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同床異夢)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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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03-19 13:58
*** 동상이몽(同床異夢) / 요한복음 12:12-19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2:12-19,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이솝 우화 중에 ‘나귀와 개구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나귀가 등에 장작을 한 짐 싣고 연못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나귀 앞발이 미끄러지면서 연못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좀 살려 주세요!” 가련한 나귀는 물속에서 발버둥 치면서 외쳤습니다. 나귀는 짐이 너무 무거운데다가 물에 빠져 일어서지도 못한 채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물속에 있던 개구리들이 한 마디씩 했습니다.
“원 어리석은 놈도 다 보겠군. 물에 약간 빠졌다고 저렇게 소동을 치다니. 우리는 항상 물속에서 사는데… 네가 이 물속에서 산다고 한다면 무슨 소리를 할 테냐?”
물속에 사는 개구리가 물에 빠져 쩔쩔 매는 나귀를 나무라는 말입니다. 물속에 사는 개구리가 자기를 기준으로 나귀의 형편을 판단한 것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이와 같다는 풍자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생기면 흔히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환경을 기준으로 판단을 합니다. 이런 ‘자기중심적 판단’은 실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이 때로는 자신에게 큰 손실을 초래할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 중에서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자신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지고 온 일에 대하여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공동번역, 마 25:24-25)라고 했습니다. 그 때 주인은 그 종을 책망하면서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자기중심적 판단’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일들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겪으면서 나름대로의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그 판단의 대부분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즉 일을 당한 당사자나 그 일 자체를 이해하거나,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환경에서 판단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이 시간의 본문말씀에도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범죄한 온 인류를 위하여 대신 고난 받으시고 속죄제물이 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자기중심적 판단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의 일을 두고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하는 성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어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대속적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생애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일컫는 부분입니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닷새 앞둔 축제기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온 유대와 타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으로 술렁거렸습니다. 특히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에서 있었던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대하고 학수고대했던 것입니다. 본문 17-18절에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꿈에 부풀었습니다. 이런 능력 있는 분이 왕이 된다면 틀림없이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이미 500 여 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스가랴 9:9절에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의 위대한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 된 이 메시아를 오래전부터 고대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명절에 모인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개선장군처럼 환영했습니다.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고,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왕을 열렬히 환호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 날을 ‘종려주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혹시 우리도 자신의 꿈만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환영하고 따르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새롭게 정립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 그러면 이들의 소망이 왜 동상이몽(同床異夢)이겠습니까?
명절을 위하여 모였던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여 독립 국가를 세울 왕으로 추대하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 외침에는 자신들의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할 능력의 왕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좀 고상하게 표현하면 ‘정치적인 메시아’로의 기대였습니다. 이러한 소망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만나셨던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실망한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중에는 엠마오가 고향인 두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소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낙심한 채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동행하셨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누가복음 24:21절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 말은 자신들이 메시아로 기대했던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꿈이 사라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나,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던 유대인들이나 모두 예수님을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유대왕국을 세울 왕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려는 속죄의 죽음을 생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18-19절을 봅시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시면서 예루살렘에 가는 목적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나 다른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나라를 일으킬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적 판단이며, 동상이몽입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자신의 희생을 통한 죄로부터의 구원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로마의 속국’이라는 압제당하는 상황과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열악한 환경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과 풍성함’을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믿음으로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조차 자신들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이 말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지금까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했던 일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 되는 대로 판단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동상이몽입니다.
2. 지금 우리는 동상이몽에 빠져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으며,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으로 지키게 됩니다. 이 기간을 특별하게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욕망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많은 성도들은 그 의미를 너무 많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이다. 고난주간이다. 또는 고난일이다.’ 하여 성도들은 예수님의 멸시받음과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마음 아파합니다. 마치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울던 여인들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잘못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따라오며 울던 여인들에게 누가복음 23:28절에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9:23절에서 말씀하신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구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고난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진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인이었던 ‘코리 텐 붐’ 여사에 대한 실화가 있습니다. 여사의 부친은 ‘캐스퍼’씨였는데 시계 제조업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 가족들은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 액수에 해당되는 시계를 살 사람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어느 손님이 현금으로 비싼 고급 시계를 샀습니다. 손님은 그 시계를 산 후, 일전에 캐스퍼 씨의 친구였던 그리스도인인 다른 시계업자에게서 시계를 한 개 샀는데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캐스퍼 씨는 ‘그 시계를 좀 볼 수 없겠느냐?’고 청해서 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그 시계는 작은 부분만 수리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수리를 해 주면서 그 손님에게 그 시계는 품질이 좋은 고급 시계이며 그 시계업자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좋게 말해 주었습니다.
손님은 놀라면서 새로 샀던 시계를 반납했고 캐스퍼 씨는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코리는 그 손님이 점포를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빠, 왜 시계를 도로 물려 주셨어요? 은행에 입금해야 될 돈 때문에 걱정이 되지 않으세요?”하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축복이 되는 돈이 있고 축복이 되지 않는 돈이 있는 거란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며칠 후 다른 손님이 왔는데, 그 당시에 생산했던 시계 중에서 가장 비싼 시계를 사갔습니다. 결국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을 다 갚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코리를 스위스에 보내 2년 동안이나 시계 제조 기술을 익힐 여유까지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고난주간이라고 금식하고, 슬픈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손익을 따지지 않고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만일 금식하고, 예수님의 고난을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얻으려 한다면, 이것이 현대판 신앙의 동상이몽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6-7절에서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믿지 않는 재판관들 앞에서 서로 소송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한다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느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올해 성도의 삼행 덕목을 지키려고 힘쓰고 있습니까? 그러하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의 고난을 값지게 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호산나”하며 환영했습니다. 이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로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현실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이익과 판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생기면 흔히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환경을 기준으로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원하는 자유와 해방, 정치적인 독립을 이룰 세상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영원한 생명을 회복시키시는 구원자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 되어 독립 국가를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예수님의 고난을 말하지만, 결코 주님을 위한 수고로움이나 어려움을 당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하셨지만, 우리는 자신의 안일과 평안함과 형통함을 고집하며, 결코 십자가를 지는 고난은 말하기도 싫어합니다. 이것이 오늘 성도들의 동상이몽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일을 주님의 마음으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자녀가 되어, 주님이 기뻐하시고 동행하시는 가장 큰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2:12-19,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이솝 우화 중에 ‘나귀와 개구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나귀가 등에 장작을 한 짐 싣고 연못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나귀 앞발이 미끄러지면서 연못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좀 살려 주세요!” 가련한 나귀는 물속에서 발버둥 치면서 외쳤습니다. 나귀는 짐이 너무 무거운데다가 물에 빠져 일어서지도 못한 채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물속에 있던 개구리들이 한 마디씩 했습니다.
“원 어리석은 놈도 다 보겠군. 물에 약간 빠졌다고 저렇게 소동을 치다니. 우리는 항상 물속에서 사는데… 네가 이 물속에서 산다고 한다면 무슨 소리를 할 테냐?”
물속에 사는 개구리가 물에 빠져 쩔쩔 매는 나귀를 나무라는 말입니다. 물속에 사는 개구리가 자기를 기준으로 나귀의 형편을 판단한 것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이와 같다는 풍자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생기면 흔히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환경을 기준으로 판단을 합니다. 이런 ‘자기중심적 판단’은 실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이 때로는 자신에게 큰 손실을 초래할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 중에서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자신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지고 온 일에 대하여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공동번역, 마 25:24-25)라고 했습니다. 그 때 주인은 그 종을 책망하면서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자기중심적 판단’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일들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겪으면서 나름대로의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그 판단의 대부분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즉 일을 당한 당사자나 그 일 자체를 이해하거나,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환경에서 판단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이 시간의 본문말씀에도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범죄한 온 인류를 위하여 대신 고난 받으시고 속죄제물이 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자기중심적 판단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의 일을 두고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하는 성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어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대속적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생애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일컫는 부분입니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닷새 앞둔 축제기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온 유대와 타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으로 술렁거렸습니다. 특히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에서 있었던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대하고 학수고대했던 것입니다. 본문 17-18절에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꿈에 부풀었습니다. 이런 능력 있는 분이 왕이 된다면 틀림없이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이미 500 여 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스가랴 9:9절에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의 위대한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 된 이 메시아를 오래전부터 고대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명절에 모인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개선장군처럼 환영했습니다.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고,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왕을 열렬히 환호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 날을 ‘종려주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혹시 우리도 자신의 꿈만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환영하고 따르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새롭게 정립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 그러면 이들의 소망이 왜 동상이몽(同床異夢)이겠습니까?
명절을 위하여 모였던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여 독립 국가를 세울 왕으로 추대하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 외침에는 자신들의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할 능력의 왕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좀 고상하게 표현하면 ‘정치적인 메시아’로의 기대였습니다. 이러한 소망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만나셨던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실망한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중에는 엠마오가 고향인 두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소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낙심한 채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동행하셨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누가복음 24:21절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 말은 자신들이 메시아로 기대했던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꿈이 사라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나,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던 유대인들이나 모두 예수님을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유대왕국을 세울 왕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려는 속죄의 죽음을 생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18-19절을 봅시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시면서 예루살렘에 가는 목적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나 다른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나라를 일으킬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적 판단이며, 동상이몽입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자신의 희생을 통한 죄로부터의 구원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로마의 속국’이라는 압제당하는 상황과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열악한 환경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과 풍성함’을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믿음으로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조차 자신들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이 말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지금까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했던 일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 되는 대로 판단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동상이몽입니다.
2. 지금 우리는 동상이몽에 빠져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으며,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으로 지키게 됩니다. 이 기간을 특별하게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욕망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많은 성도들은 그 의미를 너무 많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이다. 고난주간이다. 또는 고난일이다.’ 하여 성도들은 예수님의 멸시받음과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마음 아파합니다. 마치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울던 여인들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잘못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따라오며 울던 여인들에게 누가복음 23:28절에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9:23절에서 말씀하신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구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고난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진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인이었던 ‘코리 텐 붐’ 여사에 대한 실화가 있습니다. 여사의 부친은 ‘캐스퍼’씨였는데 시계 제조업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 가족들은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 액수에 해당되는 시계를 살 사람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어느 손님이 현금으로 비싼 고급 시계를 샀습니다. 손님은 그 시계를 산 후, 일전에 캐스퍼 씨의 친구였던 그리스도인인 다른 시계업자에게서 시계를 한 개 샀는데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캐스퍼 씨는 ‘그 시계를 좀 볼 수 없겠느냐?’고 청해서 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그 시계는 작은 부분만 수리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수리를 해 주면서 그 손님에게 그 시계는 품질이 좋은 고급 시계이며 그 시계업자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좋게 말해 주었습니다.
손님은 놀라면서 새로 샀던 시계를 반납했고 캐스퍼 씨는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코리는 그 손님이 점포를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빠, 왜 시계를 도로 물려 주셨어요? 은행에 입금해야 될 돈 때문에 걱정이 되지 않으세요?”하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축복이 되는 돈이 있고 축복이 되지 않는 돈이 있는 거란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며칠 후 다른 손님이 왔는데, 그 당시에 생산했던 시계 중에서 가장 비싼 시계를 사갔습니다. 결국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을 다 갚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코리를 스위스에 보내 2년 동안이나 시계 제조 기술을 익힐 여유까지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고난주간이라고 금식하고, 슬픈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손익을 따지지 않고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만일 금식하고, 예수님의 고난을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얻으려 한다면, 이것이 현대판 신앙의 동상이몽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6-7절에서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믿지 않는 재판관들 앞에서 서로 소송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한다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느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올해 성도의 삼행 덕목을 지키려고 힘쓰고 있습니까? 그러하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의 고난을 값지게 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호산나”하며 환영했습니다. 이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로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현실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이익과 판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생기면 흔히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환경을 기준으로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원하는 자유와 해방, 정치적인 독립을 이룰 세상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영원한 생명을 회복시키시는 구원자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 되어 독립 국가를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예수님의 고난을 말하지만, 결코 주님을 위한 수고로움이나 어려움을 당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하셨지만, 우리는 자신의 안일과 평안함과 형통함을 고집하며, 결코 십자가를 지는 고난은 말하기도 싫어합니다. 이것이 오늘 성도들의 동상이몽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일을 주님의 마음으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자녀가 되어, 주님이 기뻐하시고 동행하시는 가장 큰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