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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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04-28 21:10
***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 누가복음 12:4-9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2:4-12,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여러분 중에 두려움이나 염려,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분이 있습니까? 아마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형태로든지 두려움이나 염려, 걱정이 있을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가지는 두려움을 조사해 보니, 첫째가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는 ‘질병’, 세 번째는 현재나 혹 앞날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 즉‘무지에 대한 두려움’이고, 네 번째는 혼자가 되는 ‘고독’, 다섯 번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순서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다섯 가지 중에서 몇 가지나 해당이 됩니까? 현대인들은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면서 자신이 뒤떨어지고, 소외되는 것과 온갖 범죄로 인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이 오염되면서 나타나는 현상 때문에 오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특히 ‘이러한 불행이 나 자신이나 가족들에게 닥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과 염려로 마음을 졸이면서 삽니다. 이러한 삶에 대한 두려움이 결국 염려와 근심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두려움에 대한 해결법은 없겠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해결법이 없다면 이렇게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요. 간단히 말해서 그 해결의 열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2:15절에서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인생의 삶에서 가장 민감하고 중심적인 두려움과 염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려합니다.
여러분이 영화를 보실 때에 ‘Paramount’라는 로고가 뜨는 것 보셨지요? 이것은‘Paramount Pictures’라고 하는 미국의 영화제작사 로고입니다. 이 회사의 회장은 ‘쉐리 랜싱(Sherry Lansing)’이라는 여성입니다. 이분은 밑바닥에서부터 수많은 경험과 노력으로 회장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이 유명한 랜싱 회장의 좌우명이 있는데, 사원들을 교육할 때 반드시 가르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과정을 즐겨라. 그리고 성공을 염려하지 말라.”
즉 ‘성공할까 실패할까를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즐겨라.’는 것입니다.
랜싱 회장이 삶의 태도에 대하여 핵심을 잘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잠언 20:24절에서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라고 했으며, 16:33절에서는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 수 없는 결과에 연연하여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살면 됩니다.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해도 결과를 알 수 없다면,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고 부탁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5:11절을 봅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염려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25-26절을 봅시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을 찾아봅시다.
1.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여온 그들의 삶의 문제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31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좋아서 당시의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었지만,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두려워하여 드러내어 따르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눈 밖에 나면 생활의 불이익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일 출교라도 당하게 되면 회당 공동체에서 쫓겨나게 되고, 유대인으로서의 생활 자체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 되었던 사람’의 이야기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되었던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바리새인들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찾아온 바리새인들에게 그 소경의 부모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는 예수님이 고쳐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대답했겠습니까? 9:22절에서 그 이유를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두려움을 알고 계셨으며, 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오늘의 우리도 어떤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결할 방법도 모르면서 두려워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기우(杞憂)라고 합니다. 기우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옛날 기 나라에 지나친 두려움과 걱정에 잠 못 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받침도 없이 떠 있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걱정을 안 어떤 사람이 그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하늘은 단지 기체가 쌓인 것뿐이어서 무너질 염려가 없다네. 당신이 행동하고 숨 쉬는 것은 종일 그 기체가 쌓여 있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무너질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그 기 나라의 사람이 이치를 깨달아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걱정’을 ‘기우(杞憂)’(기 나라 사람의 걱정)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걱정하는 것들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않고 있습니까? 적어도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당장 해결하거나 행동하지도 못할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마저 두려움과 염려에 빠져있음을 봅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마음속으로 꼽아보십시오. 먹고 사는 일이 걱정되고 두렵습니까? 불투명한 장래가 두렵습니까? 건강이나 죽음이 두렵습니까? 자녀들의 앞날이 걱정되고 두렵습니까? 노후의 생활이 걱정됩니까? 직장이나 사업이 실패할까 두렵습니까? 그러면 그 두려워하는 것이나 걱정거리들에 대한 해답은 가지고 있습니까?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실행하면 되는 것인데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두려워하거나 염려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6절에서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참새의 목숨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소멸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물며 고귀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생명이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당연히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특히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자녀로 대우하기도 하시며, 버리기도 하시며, 살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2. 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 7절을 봅시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신다니 이해가 됩니까? 이 말씀은 ‘나 자신도 모르는 나 자신의 모든 형편과 처지와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아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려움이나 염려와 근심을 해결하실 수 있으시며,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모든 필요까지도 채우실 수도 있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기도를 통하여 문제와 필요를 아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우리의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6-7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 치 앞도 모르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해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들을 두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또한 두렵고 염려가 되면서도 하나님께 아뢸 생각도 안 합니다. 이는 모두가 심각한‘불순종 병’입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만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염려하고 걱정하는 말을 한다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무능한 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거짓신앙입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야고보서 1:6-8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 이 모두는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일서 4:18절에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두려움과 염려는 불순종과 불신앙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 8-9절을 봅시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이 말씀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불신앙이기 때문에 형벌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염려와 두려움들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솔직한 마음을 아뢰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즈음 “올인(All-in)”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어느 방송국에서 방영한 한 드라마의 제목 때문에 유명해지더니, 사람들이 심심찮게 ‘올인’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원래 “모든 것을 다 건다.”는 뜻의 도박 용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어디서 사용되느냐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만큼은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면서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올인’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온전하게 책임지시고 인도하시고 다스리심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즐겁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두려움이 생기고 염려가 생기면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주어진 일에는 성실하고 정직하고 열심 있게 주께 하듯 사랑으로 행하면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작은 천국을 이루는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2:4-12,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여러분 중에 두려움이나 염려,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분이 있습니까? 아마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형태로든지 두려움이나 염려, 걱정이 있을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가지는 두려움을 조사해 보니, 첫째가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는 ‘질병’, 세 번째는 현재나 혹 앞날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 즉‘무지에 대한 두려움’이고, 네 번째는 혼자가 되는 ‘고독’, 다섯 번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순서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다섯 가지 중에서 몇 가지나 해당이 됩니까? 현대인들은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면서 자신이 뒤떨어지고, 소외되는 것과 온갖 범죄로 인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이 오염되면서 나타나는 현상 때문에 오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특히 ‘이러한 불행이 나 자신이나 가족들에게 닥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과 염려로 마음을 졸이면서 삽니다. 이러한 삶에 대한 두려움이 결국 염려와 근심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두려움에 대한 해결법은 없겠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해결법이 없다면 이렇게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요. 간단히 말해서 그 해결의 열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2:15절에서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인생의 삶에서 가장 민감하고 중심적인 두려움과 염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려합니다.
여러분이 영화를 보실 때에 ‘Paramount’라는 로고가 뜨는 것 보셨지요? 이것은‘Paramount Pictures’라고 하는 미국의 영화제작사 로고입니다. 이 회사의 회장은 ‘쉐리 랜싱(Sherry Lansing)’이라는 여성입니다. 이분은 밑바닥에서부터 수많은 경험과 노력으로 회장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이 유명한 랜싱 회장의 좌우명이 있는데, 사원들을 교육할 때 반드시 가르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과정을 즐겨라. 그리고 성공을 염려하지 말라.”
즉 ‘성공할까 실패할까를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즐겨라.’는 것입니다.
랜싱 회장이 삶의 태도에 대하여 핵심을 잘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잠언 20:24절에서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라고 했으며, 16:33절에서는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 수 없는 결과에 연연하여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살면 됩니다.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해도 결과를 알 수 없다면,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고 부탁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5:11절을 봅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염려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25-26절을 봅시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을 찾아봅시다.
1.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여온 그들의 삶의 문제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31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좋아서 당시의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었지만,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두려워하여 드러내어 따르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눈 밖에 나면 생활의 불이익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일 출교라도 당하게 되면 회당 공동체에서 쫓겨나게 되고, 유대인으로서의 생활 자체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 되었던 사람’의 이야기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되었던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바리새인들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찾아온 바리새인들에게 그 소경의 부모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는 예수님이 고쳐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대답했겠습니까? 9:22절에서 그 이유를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두려움을 알고 계셨으며, 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오늘의 우리도 어떤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결할 방법도 모르면서 두려워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기우(杞憂)라고 합니다. 기우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옛날 기 나라에 지나친 두려움과 걱정에 잠 못 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받침도 없이 떠 있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걱정을 안 어떤 사람이 그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하늘은 단지 기체가 쌓인 것뿐이어서 무너질 염려가 없다네. 당신이 행동하고 숨 쉬는 것은 종일 그 기체가 쌓여 있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무너질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그 기 나라의 사람이 이치를 깨달아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걱정’을 ‘기우(杞憂)’(기 나라 사람의 걱정)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걱정하는 것들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않고 있습니까? 적어도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당장 해결하거나 행동하지도 못할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마저 두려움과 염려에 빠져있음을 봅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마음속으로 꼽아보십시오. 먹고 사는 일이 걱정되고 두렵습니까? 불투명한 장래가 두렵습니까? 건강이나 죽음이 두렵습니까? 자녀들의 앞날이 걱정되고 두렵습니까? 노후의 생활이 걱정됩니까? 직장이나 사업이 실패할까 두렵습니까? 그러면 그 두려워하는 것이나 걱정거리들에 대한 해답은 가지고 있습니까?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실행하면 되는 것인데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두려워하거나 염려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6절에서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참새의 목숨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소멸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물며 고귀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생명이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당연히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특히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자녀로 대우하기도 하시며, 버리기도 하시며, 살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2. 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 7절을 봅시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신다니 이해가 됩니까? 이 말씀은 ‘나 자신도 모르는 나 자신의 모든 형편과 처지와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아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려움이나 염려와 근심을 해결하실 수 있으시며,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모든 필요까지도 채우실 수도 있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기도를 통하여 문제와 필요를 아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우리의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6-7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 치 앞도 모르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해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들을 두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또한 두렵고 염려가 되면서도 하나님께 아뢸 생각도 안 합니다. 이는 모두가 심각한‘불순종 병’입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만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염려하고 걱정하는 말을 한다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무능한 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거짓신앙입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야고보서 1:6-8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 이 모두는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일서 4:18절에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두려움과 염려는 불순종과 불신앙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 8-9절을 봅시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이 말씀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불신앙이기 때문에 형벌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염려와 두려움들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솔직한 마음을 아뢰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즈음 “올인(All-in)”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어느 방송국에서 방영한 한 드라마의 제목 때문에 유명해지더니, 사람들이 심심찮게 ‘올인’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원래 “모든 것을 다 건다.”는 뜻의 도박 용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어디서 사용되느냐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만큼은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면서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올인’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온전하게 책임지시고 인도하시고 다스리심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즐겁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두려움이 생기고 염려가 생기면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주어진 일에는 성실하고 정직하고 열심 있게 주께 하듯 사랑으로 행하면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작은 천국을 이루는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