 있을 때 이 메모지를 읽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갈증을 풀 수 있는 물이 있는데, 그 물을 불확실한 펌프에 부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 느낄 수 없는 것보다는 육신적인 감각을 먼저 생각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숨어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우리가 만났다.’고 했지만 도마는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의 손바닥과 옆구리를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심 많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더 넓은 세계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당면한 현실과 눈앞의 육신의 삶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간에 전하려는 말씀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일이 더없이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하지 않아야 할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환경, 당면한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영원한 저주의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자녀로 삼으신 것, 지금도 항상 함께하시며 기도를 들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 등등. 이러한 은혜는 값으로 환상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감사의 대상으로 잘 꼽히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당면한 육신의 현실을 먼저 생각합니다. 다행히 건강하고, 직장이나 사업이 그런대로 괜찮고 가정도 평안하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고, 건강도 좋지 않고, 모든 여건이 좋지 않다면 감사할 마음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인은 자신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사람들로 인하여 정말 큰 곤란의 지경에 처해서, 사람들을 보기조차 싫은 지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현실을 그대로 내려놓고 나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나를 택하신 것,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것,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일할 기회를 주신 것, 지금까지 가정과 모든 삶에 역사하시고 인도하신 것, 무엇보다도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은혜, 등등. 우리가 마지막 때를 만났을 때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게 될 이 은혜가 지금 느껴집니까? 혹 세상에 너무 찌들어버려서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지금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그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포함하는 시편 116편은 113-118편까지의 ‘애굽 할렐’(Egyptian Hallel)이라고 불립니다. 즉 출애굽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할렐루야 찬양’입니다. 이 시편들은 주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축제일에 불렸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축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6-7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라고 노래합니다. 이는 낮고 비천한 처지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후하게 대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옛말에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고 했습니다. 원수는 두고두고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물이 흘러가버리듯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감사’라는 히브리어 ‘yadah(hd:y:)’에는 ‘예배하다’는 뜻과 함께 ‘기억하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스스로 묻고는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스스로 답변을 합니다. 즉 감사의 제물을 드리며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겠다는 고백입니다.
만일 내가 어떤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도와주고, 일어서도록 힘이 되어 주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친구가 생활이 좋아지고 나서 나를 잊어버렸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결코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음에는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할지도 모르지요. 반면에 작은 도움을 입은 친구가 나의 이름을 기억해주고 ‘고마웠다.’고 이야기 한다면, 더 많이 도와주고 싶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주신 ‘열 명의 문둥병자’의 이야기처럼, 예수님께서도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 큰 것을 챙겨주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섭섭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감사를 드리겠습니까?
2.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서원을 갚는 것입니다.
본문 12-14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성도들 앞에서 서원을 갚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름을 부르며”라는 말은 ‘이름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을 의미하며, “서원을 갚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한 약속을 이행하고 완성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입니까?
이는 내게 이루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이루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자신이 그 일을 했음을 나타내고 자랑합니다. 오죽했으면 옛말에도 “잘 되면 자기 탓, 잘못 되면 조상 탓”이라고까지 했겠습니까. 또한 인류가 수많은 언어로 나누어지고 흩어지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를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으면서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다르게 하여 그들을 온 땅에 흩어버리셨습니다. 불행을 자초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헤롯 대왕입니다. 헤롯은 백성들이 아첨하여 높이는 말을 듣고는 자기를 드러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행전 12:22-23절에서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고 증언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가지고 온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6:7절에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하시며, 신명기 8:18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스스로 만들고 성취한 것처럼 자랑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16절에서는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10:17절에서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하십니다.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마치 나 자신이 얻고 이룬 것처럼 나타낸다면 하나님께서 빼앗으시고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내게 이루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서원을 갚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한 약속을 성도들 앞에서 이행하는 것입니다. 아마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기도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것이 서원인 줄도 모르고 하는 것을 봅니다.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5:4-6절을 봅시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라고 하시며 신명기 23:21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드리겠습니다.” 라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까? 오랜 시간이 지나서 잊어버렸다고 하나님도 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어려서 잘 몰라서 그랬다.’라고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앞에서 읽었던 전도서 5:6절에서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그것도 혼자서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앞에서 그 약속을 이행하라고 하십니다. 즉 확실한 이행을 말씀하십니다.
예전에 어떤 집사님이 부흥회를 하면서 교회당 건축헌금을 작정했습니다. 한 주간 두 주간 지나면서 마음에 부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집사님은 다른 교회로 가버렸습니다. 집사님은 이 교회만 떠나면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약속은 교회에 한 것도 아니요, 목사님에게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 끝까지 간다고 해서 하나님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구를 떠나도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한다면 나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약속한 물질이 얼마큼의 양인지는 몰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고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의 생명을 내놓는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삶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된 최소한의 염치이며 도리입니다. 시편 103:2-5절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삶을 삽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약속을 지키는 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시 103:17-18)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보답하는 삶을 이루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시편 116:1-14,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2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9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11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다음에 이야기 하는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첫째, 부자 되는 것. 둘째, 좋은 건강. 셋째, 주님과의 사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 것을 택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여겨집니다.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 어떤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서부의 아마고사 사막을 지나다 보면 중간 지점쯤에 물 펌프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낮 기온이 60도 가까이 되는 뜨거운 한낮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여행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물이 없다면 곧 죽음입니다. 그런데 여행자들이 그 뜨거운 사막에서 물 펌프를 발견하고는 달려갑니다. 물 펌프의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깡통을 발견하고, 깡통 속에 있는 메모지를 보게 됩니다.
“이 펌프에 물을 붓고 펌프질만 하면 물은 틀림없이 나옵니다. 이 땅 밑의 샘에는 언제나 물이 있습니다. 이 펌프 옆의 흰 바위 밑에는 큰 병에 물이 담겨져 모래에 파묻혀 있습니다. 햇볕에 증발치 않도록 마개를 잘 막았지요. 그 병을 꺼내어 물을 펌프에 부으십시오. 만약에 그 물을 먼저 마시면 물이 모자랍니다. 그 물을 펌프에다 다 붓고 펌프질을 하십시오. 제 말을 믿으세요. 물은 틀림없이 나오며 당신이 필요한 대로 충분히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물을 다 쓴 후에는 그 병에 물을 가득히 채워서 마개를 꼭 막아 처음 있던 대로 모래 속에 묻어 두십시오. 당신 다음에 오는 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추신: 병의 물을 먼저 마셔 버리면 안 됩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제가 어렸을 때에도 펌프가 있었습니다. 샘의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펌프에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샘물이 올라오도록 마중 가는 물이라는 것이지요. 누가 표현했는지, 참 정겨운 표현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갈증과 뜨거움으로 초죽음이 되어 있을 때 이 메모지를 읽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갈증을 풀 수 있는 물이 있는데, 그 물을 불확실한 펌프에 부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 느낄 수 없는 것보다는 육신적인 감각을 먼저 생각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숨어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우리가 만났다.’고 했지만 도마는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의 손바닥과 옆구리를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심 많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더 넓은 세계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당면한 현실과 눈앞의 육신의 삶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간에 전하려는 말씀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일이 더없이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하지 않아야 할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환경, 당면한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영원한 저주의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자녀로 삼으신 것, 지금도 항상 함께하시며 기도를 들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 등등. 이러한 은혜는 값으로 환상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감사의 대상으로 잘 꼽히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당면한 육신의 현실을 먼저 생각합니다. 다행히 건강하고, 직장이나 사업이 그런대로 괜찮고 가정도 평안하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고, 건강도 좋지 않고, 모든 여건이 좋지 않다면 감사할 마음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인은 자신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사람들로 인하여 정말 큰 곤란의 지경에 처해서, 사람들을 보기조차 싫은 지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현실을 그대로 내려놓고 나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나를 택하신 것,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것,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일할 기회를 주신 것, 지금까지 가정과 모든 삶에 역사하시고 인도하신 것, 무엇보다도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은혜, 등등. 우리가 마지막 때를 만났을 때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게 될 이 은혜가 지금 느껴집니까? 혹 세상에 너무 찌들어버려서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지금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그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포함하는 시편 116편은 113-118편까지의 ‘애굽 할렐’(Egyptian Hallel)이라고 불립니다. 즉 출애굽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할렐루야 찬양’입니다. 이 시편들은 주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축제일에 불렸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축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6-7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라고 노래합니다. 이는 낮고 비천한 처지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후하게 대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옛말에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고 했습니다. 원수는 두고두고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물이 흘러가버리듯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감사’라는 히브리어 ‘yadah(hd:y:)’에는 ‘예배하다’는 뜻과 함께 ‘기억하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스스로 묻고는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스스로 답변을 합니다. 즉 감사의 제물을 드리며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겠다는 고백입니다.
만일 내가 어떤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도와주고, 일어서도록 힘이 되어 주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친구가 생활이 좋아지고 나서 나를 잊어버렸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결코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음에는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할지도 모르지요. 반면에 작은 도움을 입은 친구가 나의 이름을 기억해주고 ‘고마웠다.’고 이야기 한다면, 더 많이 도와주고 싶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주신 ‘열 명의 문둥병자’의 이야기처럼, 예수님께서도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 큰 것을 챙겨주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섭섭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감사를 드리겠습니까?
2.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서원을 갚는 것입니다.
본문 12-14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성도들 앞에서 서원을 갚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름을 부르며”라는 말은 ‘이름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을 의미하며, “서원을 갚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한 약속을 이행하고 완성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입니까?
이는 내게 이루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이루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자신이 그 일을 했음을 나타내고 자랑합니다. 오죽했으면 옛말에도 “잘 되면 자기 탓, 잘못 되면 조상 탓”이라고까지 했겠습니까. 또한 인류가 수많은 언어로 나누어지고 흩어지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를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으면서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다르게 하여 그들을 온 땅에 흩어버리셨습니다. 불행을 자초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헤롯 대왕입니다. 헤롯은 백성들이 아첨하여 높이는 말을 듣고는 자기를 드러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행전 12:22-23절에서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고 증언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가지고 온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6:7절에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하시며, 신명기 8:18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스스로 만들고 성취한 것처럼 자랑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16절에서는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10:17절에서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하십니다.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마치 나 자신이 얻고 이룬 것처럼 나타낸다면 하나님께서 빼앗으시고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내게 이루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서원을 갚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한 약속을 성도들 앞에서 이행하는 것입니다. 아마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기도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것이 서원인 줄도 모르고 하는 것을 봅니다.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5:4-6절을 봅시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라고 하시며 신명기 23:21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드리겠습니다.” 라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까? 오랜 시간이 지나서 잊어버렸다고 하나님도 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어려서 잘 몰라서 그랬다.’라고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앞에서 읽었던 전도서 5:6절에서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그것도 혼자서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앞에서 그 약속을 이행하라고 하십니다. 즉 확실한 이행을 말씀하십니다.
예전에 어떤 집사님이 부흥회를 하면서 교회당 건축헌금을 작정했습니다. 한 주간 두 주간 지나면서 마음에 부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집사님은 다른 교회로 가버렸습니다. 집사님은 이 교회만 떠나면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약속은 교회에 한 것도 아니요, 목사님에게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 끝까지 간다고 해서 하나님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구를 떠나도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한다면 나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약속한 물질이 얼마큼의 양인지는 몰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고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의 생명을 내놓는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삶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된 최소한의 염치이며 도리입니다. 시편 103:2-5절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삶을 삽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약속을 지키는 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시 103:17-18)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보답하는 삶을 이루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