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새 힘으로 일어서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596회 작성일 2007-11-04 20:56
*** 새 힘으로 일어서라. / 이사야 41:27-31

** 들어가는 말
이사야 40:27-31,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러분은 자신이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물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순리적인 사람입니까?
중세 시대에 ‘마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신앙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는 교회의 타락이 극도에 이르고 종교개혁의 바람이 일어나려고 할 때였습니다. 스위스 바젤(Basel)에 독실한 신앙인인 마틴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타락했던 당시의 교회의 권세가 두려워서 감히 그 깨달은 바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거나 주장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양피지(가죽종이)에 자신이 깨달은 바를 기록하여, 자기 집 거실의 벽돌 하나를 빼 내고 그 속에 넣어놓았습니다.
“오. 자비로우신 예수여. 나는 주님의 보혈 공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압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음을 압니다. 거룩하신 예수여. 나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바젤의 마틴이 써서 감추어둔 이 글은 약 200년 후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대의 독일에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은 후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의 주님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시인하셨는데. 왜 내가 세상의 군왕들 앞에서 나의 주님을 시인하기를 두려워하리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항의 개혁성명서를 붙였습니다. 다음날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만성절(萬聖節:All Saints’ Day)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는 목숨을 건 결단의 행동으로 개혁을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즉 남들이 시키든지 시키지 않든지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 시키기 전에는 잘 움직이지 않고 행동보다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성격들이 필요하고 서로 섞여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은 선천적인 성격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4:3-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봅시다.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요한복음 12:4절에서는 ‘가룟 유다’라고 밝힘)은 “그 비싼 향유를 왜 그렇게 낭비하느냐?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을 텐데!”라고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장정이 거의 일 년이나 벌어야 살 수 있는 비싼 향유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향유의 가치가 아니라, 그 행동의 가치를 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행동의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은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가룟 유다처럼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세상적인 만족을 보고 있다면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인 돈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부르신 영원한 나라를 보고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빌 3:8), 자신의 생명까지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행 20:24)’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경매장에서의 일입니다. 경매장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경매인은 여러 가지 물건을 경매에 붙였습니다. 잠시 후 경매인은 낡은 바이올린 하나를 끄집어내어 높이 치켜들고, 얼마라고 소리치자 모든 사람들이 킥킥대고 웃었습니다. 사실 그 바이올린은 너무 낡았고 아무런 가치가 없어보였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25,000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경매장이 갑자기 폭소하는 소리로 가득 찼으며, 사람들은 ‘그 값에 그 사람에게 주라.’고 떠들어댔습니다. 경매인은 잠시 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묘안을 짜냈습니다.
“혹 여기에 바이올린을 켜실 수 있는 분, 누가 이것을 켜 보시지 않겠습니까?”
잠시 침묵 후 사람 틈을 비집고 한 노인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 노인은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몇 번 활을 시험해 음을 맞추고 나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더니 노인은 그 낡은 악기로부터 너무나 황홀한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경매장 안은 그야말로 감동의 물결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격찬과 박수갈채로 온 경매장이 울렸습니다. 다시 경매인이 그 바이올린을 들고 값을 물었습니다.
“250만원”, “500만원”, 결국 ‘5억 원’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그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제품이었습니다.

같은 바이올린이 어떻게 그렇게 차이가 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바이올린을 볼품없고 별가치 없는 물질적인 가치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음악가의 손에서 연주된 소리를 듣고는 그 바이올린의 참 가치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작은 실패에도 두려워하고, 건강이 조금만 나빠져도 온갖 근심에 사로잡히고, 작은 일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부정적인 인생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웬만큼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서고, 은혜를 생각할 줄 알고,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긍정적인 인생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계속 유지해가는 일도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일이 힘들고, 하는 일들이 잘 되지 않고, 건강도 여의치 않고, 염려와 근심이 쌓일 때 일어선다는 것은 어렵고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본문말씀에는 이러한 인생이 넘어지고 자빠져지고, 피곤하고, 무능해질 때, 다시 일어서고 새 힘을 얻는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든 삶 속에서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여호와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갖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는 알은 체도 않으신다.)”고 불평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자세하게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치 “왜 나를 알지 못하느냐? 왜 나를 믿지 못하느냐? 나를 믿고 새 힘으로 일어서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어봅시다.

1. 사람이 어떤 경우에 넘어지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넘어지는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하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의심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이 내 사정을 모르신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은 내가 겪고 있는 원통한 일들을 모른 척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그들의 불신이며, 의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에 의심이 발동하면 주님이 곁에 서 계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 후, 실망에 빠져 고향인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를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걸으며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의심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24:15-16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 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내 곁에 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돕고 계시지만 믿음이 없고 의심으로 눈이 가리어지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불신과 의심의 결말은 삶의 패배이며 절망입니다.
또 하나 넘어지는 사람은 고백이 잘못된 사람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입을 잘못 놀리면 넘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항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내 사정은 하나님께 숨겨졌다.” 느니, “내 하나님은 내 원통한 사정을 수리해 주지 않으신다.” 느니, 원망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은 것입니다. 이런 넋두리가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십니까?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한 번 확인해봅시다. 민수기 14:26-3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두렵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두 가지 고백의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의 고백’이며, 다른 하나는 ‘불평과 원망의 고백’입니다. ‘감사’는 다시 일어서는 에너지이고, ‘원망’은 넘어뜨리는 에너지입니다. ‘넘어지는 사람들’과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니는 공통점은 ‘원망, 불평, 의심, 불신, 핑계 가 많다.’는 점입니다. 고린도전서 10:10절에서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혹시 부정적인 생각과 불평과 원망, 염려와 근심이라는 멸망의 재료로 인생을 채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사람이 어떻게 새 힘으로 일어설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일어서는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의 사람 ‘다윗’은 밧세바의 일로 넘어졌지만, 신앙으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사무엘하 12:13절에서,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끊어져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개를 통하여 죄 사함을 얻고 생명의 힘을 얻었습니다. 에베소서 4:22-24절에서도,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시며, 새 힘을 얻은 새 사람으로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을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새 삶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 습관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서 행동만 바꾸려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집안에 있는 거미줄은 지저분하고 보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막대기로 거미줄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거미줄이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미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거미줄을 없애려면 거미를 먼저 없애야 합니다. 거미가 없어지면 거미줄은 자연히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게 만드는 원인자인 옛사람의 성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성령의 충만으로 인한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으로 인한 새사람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성령의 뜻대로 따르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는 강력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소년과 장정이라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강력한 힘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서 “소년과 장정”은 ‘인간의 힘이 가장 강력할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은 이러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강력한 힘으로 고공으로 솟구치는 독수리처럼 강력한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처럼 새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앙망(仰望)한다’는 말은 ‘우러러 바란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의 어떤 소망을 하나님께서 이루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이 바램은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시선이나 관심의 초점이 하나님께로 고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시편 62:5-7절에서 시인은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리고 의지할 때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이곳저곳으로 도움을 구하러 다니고, 이사람 저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십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십시오. 열왕기나 역대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나라가 흥하고 평안이 있지만, 세상을 의지할 때는 전쟁과 두려움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의 위로를,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바라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소망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바꾸어야 할 자신의 삶이 있다면 담대한 용기와 믿음으로 바꿉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의 눈으로 용기 있게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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