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자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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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04-21 22:10
*** 은혜의 자리 / 사도행전 20:7-12
**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20:4-12, “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어느 성도가정에서 오랜만에 가정예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성경을 읽지 않아서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가 “엄마, 이 성경책은 누구의 책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야 물론 하나님의 책이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그러면 이 책 하나님께 돌려 드리세요.”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웃으면서 “이 책은 엄마거야.”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그게 아니라. 읽지도 않는데 가지고 있으면 뭐해요 그냥 돌려드리세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구원의 길과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의 말씀이 있음도 압니다. 히브리서 4:12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는 말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능력의 말씀이며,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할지라도 읽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 하여 읽고, 깨닫게 하시는 대로 순종할 때에 능력이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32:46절에서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복을 받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고 깨달을 때는 ‘그렇게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막상 지나고 나면 잊어버립니다. 아마도 고의적으로 잊어버리려고 하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바쁘게 살다 보니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마치 양들의 습성과 비슷합니다. 양들은 길을 잘 잃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양들도 고의적으로 목자의 인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양들은 풀을 뜯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양들은 단순히 앞에 보이는 풀만 따라가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성 때문에 양들은 쉽게 길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바쁜 생활을 하다보면 일에 쫓겨 다니다가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27절에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쁘게 살면서 잊어버리고 사는 너무나 중요한 것을 다시 찾아보려 합니다. 앞의 예화처럼 혹시 여러분의 성경책도 먼지가 쌓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일에 한 번 교회에 다녀오고는 책상에 고이 모셔져 있지는 않습니까? 숱한 삶의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답과 능력이 들어있는 말씀을 잊어버리고, 헛된 세상에 매달려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0:13절에서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사도행전17:11절에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의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라고 증언합니다. 이 베뢰아 사람들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대부분 말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시간의 본문의 내용도 그러한 열정을 반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유두고’라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이 청년은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출연하고, 한 마디의 대사도 없습니다. 그의 등장 모습은, 삼층 창문에 걸터앉아서 졸고 있다가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에 의하여 다시 살림을 받는 광경이 이 청년에 대한 전부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울 일행이 연초의 무교절 절기 후에 ‘드로아’에 도착해서, 일주일을 머물면서 드로아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안식 후 첫날, 즉 지금의 주일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는 어느 가정의 윗 다락에서 열렸습니다. 윗 다락이란? 일층이 주거 공간이고, 주거 공간 위에 다락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윗 다락은 2층을 이루는 다락방의 또 다른 다락방입니다. 이 윗 다락은 그리 넓지 않은 곳이며, 삼층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바울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예배 처소를 미처 마련하지 못하여 임시로 빌린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없도록 많이 모였습니다. 이는 드로아 교회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두고 라는 청년은 늦게 들어온 까닭에, 앉을 자리가 없어서 겨우 창문턱에 걸터앉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곳에 앉아서 깊이 졸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무척 피곤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로 보아 이 청년은 아마도 당시의 노예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의 이름도 당시의 노예들에게 흔히 붙여졌던 이름입니다. 유두고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육체적인 노동으로 인하여 피곤한 육신을 가지고도 말씀을 들으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초대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비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노동이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주 1일 휴무제가 실시되기 전이었고,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노예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힘든 일에 시달리다가 참석한 저녁 집회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회는 그런 것에는 상관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습니다. 한 밤중이 되자 유두고는 엄습해 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는 창밖으로 떨어졌고 사람들이 놀라서 뛰어 내려갔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모였던 성도들은 살아 있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1.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다락에 모인 성도들은 삶에 지친 피곤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밤늦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곧 드로아 교회 성도들이 모인 그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였습니다. 드로아 교회의 성도나 청년 유두고는 육신의 쾌락이나 육신적인 유익을 얻으려는 자리가 아닌,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 있는 은혜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가 있는 산으로 가야하고,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가 있는 강이나 바다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1:1절에서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원한다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와야 합니다. 진정으로 복을 받고 싶다면 복이 주어지는 자리에 열심히 나아와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거나, 직분자로, 일군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특징 있는 공통점 하나는 ‘열정’과 ‘열심’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인데, 하나님께서 일을 경영하시는 모습이 ‘열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9:7절에서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2:17절에서는 예수님의 열정에 대하여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11:2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열정을,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12:11절에서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성도들에게도 영적인 열정을 가질 것을 가르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 길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에 열정으로 다가와야 함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에 우리의 자리를 펴야 합니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들이 너의 흰빛을 시샘하나니,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이 시조 많이 들어보셨지요? 이 시조는 고려말기 충신이었던 정몽주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문병 가던 날, 팔순이 가까운 그의 노모가 ‘간밤의 꿈이 흉하니 가지 말라.’고, 문 밖까지 따라 나와 아들을 말리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그러나 정몽주는 결국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에게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도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 머물러야 할 곳과 떠나야 할 곳을 잘 분별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1:1-2절을 봅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도들이 어떤 자리에 머물러야 하며,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을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드로아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유두고도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새 생명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세상일에 빠져서 그런 사고를 당했다면 새 생명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번거로운 시대를 사는 성도는 특별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해야 할 것도 많고, 생각해야 할 일도 많고, 정말 머리가 터질 정도로 피곤하고 바쁘게 살아갑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분별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가야 할 곳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지만 정말 생명이 되고, 은혜가 되고, 복이 되는 일을 찾아야 하며,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에 자리를 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총은 받은 사람들은 특별한 능력이나 힘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107:9절에서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육신적인 즐거움과 이익이 있는 곳에 자리를 펴고 있습니까? 세상일에 피곤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예배와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참석할 수가 없습니까? 세상일이 염려 되어 하나님의 일에 열정을 가질 수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를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 강같이 흐르는 곳에 자리를 펴십시오. 야고보서 4:14-17절을 읽어봅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은혜의 자리에 머물기를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영원히 받을 수 없습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 받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형통의 복을 원한다면 열정을 가지고 은혜가 임하는 예배와 말씀이 있는 곳에 자리를 펴십시오. 하나님께서 마태복음 7:8절에서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명백하게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에 열정으로 참여함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20:4-12, “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어느 성도가정에서 오랜만에 가정예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성경을 읽지 않아서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가 “엄마, 이 성경책은 누구의 책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야 물론 하나님의 책이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그러면 이 책 하나님께 돌려 드리세요.”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웃으면서 “이 책은 엄마거야.”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그게 아니라. 읽지도 않는데 가지고 있으면 뭐해요 그냥 돌려드리세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구원의 길과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의 말씀이 있음도 압니다. 히브리서 4:12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는 말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능력의 말씀이며,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할지라도 읽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 하여 읽고, 깨닫게 하시는 대로 순종할 때에 능력이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32:46절에서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복을 받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고 깨달을 때는 ‘그렇게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막상 지나고 나면 잊어버립니다. 아마도 고의적으로 잊어버리려고 하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바쁘게 살다 보니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마치 양들의 습성과 비슷합니다. 양들은 길을 잘 잃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양들도 고의적으로 목자의 인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양들은 풀을 뜯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양들은 단순히 앞에 보이는 풀만 따라가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성 때문에 양들은 쉽게 길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바쁜 생활을 하다보면 일에 쫓겨 다니다가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27절에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쁘게 살면서 잊어버리고 사는 너무나 중요한 것을 다시 찾아보려 합니다. 앞의 예화처럼 혹시 여러분의 성경책도 먼지가 쌓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일에 한 번 교회에 다녀오고는 책상에 고이 모셔져 있지는 않습니까? 숱한 삶의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답과 능력이 들어있는 말씀을 잊어버리고, 헛된 세상에 매달려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0:13절에서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사도행전17:11절에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의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라고 증언합니다. 이 베뢰아 사람들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대부분 말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시간의 본문의 내용도 그러한 열정을 반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유두고’라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이 청년은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출연하고, 한 마디의 대사도 없습니다. 그의 등장 모습은, 삼층 창문에 걸터앉아서 졸고 있다가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에 의하여 다시 살림을 받는 광경이 이 청년에 대한 전부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울 일행이 연초의 무교절 절기 후에 ‘드로아’에 도착해서, 일주일을 머물면서 드로아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안식 후 첫날, 즉 지금의 주일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는 어느 가정의 윗 다락에서 열렸습니다. 윗 다락이란? 일층이 주거 공간이고, 주거 공간 위에 다락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윗 다락은 2층을 이루는 다락방의 또 다른 다락방입니다. 이 윗 다락은 그리 넓지 않은 곳이며, 삼층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바울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예배 처소를 미처 마련하지 못하여 임시로 빌린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없도록 많이 모였습니다. 이는 드로아 교회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두고 라는 청년은 늦게 들어온 까닭에, 앉을 자리가 없어서 겨우 창문턱에 걸터앉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곳에 앉아서 깊이 졸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무척 피곤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로 보아 이 청년은 아마도 당시의 노예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의 이름도 당시의 노예들에게 흔히 붙여졌던 이름입니다. 유두고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육체적인 노동으로 인하여 피곤한 육신을 가지고도 말씀을 들으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초대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비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노동이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주 1일 휴무제가 실시되기 전이었고,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노예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힘든 일에 시달리다가 참석한 저녁 집회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회는 그런 것에는 상관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습니다. 한 밤중이 되자 유두고는 엄습해 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는 창밖으로 떨어졌고 사람들이 놀라서 뛰어 내려갔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모였던 성도들은 살아 있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1.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다락에 모인 성도들은 삶에 지친 피곤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밤늦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곧 드로아 교회 성도들이 모인 그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였습니다. 드로아 교회의 성도나 청년 유두고는 육신의 쾌락이나 육신적인 유익을 얻으려는 자리가 아닌,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 있는 은혜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가 있는 산으로 가야하고,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가 있는 강이나 바다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1:1절에서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원한다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와야 합니다. 진정으로 복을 받고 싶다면 복이 주어지는 자리에 열심히 나아와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거나, 직분자로, 일군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특징 있는 공통점 하나는 ‘열정’과 ‘열심’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인데, 하나님께서 일을 경영하시는 모습이 ‘열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9:7절에서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2:17절에서는 예수님의 열정에 대하여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11:2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열정을,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12:11절에서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성도들에게도 영적인 열정을 가질 것을 가르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 길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에 열정으로 다가와야 함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에 우리의 자리를 펴야 합니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들이 너의 흰빛을 시샘하나니,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이 시조 많이 들어보셨지요? 이 시조는 고려말기 충신이었던 정몽주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문병 가던 날, 팔순이 가까운 그의 노모가 ‘간밤의 꿈이 흉하니 가지 말라.’고, 문 밖까지 따라 나와 아들을 말리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그러나 정몽주는 결국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에게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도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 머물러야 할 곳과 떠나야 할 곳을 잘 분별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1:1-2절을 봅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도들이 어떤 자리에 머물러야 하며,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을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드로아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유두고도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새 생명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세상일에 빠져서 그런 사고를 당했다면 새 생명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번거로운 시대를 사는 성도는 특별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해야 할 것도 많고, 생각해야 할 일도 많고, 정말 머리가 터질 정도로 피곤하고 바쁘게 살아갑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분별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가야 할 곳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지만 정말 생명이 되고, 은혜가 되고, 복이 되는 일을 찾아야 하며,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에 자리를 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총은 받은 사람들은 특별한 능력이나 힘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107:9절에서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육신적인 즐거움과 이익이 있는 곳에 자리를 펴고 있습니까? 세상일에 피곤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예배와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참석할 수가 없습니까? 세상일이 염려 되어 하나님의 일에 열정을 가질 수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를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 강같이 흐르는 곳에 자리를 펴십시오. 야고보서 4:14-17절을 읽어봅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은혜의 자리에 머물기를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영원히 받을 수 없습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 받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형통의 복을 원한다면 열정을 가지고 은혜가 임하는 예배와 말씀이 있는 곳에 자리를 펴십시오. 하나님께서 마태복음 7:8절에서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명백하게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에 열정으로 참여함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