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을 기대하십시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258회
작성일
2008-05-04 23:07
*** 응답을 기대하십시오. / 사도행전 12:1-5, 13-17
**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12:1-5, 13-17,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부부의 날 등. 가정의 결속을 위한 배려의 날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린아이들을 배려하는 어린이주일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미래이기도 한 어린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도록 장려하는 날입니다. 많은 가정에서 어린이들을 위하여 선물을 사주고 놀이공원에 가며, 하루를 아이들을 위하여 배려합니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이런 일회성의 행사보다는 어린이들을 성인과 똑같은 인격으로 대우하고, 생명을 존중해 주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배려일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예수님처럼 어린아이들의 영적인 생명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귀찮게 구는 아이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광경을 보시고 화가 나셔서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분히 여겨 / ajganaktevw (aganakteo)”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는 ‘to be angry’라고 번역했는데, ‘몹시 괴로워하다.’ ‘분개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한 말씀만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어른들보다 나은 믿음을 가졌던 ‘로데’라는 계집아이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가르침을 찾아보려합니다.
먼저,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시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정치는 로마 황제가 파송한 총독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효과적인 통치를 위하여 점령지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해 주는 일종의 ‘유화정책’을 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역인 이스라엘에는 ‘분봉 왕’제도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즉 실질적으로는 로마 총독이 통치했지만, 유대인들의 종교와 문화와 생활에 관하여는 분봉 왕이 다스리도록 허용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의 분봉 왕은 ‘헤롯’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죽이려고 박해했던 왕은‘대 헤롯’이었습니다. 대 헤롯 이후에는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서 세 아들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대 헤롯의 아들 중의 하나인 ‘헤롯 아그립바 2세’였습니다. 이 헤롯 아그립바가 사도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야고보는 사도로서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자 유대인들이 환영했습니다. 그러자 아그립바는 인기를 더 얻으려고 사도 베드로도 죽이려고 체포했습니다.
베드로가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초대교회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온 성도가 교회당으로 사용되었던 마가의 집에 모여서 밤을 새워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사도들이 죽으면 초대교회가 흔들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시작된 복음의 역사가 멈추도록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에게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본문 7절에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체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라고 했습니다. 자다가 일어난 베드로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도 못한 채 천사에게 이끌려 감옥을 벗어났습니다. 길에 나와서야 정신을 차린 베드로는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는 마가의 집으로 갔습니다.
한편 마가의 집에서는 성도들이 베드로의 구출을 위하여 온 밤을 새우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도들은 기도에 마음을 집중하느라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마침 ‘로데’라는 계집아이가 그 소리를 듣고는 대문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달라는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집으로 달려 들어가서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지금 베드로가 문 밖에 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네가 미쳤다.”며 믿지를 않았습니다. 아이는 진짜라고 흥분하여 말했지만, 사람들은 “그러면 그의 천사가 왔나보다.”라고 끝까지 불신했습니다. 계속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뛰어 나갔고, 정말 베드로가 왔음을 보고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여 내셨음을 알리고는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이 증언된 말씀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이곳에 기록하게 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의미들을 담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 기도에는 응답을 기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본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도대체 왜 기도하고 있었나?”라고 묻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게 믿지도 못할 일을 왜 기도하고 있었는지 의아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이러하지는 않습니까? 이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어느 읍내에 자그마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가까이에 있는 술집 때문에 온 성도들이 고민이었습니다. 시끄럽기도 하지만 풍기가 문란해서 도대체 아이들이나 성도들에게 덕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기도제목으로 내걸고 합심해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 술집이 장사가 안 되던지 불이라도 나서 없어지든지 어떻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회 때마다 합심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무섭게 천둥이 치며 비가 오는 어느 날, 그 술집에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벼락을 맞은 술집은 순식간에 불이 나고 무너져버렸습니다. 술집이 폐허가 된지 며칠 후, 교회 대표자 앞으로 ‘법원으로 출두하라.’는 법원 명령서가 배달되었습니다. 술집 주인이 교회를 법원에 고발한 것입니다. 사연인 즉, 술집 주인이 “교회가 술집에 불이 나도록 기도했기 때문에 벼락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법정에서 순회판사가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술집이 불타기를 기도했습니까?” 대표로 온 성도들은 “예 기도하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벼락을 맞았겠습니까?”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순회판사는 술집 주인에게 “당신은 정말 저 사람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불이 났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술집 주인은 “예, 저 사람들이 기도해서 불났습니다. 정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가 막힌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자신들이 기도하고도 ‘기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라고 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술집 주인은 ‘기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예화나 본문의 이야기에 나오는 성도들의 공통점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24절을 찾아봅시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고 구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라고 하십니까? “받은 줄로 믿으라.” 이 말씀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면, 그대로 된다.”고 하십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을 얻는 시점이 결코 미래가 아닙니다. ‘받을 줄로 믿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받은, lambavnw (lambano)”이라는 단어는 ‘취하다.’ ‘붙잡다.’라는 뜻을 가진 과거형 동사입니다. 즉 기도하는 순간에 이미 취했고, 붙잡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중언부언이며, 혼잣말의 중얼거림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의 결과를 기대하는 이‘기대’는 단순한 희망사항도 아닙니다. 즉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라는 요행을 바라는 듯한 반신반의(半信半疑)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요청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녀 된 성도들에게 허용하신 공급의 통로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으로 끝나거나, 영이 숨 쉬는 호흡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신 공식적인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요청할 수 있는 길이 기도입니다. 에베소서 3:12절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안에서 담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존재가 이 땅에는 없습니다. 로마서 8: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영적인 등불이자 명 설교가인 ‘챨스 스펄전’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런던 거리에서 옥외집회를 열도록 보냈습니다. 매일 집회가 끝나면 제자들이 상황을 보고하러 왔습니다. 어떤 제자는 성공했고, 어떤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젊은이가 풀이 죽은 채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스펄전 목사님, 나는 왜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옥외집회에 참석해서 충실히 설교도 하고 죽을 힘을 다했는데, 사람들에게 변화도 없고, 응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잠시 그 젊은이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영혼을 구원하시리라고 기대했습니까?” 그러자 젊은이는 당황해 하며 말했습니다. “아니죠. 그런 일은 거의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직 교육도 마치지 못했고, 다른 이들처럼 많은 은사와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것이 당신이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결과를 기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역사하지 않으십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입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초대교회의 ‘로데’라는 여자 아이는 자신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밤중에 대문 밖에서 ‘문을 열어 달라.’는 음성만 듣고도 베드로 사도임을 즉시 알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도에 열중하던 성도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 되어 그 결과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 사도를 옥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그 밤에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는 기도의 결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 고 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라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 즉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에게서 보신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순전한 마음’입니다.
아람나라의 문둥병자였던 나아만 장군을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인도했던 사람도 다름 아닌 포로로 잡혀 왔던 유대인 어린 여자아이였습니다. 열왕기하 5:2-3절입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이 아이도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주인을 엘리사에게로 인도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심어주어야 할 이유를 아시겠지요? 아직 세상적인 욕심이나 죄의 때가 묻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욕심과 사람의 꾀가 먼저 심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으로 끝나거나, 영이 숨 쉬는 호흡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녀 된 성도들에게 허용하신 공급의 통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신 공식적인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15절에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기도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기도입니다. 부모 된 사람들이 먼저 이런 믿음의 기도의 본을 보이고 자녀들에게 심어줍시다. 만일 우리 자녀들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얻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소유한 능력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기도와 순전한 믿음으로 구하는 것마다 얻게 되는 능력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12:1-5, 13-17,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부부의 날 등. 가정의 결속을 위한 배려의 날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린아이들을 배려하는 어린이주일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미래이기도 한 어린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도록 장려하는 날입니다. 많은 가정에서 어린이들을 위하여 선물을 사주고 놀이공원에 가며, 하루를 아이들을 위하여 배려합니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이런 일회성의 행사보다는 어린이들을 성인과 똑같은 인격으로 대우하고, 생명을 존중해 주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배려일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예수님처럼 어린아이들의 영적인 생명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귀찮게 구는 아이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광경을 보시고 화가 나셔서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분히 여겨 / ajganaktevw (aganakteo)”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는 ‘to be angry’라고 번역했는데, ‘몹시 괴로워하다.’ ‘분개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한 말씀만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어른들보다 나은 믿음을 가졌던 ‘로데’라는 계집아이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가르침을 찾아보려합니다.
먼저,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시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정치는 로마 황제가 파송한 총독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효과적인 통치를 위하여 점령지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해 주는 일종의 ‘유화정책’을 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역인 이스라엘에는 ‘분봉 왕’제도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즉 실질적으로는 로마 총독이 통치했지만, 유대인들의 종교와 문화와 생활에 관하여는 분봉 왕이 다스리도록 허용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의 분봉 왕은 ‘헤롯’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죽이려고 박해했던 왕은‘대 헤롯’이었습니다. 대 헤롯 이후에는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서 세 아들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대 헤롯의 아들 중의 하나인 ‘헤롯 아그립바 2세’였습니다. 이 헤롯 아그립바가 사도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야고보는 사도로서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자 유대인들이 환영했습니다. 그러자 아그립바는 인기를 더 얻으려고 사도 베드로도 죽이려고 체포했습니다.
베드로가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초대교회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온 성도가 교회당으로 사용되었던 마가의 집에 모여서 밤을 새워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사도들이 죽으면 초대교회가 흔들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시작된 복음의 역사가 멈추도록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에게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본문 7절에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체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라고 했습니다. 자다가 일어난 베드로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도 못한 채 천사에게 이끌려 감옥을 벗어났습니다. 길에 나와서야 정신을 차린 베드로는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는 마가의 집으로 갔습니다.
한편 마가의 집에서는 성도들이 베드로의 구출을 위하여 온 밤을 새우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도들은 기도에 마음을 집중하느라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마침 ‘로데’라는 계집아이가 그 소리를 듣고는 대문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달라는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집으로 달려 들어가서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지금 베드로가 문 밖에 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네가 미쳤다.”며 믿지를 않았습니다. 아이는 진짜라고 흥분하여 말했지만, 사람들은 “그러면 그의 천사가 왔나보다.”라고 끝까지 불신했습니다. 계속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뛰어 나갔고, 정말 베드로가 왔음을 보고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여 내셨음을 알리고는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이 증언된 말씀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이곳에 기록하게 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의미들을 담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 기도에는 응답을 기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본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도대체 왜 기도하고 있었나?”라고 묻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게 믿지도 못할 일을 왜 기도하고 있었는지 의아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이러하지는 않습니까? 이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어느 읍내에 자그마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가까이에 있는 술집 때문에 온 성도들이 고민이었습니다. 시끄럽기도 하지만 풍기가 문란해서 도대체 아이들이나 성도들에게 덕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기도제목으로 내걸고 합심해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 술집이 장사가 안 되던지 불이라도 나서 없어지든지 어떻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회 때마다 합심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무섭게 천둥이 치며 비가 오는 어느 날, 그 술집에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벼락을 맞은 술집은 순식간에 불이 나고 무너져버렸습니다. 술집이 폐허가 된지 며칠 후, 교회 대표자 앞으로 ‘법원으로 출두하라.’는 법원 명령서가 배달되었습니다. 술집 주인이 교회를 법원에 고발한 것입니다. 사연인 즉, 술집 주인이 “교회가 술집에 불이 나도록 기도했기 때문에 벼락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법정에서 순회판사가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술집이 불타기를 기도했습니까?” 대표로 온 성도들은 “예 기도하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벼락을 맞았겠습니까?”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순회판사는 술집 주인에게 “당신은 정말 저 사람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불이 났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술집 주인은 “예, 저 사람들이 기도해서 불났습니다. 정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가 막힌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자신들이 기도하고도 ‘기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라고 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술집 주인은 ‘기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예화나 본문의 이야기에 나오는 성도들의 공통점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24절을 찾아봅시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고 구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라고 하십니까? “받은 줄로 믿으라.” 이 말씀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면, 그대로 된다.”고 하십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을 얻는 시점이 결코 미래가 아닙니다. ‘받을 줄로 믿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받은, lambavnw (lambano)”이라는 단어는 ‘취하다.’ ‘붙잡다.’라는 뜻을 가진 과거형 동사입니다. 즉 기도하는 순간에 이미 취했고, 붙잡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중언부언이며, 혼잣말의 중얼거림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의 결과를 기대하는 이‘기대’는 단순한 희망사항도 아닙니다. 즉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라는 요행을 바라는 듯한 반신반의(半信半疑)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요청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녀 된 성도들에게 허용하신 공급의 통로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으로 끝나거나, 영이 숨 쉬는 호흡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신 공식적인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요청할 수 있는 길이 기도입니다. 에베소서 3:12절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안에서 담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존재가 이 땅에는 없습니다. 로마서 8: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영적인 등불이자 명 설교가인 ‘챨스 스펄전’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런던 거리에서 옥외집회를 열도록 보냈습니다. 매일 집회가 끝나면 제자들이 상황을 보고하러 왔습니다. 어떤 제자는 성공했고, 어떤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젊은이가 풀이 죽은 채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스펄전 목사님, 나는 왜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옥외집회에 참석해서 충실히 설교도 하고 죽을 힘을 다했는데, 사람들에게 변화도 없고, 응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잠시 그 젊은이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영혼을 구원하시리라고 기대했습니까?” 그러자 젊은이는 당황해 하며 말했습니다. “아니죠. 그런 일은 거의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직 교육도 마치지 못했고, 다른 이들처럼 많은 은사와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것이 당신이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결과를 기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역사하지 않으십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입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초대교회의 ‘로데’라는 여자 아이는 자신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밤중에 대문 밖에서 ‘문을 열어 달라.’는 음성만 듣고도 베드로 사도임을 즉시 알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도에 열중하던 성도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 되어 그 결과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 사도를 옥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그 밤에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는 기도의 결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 고 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라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 즉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에게서 보신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순전한 마음’입니다.
아람나라의 문둥병자였던 나아만 장군을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인도했던 사람도 다름 아닌 포로로 잡혀 왔던 유대인 어린 여자아이였습니다. 열왕기하 5:2-3절입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이 아이도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주인을 엘리사에게로 인도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심어주어야 할 이유를 아시겠지요? 아직 세상적인 욕심이나 죄의 때가 묻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욕심과 사람의 꾀가 먼저 심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으로 끝나거나, 영이 숨 쉬는 호흡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녀 된 성도들에게 허용하신 공급의 통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신 공식적인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15절에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기도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기도입니다. 부모 된 사람들이 먼저 이런 믿음의 기도의 본을 보이고 자녀들에게 심어줍시다. 만일 우리 자녀들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얻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소유한 능력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기도와 순전한 믿음으로 구하는 것마다 얻게 되는 능력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