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314회
작성일
2008-04-07 22:48
***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때 / 약 1:22-25, 단 10:10-12
** 들어가는 말
야고보서 1:22-25,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다니엘 10:10-12, “10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11 내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매 12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주먹대장이었던 김익두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목사님이 시골마을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중에, 어떤 청년이 전도를 방해하면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대들었습니다. 목사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자신이 애써 길러놓은 농작물에 벼락이 떨어져서 불타버렸다.’고 하면서 “나쁜 사람도 많은데 왜 곡식에 벼락을 때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없다.’고 악을 썼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은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너 소학교는 나왔지?” “그럼요” “공부할 때 너희들이 장난치거나, 졸거나, 떠들 때면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지휘봉으로 흑판을 때리지 않더냐? 그 흑판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때리느냐? 아니다. 그것은 경고다. 계속 떠들고, 장난치고, 졸면 이렇게 때리겠다는 경고용 본보기이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너의 농작물에 벼락을 내리신 것은 너에 대하여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이 말을 들은 청년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목사님의 비유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날, 베다니 마을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였습니다. 배고픔을 느끼신 예수님이 길 가에 있는 잎이 무성한 큰 무화과나무를 보았습니다. 혹 무화과열매가 있을까 해서 가셨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막11:14)고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성전 입구에는 돈 바꾸는 사람들과 제물용 짐승을 파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성전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상인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짐승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예수님은 제자들과 숙소가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어제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 있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더욱이 유월절이 가까운 4월은 무화과를 수확하는 철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했겠습니까? 이는 자신의 목적에서 벗어난 예루살렘 성전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사건을 중심에 두고 무화과나무의 이야기를 앞뒤로 배치한 것입니다. 즉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말라 죽듯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전 또한 그렇게 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실 무화과나무는 잎과 동시에 작은 열매가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수확할 정도로 성숙한 열매는 아니라 할지라도 자라는 열매는 있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도 성숙해가는 신앙의 모습들이 보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기도 소리가 아니라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북적거리고 흥정하는 사람들의 소리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경고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결심하고 순복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었듯이, 주후 70년 경 로마에 의하여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원인은 하나님의 뜻에 결단하고 순복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곳의 본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순복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은총’입니다. 만일 예루살렘 성전과 성도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되기로 결단하고 순종했다면 결코 무너지고 멸망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막대기로 칠판을 탁탁 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말라 죽게 하신 것이나 모두 경고하는 표현입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환경과 사건들을 통하여 불순종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매 없는 삶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누가복음 13:1-5절에 그 시대에 일어났던 두 사건이 나옵니다. 살해당한 갈릴리 사람들의 사건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깔려 죽은 사건입니다. 그 중에서 두 번째 사건인 4-5절입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나님의 경고의 표현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재빨리 결심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계속 버티거나 결단을 머뭇거린다면 어느 날 갑자기 징벌의 덫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학자이며, 목회자였던 ‘에드워즈’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목회하던 교구 내에 술주정뱅이에, 도박꾼에, 타락한 생활을 하는 중년 남자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 사람이 이른 아침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에드워즈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왜 이른 아침에 그렇게 겁먹은 얼굴로 급하게 찾아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지난밤에 꾸었던 꿈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꿈속에서 천사가 “너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일 년 후 오늘에 너를 불러가겠다.” 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그 날부터 술도 끊고, 도박도 끊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동안 그렇게 신앙생활을 착실하게 하는 가 했는데, 몇 개월 지나면서 교회 출석이 뜸해지고 점점 열심이 식어갔습니다. 그리고 술도 다시 조금씩 마시고, 도박도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찾아가서 권면하고, 그가 보았던 꿈의 환상을 회상시켜 주었지만, 그 남자는 “글쎄요! 글쎄요!” 하면서 더욱 교회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남자는 완전히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권면하면 반항적으로 나오면서
“무얼요. 그런 개꿈을 가지고 두렵게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날도 술에 만취되어 술집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서 굴러 떨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목사님이 상담노트를 찾아보니, 그날이 바로 일 년 전 그 남자가 자신을 찾아온 날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신앙의 삶은 한 번 ‘믿겠다.’고 결단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매 순간순간 결단하고 순종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때를 결단하는 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니엘 10:12절에서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다니엘이 어린아이일 때에 하나님의 징계로 나라가 멸망당하고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로 바벨론의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후에 나라가 ‘바사’로 바뀌었을 때에는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바사왕 고레스 3년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무서운 전쟁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다니엘은 환상의 의미를 깨닫고 슬픔에 빠져 21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금식이 끝나는 21일 째에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다니엘을 천사가 깨웠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고 하나님의 응답을 가지고 왔음을 알렸습니다.
이 일보다 몇 년 앞에도 역시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9장의 내용입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들을 읽다가 자기 백성이 이렇게 포로생활을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신의 선조들의 죄악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결국 70년 동안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니엘은 즉시 금식하며 자신과 민족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천사장인 가브리엘이 저녁 예배 시간에 다니엘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 말씀 속에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두 곳 모두 현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순복하기를 결심하고 겸손하게 엎드린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심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진 시점을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살피십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말과 나타나는 행동으로 그 사람을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생각을 살피시며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마음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을 간절하게 사모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결단만큼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본문처럼 깨달은 말씀을 결단하고, 결단한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5절의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는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하고 결단을 하더라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국의 중세 학자인 ‘루이스(C.S.Lewis, 1898-1963)’가 쓴 ‘악마의 편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영국의 노신사가 어느 날 대영제국의 도서관을 찾아갑니다. 그 노신사는 습관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 들르곤 했는데, 그 날도 습관에 의하여 도서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가지 책 중에서 손에 쥐어진 책이 신앙에 관한 책이었고, 그 책을 읽다가 노신사의 마음속에 갑자기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그 순간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 말합니다.
“점심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그는 조금 전, 마음속에서 생각하려고 했던 하나님에 관한 의식을 접어두고 식탁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가?”
이때 악마는 그 마음속에 다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악마에게 감동을 받은 노신사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생각을 하나.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
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신사는 사단의 역사를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
그는 도서관을 나와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버스 좌석에 앉자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노신사의 뒤에서 악마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경험을 한 적은 없습니까? ‘신앙열심을 회복해야겠는데!’, ‘기도해야 하는데!’, ‘예배에 빠지지 않아야 하는데!’ 등등.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지금은 바쁘니까 조금 한가해지면’, ‘그거 아니라도 골치가 아픈데’, ‘아이나 다 키워놓고’, ‘돈 좀 벌어두고 가정이 안정되면’ 등등. 이렇게 영의 생각들을 눌러버리지는 않습니까? 로마서 8:5-6절에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영의 생각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노신사처럼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때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순종하기를 결단하는 것과 결단한 것을 실천하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을 때, 겸손하게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비록 마음의 결단이 중요하지만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니엘이 마음으로 결단하고 즉시 실천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응답의 시점이 “기도가 시작될 즈음”이라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아직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응답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뜻과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성령께서 마음에 깨닫게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결심을 머뭇거리거나, 실천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순전하게 결단하고 실천할 때에 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을 따르는 영의 생각에 결단하고 실천하여 충만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야고보서 1:22-25,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다니엘 10:10-12, “10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11 내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매 12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주먹대장이었던 김익두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목사님이 시골마을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중에, 어떤 청년이 전도를 방해하면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대들었습니다. 목사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자신이 애써 길러놓은 농작물에 벼락이 떨어져서 불타버렸다.’고 하면서 “나쁜 사람도 많은데 왜 곡식에 벼락을 때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없다.’고 악을 썼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은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너 소학교는 나왔지?” “그럼요” “공부할 때 너희들이 장난치거나, 졸거나, 떠들 때면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지휘봉으로 흑판을 때리지 않더냐? 그 흑판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때리느냐? 아니다. 그것은 경고다. 계속 떠들고, 장난치고, 졸면 이렇게 때리겠다는 경고용 본보기이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너의 농작물에 벼락을 내리신 것은 너에 대하여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이 말을 들은 청년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목사님의 비유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날, 베다니 마을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였습니다. 배고픔을 느끼신 예수님이 길 가에 있는 잎이 무성한 큰 무화과나무를 보았습니다. 혹 무화과열매가 있을까 해서 가셨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막11:14)고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성전 입구에는 돈 바꾸는 사람들과 제물용 짐승을 파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성전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상인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짐승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예수님은 제자들과 숙소가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어제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 있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더욱이 유월절이 가까운 4월은 무화과를 수확하는 철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했겠습니까? 이는 자신의 목적에서 벗어난 예루살렘 성전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사건을 중심에 두고 무화과나무의 이야기를 앞뒤로 배치한 것입니다. 즉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말라 죽듯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전 또한 그렇게 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실 무화과나무는 잎과 동시에 작은 열매가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수확할 정도로 성숙한 열매는 아니라 할지라도 자라는 열매는 있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도 성숙해가는 신앙의 모습들이 보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기도 소리가 아니라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북적거리고 흥정하는 사람들의 소리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경고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결심하고 순복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었듯이, 주후 70년 경 로마에 의하여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원인은 하나님의 뜻에 결단하고 순복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곳의 본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순복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은총’입니다. 만일 예루살렘 성전과 성도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되기로 결단하고 순종했다면 결코 무너지고 멸망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막대기로 칠판을 탁탁 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말라 죽게 하신 것이나 모두 경고하는 표현입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환경과 사건들을 통하여 불순종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매 없는 삶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누가복음 13:1-5절에 그 시대에 일어났던 두 사건이 나옵니다. 살해당한 갈릴리 사람들의 사건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깔려 죽은 사건입니다. 그 중에서 두 번째 사건인 4-5절입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나님의 경고의 표현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재빨리 결심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계속 버티거나 결단을 머뭇거린다면 어느 날 갑자기 징벌의 덫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학자이며, 목회자였던 ‘에드워즈’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목회하던 교구 내에 술주정뱅이에, 도박꾼에, 타락한 생활을 하는 중년 남자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 사람이 이른 아침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에드워즈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왜 이른 아침에 그렇게 겁먹은 얼굴로 급하게 찾아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지난밤에 꾸었던 꿈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꿈속에서 천사가 “너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일 년 후 오늘에 너를 불러가겠다.” 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그 날부터 술도 끊고, 도박도 끊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동안 그렇게 신앙생활을 착실하게 하는 가 했는데, 몇 개월 지나면서 교회 출석이 뜸해지고 점점 열심이 식어갔습니다. 그리고 술도 다시 조금씩 마시고, 도박도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찾아가서 권면하고, 그가 보았던 꿈의 환상을 회상시켜 주었지만, 그 남자는 “글쎄요! 글쎄요!” 하면서 더욱 교회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남자는 완전히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권면하면 반항적으로 나오면서
“무얼요. 그런 개꿈을 가지고 두렵게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날도 술에 만취되어 술집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서 굴러 떨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목사님이 상담노트를 찾아보니, 그날이 바로 일 년 전 그 남자가 자신을 찾아온 날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신앙의 삶은 한 번 ‘믿겠다.’고 결단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매 순간순간 결단하고 순종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때를 결단하는 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니엘 10:12절에서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다니엘이 어린아이일 때에 하나님의 징계로 나라가 멸망당하고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로 바벨론의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후에 나라가 ‘바사’로 바뀌었을 때에는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바사왕 고레스 3년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무서운 전쟁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다니엘은 환상의 의미를 깨닫고 슬픔에 빠져 21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금식이 끝나는 21일 째에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다니엘을 천사가 깨웠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고 하나님의 응답을 가지고 왔음을 알렸습니다.
이 일보다 몇 년 앞에도 역시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9장의 내용입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들을 읽다가 자기 백성이 이렇게 포로생활을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신의 선조들의 죄악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결국 70년 동안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니엘은 즉시 금식하며 자신과 민족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천사장인 가브리엘이 저녁 예배 시간에 다니엘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 말씀 속에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두 곳 모두 현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순복하기를 결심하고 겸손하게 엎드린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심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진 시점을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살피십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말과 나타나는 행동으로 그 사람을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생각을 살피시며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마음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을 간절하게 사모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결단만큼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본문처럼 깨달은 말씀을 결단하고, 결단한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5절의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는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하고 결단을 하더라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국의 중세 학자인 ‘루이스(C.S.Lewis, 1898-1963)’가 쓴 ‘악마의 편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영국의 노신사가 어느 날 대영제국의 도서관을 찾아갑니다. 그 노신사는 습관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 들르곤 했는데, 그 날도 습관에 의하여 도서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가지 책 중에서 손에 쥐어진 책이 신앙에 관한 책이었고, 그 책을 읽다가 노신사의 마음속에 갑자기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그 순간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 말합니다.
“점심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그는 조금 전, 마음속에서 생각하려고 했던 하나님에 관한 의식을 접어두고 식탁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가?”
이때 악마는 그 마음속에 다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악마에게 감동을 받은 노신사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생각을 하나.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
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신사는 사단의 역사를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
그는 도서관을 나와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버스 좌석에 앉자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노신사의 뒤에서 악마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경험을 한 적은 없습니까? ‘신앙열심을 회복해야겠는데!’, ‘기도해야 하는데!’, ‘예배에 빠지지 않아야 하는데!’ 등등.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지금은 바쁘니까 조금 한가해지면’, ‘그거 아니라도 골치가 아픈데’, ‘아이나 다 키워놓고’, ‘돈 좀 벌어두고 가정이 안정되면’ 등등. 이렇게 영의 생각들을 눌러버리지는 않습니까? 로마서 8:5-6절에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영의 생각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노신사처럼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때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순종하기를 결단하는 것과 결단한 것을 실천하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을 때, 겸손하게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비록 마음의 결단이 중요하지만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니엘이 마음으로 결단하고 즉시 실천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응답의 시점이 “기도가 시작될 즈음”이라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아직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응답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뜻과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성령께서 마음에 깨닫게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결심을 머뭇거리거나, 실천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순전하게 결단하고 실천할 때에 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을 따르는 영의 생각에 결단하고 실천하여 충만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