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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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247회 작성일 2008-02-15 22:15
*** 복의 통로 / 대하 34:22-28

** 들어가는 말

역대하 34:22-28, “22 이에 힐기야와 왕의 보낸 사람들이 여선지자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하스라의 손자 독핫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 저희가 그에게 이 뜻으로 고하매 23 훌다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으로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24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 앞에서 읽은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리니 25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노를 이곳에 쏟으매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26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27 내가 이곳과 그 거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2008년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주된 의미는 나를 죄악에서 구속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 성자 예수님께서 나의 죄악을 담당하신 그 고난과 말할 수 없는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결코 우리가 다 이해할 수도 없으며, 갚을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향하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깊이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결심을 새롭게 할 수는 있습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절기 기간 동안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슬퍼하며 침울하게 있는 것보다, 주님의 뜻을 되새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따르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실 때에 울며 따르던 여인들에게 누가복음 23:28절에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결단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 주일인 이 시간에는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삶 중에서 가장 먼저 닮아야 하는 삶의 자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성품이기도 하며, 성경에서 많은 약속이 주어진 것이기도 하며, 우리의 삶에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복의 통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처럼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힐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의 의미는 따를 수는 있습니다. 빌립보서 2:5-8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복의 통로입니다.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왕이면서도 왕관을 쓰지 않은 괴짜 황제가 있었습니다. ‘카누트’ 황제 (King Canute, 1014-1035)입니다. 카누트(크누드 1세)는 스벤 1세의 아들로서 1016년 영국 전 지역을 통치했고, 1018년 덴마크의 왕까지 겸했으며, 1030년에는 노르웨이마저 정복함으로써, 앵글로 스칸디나비아 연합 제국(북해 제국)을 성립시킨 왕입니다.
이처럼 강력한 능력을 가진 카누트 황제는 신하들이 지나치게 자기를 찬양하는 것이 싫어서, 어느 날 왕좌를 해변에 옮기게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밀물이 해변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왕이 분연히 일어서서 그 밀려오는 바닷물을 향하여 “바다여, 멈추어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밀물은 계속 왕좌를 향하여 밀려왔습니다. 여러 번 같은 명령을 했지만 물결은 사정없이 밀려들어 왕좌의 절반이 물에 잠겼습니다. 결국 황제는 파도에 밀려 왕좌에서 떨어졌습니다.
이때, 카누트 황제는 대신들을 둘러보며,  “보았느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너희가 의지할 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라고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날 왕관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 상에 걸어 놓고, 다시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창세 이래로 수많은 민족과 나라에 왕들이 있었지만 아마 이런 왕은 전무후무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것은 세력이 큰 나라의 권세 있는 황제로서의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57:1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을 살리시고 번성케 하시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팔복 중에 첫 번째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 즉 ‘마음이 비어진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4:6절을 봅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에는 남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이 통치할 때의 유다는 이미 나라의 운명이 기울고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죄악으로 B.C 721년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후, 남 유다도 거듭되는 죄악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4대 왕인 ‘므낫세(12세 등극, 55년 통치)’와 15대 왕인 ‘아몬(22세 등극, 2년 통치/ 신복들의 반역으로 죽임을 당함)’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한 죄악과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징계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요시야는 16대의 왕이 된 이후 우상들을 제거하고, 성전을 수리하고, 성직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율법을 듣는 순간 왕은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통회의 표현이었습니다. 왕은 즉시 제사장과 서기관과 왕의 신하들을 당시의 여선지자인 ‘훌다’에게로 보냈습니다. 곧 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행할 것을 묻게 한 것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본문 24-2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답변을 요약하면, ‘󰊉남 유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남 유다에 내릴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징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으며 통곡하며 겸손을 보인 요시야 왕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모든 재앙을 보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요시야의 겸손함이 저주의 재앙을 복으로 바뀌게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유다의 깊은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의 뜻은 사람의 어떤 행위로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확고부동했습니다. 비록 요시야 왕이 우상을 없애고 성전을 수리하고 성직을 회복시켰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겸손함으로 통회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열왕기하 23:26절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고 하십니다. 다만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요시야에게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마음의 위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두렵게 여기며 경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징계마저 복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복의 통로입니다.

어떻게 복의 통로가 활짝 열리게 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11:28-30절에서 겸손은 예수님의 성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처럼 예수님의 성품을 이루고 있는 겸손은 곧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지는 것까지도 예수님 자신의 뜻이 아닌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이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겸손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한 테너 가수 중에 ‘엔리코 카루소(1873-1921)’라는 분이 있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그는 많은 노력과 폭넓은 음성영역으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만 607회나 출연하는 진기록을 보유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거리낌 없이 노래를 불러서 사람들에게 ‘자존심 없는 사람’이라고 놀림 받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시내를 걷다가 옛 친구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가까운 음식점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손님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음식을 주문할 때 종업원이 그를 알아보고 주방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요리사 아저씨! 테너 가수 카루소 선생님이 오셨어요.” 종업원의 말이 떨어지자 요리사가 즉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을 이곳에서 뵈올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평소에 선생님의 노래를 직접 듣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하고 요리사가 말했습니다. 카루소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들려드리지요.”하고 아주 쉽게 말했습니다. “정말요? 선생님과 같은 세계적인 가수의 노래를 이렇게 쉽게 들을 수 있다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 요리 복을 입고 있는데 어쩌지요?” 그가 매우 미안해하며 말했습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하고는 즉시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식당 홀 안에 가득히 울려 퍼졌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모든 손님들은 그가 카루소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의 아름다운 선율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요리사는 더욱 감격해 했습니다. 잠시 후, 식사가 시작되어 친구가 카루소에게 ‘왜 아무 곳에서나 그렇게 노래를 부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나의 노래를 듣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네. 더욱이 저 요리사도 요리를 맛있게 해서 남들을 기쁘게 해주는 예술가가 아닌가. 예술가를 위해 노래하나 하는데 그렇게 인색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유명한 음악가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여러분도 많이 느껴 보셨겠지만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진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일에 있어서 겸손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높이 평가하시며,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잠언 22:4절에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5:3절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고, 베드로전서 5:6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서의 겸손입니다. 이 복의 통로가 여러분의 삶에서 활짝 열리기를 원하신다면 음악가 카루소처럼 생활 속에서 겸손한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겸손을 약한 것으로 생각해서, 억지로라도 강한 척 자신을 드러내려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기죽지 않게 하려고 무리를 해서라도 가르치고 꾸밉니다.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죽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옛말에도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 했습니다. 원래의 뜻은 ‘밖으로는 부드럽지만 내면은 굳세고 꿋꿋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부드럽다는 것을 겸손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듯합니다. 원래 겸손은 약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은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믿음을 가졌지만, 생활 속에서는 자신을 낮추어 부드러움으로 사람을 대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잡아주시며 높여주십니다. 즉 겸손의 통로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보상은 ‘높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높아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때입니다.

지금은 겸손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선전해야 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하나님의 관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마음을 낮추어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 모두 겸손한 삶으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높여주시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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