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남길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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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04-14 22:51
*** 무엇을 남길까? / 딤후 4:1-8
** 들어가는 말
디모데후서 4:1-8,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우리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예외 없이 삶의 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짧은 인생이든, 긴 인생이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자신의 삶의 여운을 남기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여행자가 세계를 여행하다가 어느 공동묘지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죽었다.’라는 글이 새겨진 묘비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남길 것이 없었으면 그렇게 썼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어떤 여운을 남겼을까요? 사도행전 1:24-25절에서 가룟 유다 대신에 사도의 자리를 채울 사람을 뽑으면서 기도한 내용이 이렇습니다.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가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남긴 여운은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을 남겼습니까? 여러분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여운이 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의사로서 목회의 길을 걸었던 신앙의 거장 ‘D.M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목회하셨습니다. 존스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 한 후배와의 이야기 중에 후배로부터 “일생동안 목사님의 마음을 이끌었던 생각이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평생 동안에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엄숙한 생각은 ‘내 삶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모든 인생이 일평생 생각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신의 모든 말과 행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결코 자신의 생애를 아무렇게나 살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열정적이고 위대한 설교자와 목회자로 일생을 헌신하게 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항상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관한 말씀인 마태복음 7:21-23절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만 생각하면 결코 함부로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평소에는 사느라 무관심했던 것이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인생의 과제인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에 배경을 살펴봅시다.
디모데 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입니다. 목회서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목회자가 교회를 감독하고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 갖추어야 할 지침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는 사도 바울이 마지막 전도여행지인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생애 마지막 때에 쓴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6-8절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와 이단들의 침투로 인하여 교회가 많이 어려울 것을 생각하면서 믿음을 굳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한 아직 나이가 어린 디모데가 지혜롭게 행하여 신앙을 지도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습니다. 특히 교회에 불어 닥칠 핍박의 바람을 염려하면서 진실한 신앙을 지킬 수 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도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엄격한 명령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디모데에게 다가올 심판을 상기시키면서, ‘주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 심판의 때에는 하나님께 자기의 행한 것을 보고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힘쓰고 권장해야 할 것과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할 것과 용기를 주고 일깨워야 할 것과 각오해야 할 것들을 엄격한 명령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한 명령으로 전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절대적인 행위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애를 고백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합니까?
1. 이처럼 엄격하게 명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라고합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근거로 제시하면서까지 엄격하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엄격하게 명령하는 것입니까? 본문 3-4절을 봅시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세속화 되어 가는 것과 이단의 세력들이 침투해 오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면, 형식적인 신자들이 복음진리에 대해서 싫증을 낼 것이고,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해주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함으로서 세속화 되어 가도록 만드는 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십시오. 이 시대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제자의 길에 대하여는 외면합니다. 나누고 베풀고 섬기고 봉사하는 사랑의 삶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마지못해 하거나, 행사적으로 추진할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했습니다. 이사야 29:13절에서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셔서 바리새인들과 외식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 15:7-9).
이 시대의 사람들은 ‘복 받는다.’, ‘잘 된다.’, ‘형통하게 될 것이다.’, ‘평안과 위로의 말’등. 거짓말이든 참말이든 따지지 않고 긍정적인 말을 듣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마치 독약을 보약이라고 말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서 나라에는 멸망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풍전등화(風前燈火)’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가 살려면 우상을 버리고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경고하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경고하는 선지자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라.’고 요구하면서, 돌이키기를 거부했습니다. 예레미야 18:18절에서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지만 주의하여 실천하기를 싫어합니다.
이러한 불순종이 두려운 것은 그 결과가 ‘하나님의 외면’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19절에서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시며, 4:18절에서는 “네 길과 행사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너의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이 세대가 추구하는 세상적인 욕망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고통과 패망이기 때문에 엄격하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무엇을 남겨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2절과 5절의 말씀입니다.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이 말씀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시대적인 현상으로 두려워 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맡겨진 직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직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더 나아가 목회자로서의 직무를 말합니다. 즉 목회자로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권장하는 일입니다. 이는 열정을 가지고 전심으로 이 일을 행하라는 말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말은 ‘어떤 특별한 기회가 주어지게 될 때’와 ‘특별한 기회는 아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직무를 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 없이 이 땅에 보내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은사인 재능을 주시고 그 은사를 잘 활용하여 각자의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10절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시고, 로마서 12:6-8절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은사를 사용하는 자세까지 가르치십니다. 모든 성도는 이렇게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달란트)를 활용하여 이익인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내 놓아야 할 달란트이며 남겨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삶을 예로 들어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미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관제란 제물에 술을 붓는 제사를 말합니다. 즉 관제를 드리는 마지막 순서인 술을 붓는 것처럼, 바울 자신이 그렇게 부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마지막 때를 암시하는 것이며, 이 마지막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모든 사명을 다 이루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남겨야 할 것이 완전하게 준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숱한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자신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사명에 합당한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화로운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남겨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잠언 16:30절에서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15세기 중국의 철학자인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은 “산중에 있는 도적은 이기기 쉬우나 자기 마음속에 있는 도적은 이기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을 통치하던 피터 제독은 “내가 러시아 제국은 능히 다스릴 수 있으나 내 마음은 내가 능히 다스릴 수가 없구나.”라고 탄식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정말 육신의 욕망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번번이 세상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육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만 지나면 결국 로마서 8:12-13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십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이 무엇을 남길까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무엇을 내놓을지를 생각하면서 주어진 은사와 생명의 시간들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사명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디모데후서 4:1-8,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우리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예외 없이 삶의 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짧은 인생이든, 긴 인생이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자신의 삶의 여운을 남기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여행자가 세계를 여행하다가 어느 공동묘지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죽었다.’라는 글이 새겨진 묘비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남길 것이 없었으면 그렇게 썼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어떤 여운을 남겼을까요? 사도행전 1:24-25절에서 가룟 유다 대신에 사도의 자리를 채울 사람을 뽑으면서 기도한 내용이 이렇습니다.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가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남긴 여운은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을 남겼습니까? 여러분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여운이 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의사로서 목회의 길을 걸었던 신앙의 거장 ‘D.M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목회하셨습니다. 존스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 한 후배와의 이야기 중에 후배로부터 “일생동안 목사님의 마음을 이끌었던 생각이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평생 동안에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엄숙한 생각은 ‘내 삶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모든 인생이 일평생 생각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신의 모든 말과 행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결코 자신의 생애를 아무렇게나 살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열정적이고 위대한 설교자와 목회자로 일생을 헌신하게 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항상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관한 말씀인 마태복음 7:21-23절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만 생각하면 결코 함부로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평소에는 사느라 무관심했던 것이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인생의 과제인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에 배경을 살펴봅시다.
디모데 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입니다. 목회서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목회자가 교회를 감독하고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 갖추어야 할 지침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는 사도 바울이 마지막 전도여행지인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생애 마지막 때에 쓴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6-8절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와 이단들의 침투로 인하여 교회가 많이 어려울 것을 생각하면서 믿음을 굳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한 아직 나이가 어린 디모데가 지혜롭게 행하여 신앙을 지도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습니다. 특히 교회에 불어 닥칠 핍박의 바람을 염려하면서 진실한 신앙을 지킬 수 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도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엄격한 명령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디모데에게 다가올 심판을 상기시키면서, ‘주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 심판의 때에는 하나님께 자기의 행한 것을 보고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힘쓰고 권장해야 할 것과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할 것과 용기를 주고 일깨워야 할 것과 각오해야 할 것들을 엄격한 명령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한 명령으로 전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절대적인 행위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애를 고백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합니까?
1. 이처럼 엄격하게 명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라고합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근거로 제시하면서까지 엄격하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엄격하게 명령하는 것입니까? 본문 3-4절을 봅시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세속화 되어 가는 것과 이단의 세력들이 침투해 오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면, 형식적인 신자들이 복음진리에 대해서 싫증을 낼 것이고,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해주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함으로서 세속화 되어 가도록 만드는 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십시오. 이 시대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제자의 길에 대하여는 외면합니다. 나누고 베풀고 섬기고 봉사하는 사랑의 삶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마지못해 하거나, 행사적으로 추진할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했습니다. 이사야 29:13절에서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셔서 바리새인들과 외식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 15:7-9).
이 시대의 사람들은 ‘복 받는다.’, ‘잘 된다.’, ‘형통하게 될 것이다.’, ‘평안과 위로의 말’등. 거짓말이든 참말이든 따지지 않고 긍정적인 말을 듣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마치 독약을 보약이라고 말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서 나라에는 멸망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풍전등화(風前燈火)’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가 살려면 우상을 버리고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경고하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경고하는 선지자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라.’고 요구하면서, 돌이키기를 거부했습니다. 예레미야 18:18절에서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지만 주의하여 실천하기를 싫어합니다.
이러한 불순종이 두려운 것은 그 결과가 ‘하나님의 외면’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19절에서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시며, 4:18절에서는 “네 길과 행사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너의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이 세대가 추구하는 세상적인 욕망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고통과 패망이기 때문에 엄격하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무엇을 남겨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2절과 5절의 말씀입니다.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이 말씀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시대적인 현상으로 두려워 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맡겨진 직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직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더 나아가 목회자로서의 직무를 말합니다. 즉 목회자로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권장하는 일입니다. 이는 열정을 가지고 전심으로 이 일을 행하라는 말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말은 ‘어떤 특별한 기회가 주어지게 될 때’와 ‘특별한 기회는 아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직무를 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 없이 이 땅에 보내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은사인 재능을 주시고 그 은사를 잘 활용하여 각자의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10절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시고, 로마서 12:6-8절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은사를 사용하는 자세까지 가르치십니다. 모든 성도는 이렇게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달란트)를 활용하여 이익인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내 놓아야 할 달란트이며 남겨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삶을 예로 들어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미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관제란 제물에 술을 붓는 제사를 말합니다. 즉 관제를 드리는 마지막 순서인 술을 붓는 것처럼, 바울 자신이 그렇게 부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마지막 때를 암시하는 것이며, 이 마지막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모든 사명을 다 이루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남겨야 할 것이 완전하게 준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숱한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자신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사명에 합당한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화로운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남겨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잠언 16:30절에서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15세기 중국의 철학자인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은 “산중에 있는 도적은 이기기 쉬우나 자기 마음속에 있는 도적은 이기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을 통치하던 피터 제독은 “내가 러시아 제국은 능히 다스릴 수 있으나 내 마음은 내가 능히 다스릴 수가 없구나.”라고 탄식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정말 육신의 욕망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번번이 세상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육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만 지나면 결국 로마서 8:12-13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십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이 무엇을 남길까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무엇을 내놓을지를 생각하면서 주어진 은사와 생명의 시간들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사명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