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있을 때 하십시오 4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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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07-21 22:27
*** 기회가 있을 때 하십시오 4 / 마태복음 6:19-24, 요한복음 9:4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6:19-24,(공동번역) “19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요한복음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군인들이 외출을 하든지, 중요한 행사에 갈 때는 얼룩무늬의 전투복이 아닌, 정복(正服), 즉 예복을 입습니다. 일반적으로 훈장을 달고 나오는 그런 옷이 예복입니다. 휴가를 갈 때면 구두가 반짝반짝 빛이 나고 파리가 미끄러지도록 닦고 옷은 손이 베일정도로 다림질을 합니다. 길을 가다가 상관을 만나면 절도 있게 깍듯이 경례를 합니다. 이렇게 군인이 깔끔하고 예절바르고 멋있다고 해서 군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군인다움은 전투에서 두려움 없이 용감하게 목숨을 바쳐 싸우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여서 전술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3절에서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영적인 군인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하고, 점잖고, 예절바르고, 예배참석, 온전한 헌금 등 신앙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다움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고,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군인은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2:4절에서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날씨가 덥거나 춥다고 훈련을 안 하거나, 몸이 아프다고 무섭다고 전투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부른 조국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을 봅시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4:7절에서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고백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을 헌신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간에 상고하고자 하는 ‘기회가 있을 때 하십시오. 네 번째’말씀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할 것’ 첫 번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모든 삶의 우선권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삶의 기회인 시간, 돈, 재능, 건강, 환경이 아직 사용할 수 있을 때, 이 기회를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데 가장 먼저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의 밤이 닥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할 것’ 두 번째는 ‘기회가 있을 때에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잘못한 일들이 생각날 때, 길을 잘못 가고 있다고 깨달을 때, 관계가 틀어져 있다고 느낄 때,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즉시 돌이키고 회개하며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할 것’ 세 번째는 ‘기회가 있을 때에 삶을 정리 정돈하라.’고 했습니다. 필요 없는 것들은 버리고, 있어야 할 것은 구해서 채워 넣고, 흐트러진 것들은 다시 정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할 것’ 네 번째는 ‘자신을 헌신하여 열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말씀(마태복음 5,6,7장) 속에 들어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세상에서도 ‘문학의 백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만큼 신앙적으로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서 꼭 필요한 뛰어난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특히 6장에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6장의 결론은 33절인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의식주(衣食住)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서 더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 본문은 두 가지 보화, 즉 ‘하늘의 보물과 땅의 보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적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시키시려고 세 쌍의 비유적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제시하십니다. 즉 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 성한 눈과 나쁜 눈, 하나님과 재물. 이렇게 점층법으로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하여 쌓지 말고, 영원한 삶을 위하여 쌓는 지혜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신 이적’에 관한 이야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이적을 행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예상되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병 고치는 일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쉬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법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법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하는 구속사역까지 쉴 수는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리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즉 지금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기회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밤이 올 터인데 그 때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두 본문의 초점은 ‘지금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육신을 위해 땅에 쌓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어봅시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할 수도 없겠지요.
예수님께서 벳세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이적을 일으켜서 자신들을 먹게 해주시는 것을 보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이 요한복음 6:29절에 있습니다. 찾아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요한복음 14:12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입니까? 너무 범위가 넓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적과 같은 놀라운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요한복음 4:3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7:16절에서는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8절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근거로 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일’에 대한 세부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즉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땅”과 “하늘”이라는 단어입니다. 19절에서 “너희(자신)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고, 20절에서는 “너희(자신)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세상의 물질생활과 연관이 있습니다. 물질이란 사람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선(善)도 아니며 악(惡)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물질을 떠나서는 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도 물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하여 사용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벌어들인 돈을 은행에 예금합니다. 땅이나 집을 사두기도 합니다. 금이나 보석 등으로 모아두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예금도 필요하며, 노후대책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땅에 쌓는다.”는 것은 물질의 사용목적이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의 육신의 삶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사용목적이 이타적인 것 즉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16-21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비유’가 바로 이런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풍년을 만나서 창고를 더 지어가면서까지 많이 쌓아둔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쌓아둔 재물에 만족하면서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하며, 몇 년 동안 풍족하게 먹고 즐길 수 있음에 행복해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으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은혜인지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감사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자신의 것으로만 알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려했던 것입니다.
이 부자가 땅에 재물을 쌓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시간 좀 내는 것도 어려워합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운동하고, 문화생활, 여가활용, 자녀들을 위한 시간 등 자신을 위해서는 선뜻 시간을 내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항상 바쁘고 피곤합니다. 헌금을 하는 것도 인색합니다. 자신들의 육신을 꾸미는 것에나, 건강에나, 살림살이, 심지어 자녀들 용돈까지도 잘 사용하면서, 남을 돕는 일에나 헌금을 하는 일에는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마음이 오그라듭니다. 하나님께는 자신이 쓰고 남은 것을 드리니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말라기 1:8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라고 탄식하십니다. 결국 장사꾼과 정치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재물의 신을 섬기는 꼴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기쁘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께 달라고만 요구하고 있으니, 자기 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교회들이 돈의 신에게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대로 모르는 척 살면 되는 것입니까 (문제의 해결을 위한 말씀은 다음 주일에 계속됩니다. 우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만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인생들의 대속의 제물로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주저 없이 내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7-8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꺼이 목 베임을 당하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지금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도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삶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눈이 나쁘면 몸의 활동이 어둔해지고 삶이 어두워집니다.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인생이 깜깜해집니다. 즉 영의 눈이 어두워져서 육신의 삶에만 빠져 있으면 인생의 미래는 없습니다. 희망이 없는 어두움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물질은 서로 반대되는 주인입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단지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법이 아닙니다. 둘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물질을 따라가면 물질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과는 반대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을 둘 다 누리고 싶어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세상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적인 것은 다 버려야 합니까? 세상을 버리고 물질을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겠지요. 다만 여러분의 소유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헌신을 원하십니다. 시간이든지 물질이든지 무엇이든지 우리가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실상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금이 일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아이 키워놓고 하겠습니다.’, ‘생활이 좀 안정되고 넉넉해지면 하겠습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하겠습니다.’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까? 지금 하십시오. 지금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6:19-24,(공동번역) “19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요한복음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군인들이 외출을 하든지, 중요한 행사에 갈 때는 얼룩무늬의 전투복이 아닌, 정복(正服), 즉 예복을 입습니다. 일반적으로 훈장을 달고 나오는 그런 옷이 예복입니다. 휴가를 갈 때면 구두가 반짝반짝 빛이 나고 파리가 미끄러지도록 닦고 옷은 손이 베일정도로 다림질을 합니다. 길을 가다가 상관을 만나면 절도 있게 깍듯이 경례를 합니다. 이렇게 군인이 깔끔하고 예절바르고 멋있다고 해서 군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군인다움은 전투에서 두려움 없이 용감하게 목숨을 바쳐 싸우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여서 전술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3절에서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영적인 군인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하고, 점잖고, 예절바르고, 예배참석, 온전한 헌금 등 신앙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다움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고,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군인은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2:4절에서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날씨가 덥거나 춥다고 훈련을 안 하거나, 몸이 아프다고 무섭다고 전투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부른 조국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을 봅시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4:7절에서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고백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을 헌신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간에 상고하고자 하는 ‘기회가 있을 때 하십시오. 네 번째’말씀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할 것’ 첫 번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모든 삶의 우선권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삶의 기회인 시간, 돈, 재능, 건강, 환경이 아직 사용할 수 있을 때, 이 기회를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데 가장 먼저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의 밤이 닥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할 것’ 두 번째는 ‘기회가 있을 때에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잘못한 일들이 생각날 때, 길을 잘못 가고 있다고 깨달을 때, 관계가 틀어져 있다고 느낄 때,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즉시 돌이키고 회개하며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할 것’ 세 번째는 ‘기회가 있을 때에 삶을 정리 정돈하라.’고 했습니다. 필요 없는 것들은 버리고, 있어야 할 것은 구해서 채워 넣고, 흐트러진 것들은 다시 정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할 것’ 네 번째는 ‘자신을 헌신하여 열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말씀(마태복음 5,6,7장) 속에 들어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세상에서도 ‘문학의 백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만큼 신앙적으로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서 꼭 필요한 뛰어난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특히 6장에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6장의 결론은 33절인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의식주(衣食住)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서 더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 본문은 두 가지 보화, 즉 ‘하늘의 보물과 땅의 보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적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시키시려고 세 쌍의 비유적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제시하십니다. 즉 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 성한 눈과 나쁜 눈, 하나님과 재물. 이렇게 점층법으로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하여 쌓지 말고, 영원한 삶을 위하여 쌓는 지혜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신 이적’에 관한 이야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이적을 행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예상되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병 고치는 일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쉬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법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법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하는 구속사역까지 쉴 수는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리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즉 지금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기회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밤이 올 터인데 그 때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두 본문의 초점은 ‘지금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육신을 위해 땅에 쌓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어봅시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할 수도 없겠지요.
예수님께서 벳세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이적을 일으켜서 자신들을 먹게 해주시는 것을 보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이 요한복음 6:29절에 있습니다. 찾아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요한복음 14:12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입니까? 너무 범위가 넓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적과 같은 놀라운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요한복음 4:3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7:16절에서는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8절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근거로 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일’에 대한 세부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즉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땅”과 “하늘”이라는 단어입니다. 19절에서 “너희(자신)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고, 20절에서는 “너희(자신)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세상의 물질생활과 연관이 있습니다. 물질이란 사람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선(善)도 아니며 악(惡)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물질을 떠나서는 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도 물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하여 사용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벌어들인 돈을 은행에 예금합니다. 땅이나 집을 사두기도 합니다. 금이나 보석 등으로 모아두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예금도 필요하며, 노후대책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땅에 쌓는다.”는 것은 물질의 사용목적이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의 육신의 삶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사용목적이 이타적인 것 즉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16-21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비유’가 바로 이런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풍년을 만나서 창고를 더 지어가면서까지 많이 쌓아둔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쌓아둔 재물에 만족하면서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하며, 몇 년 동안 풍족하게 먹고 즐길 수 있음에 행복해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으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은혜인지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감사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자신의 것으로만 알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려했던 것입니다.
이 부자가 땅에 재물을 쌓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시간 좀 내는 것도 어려워합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운동하고, 문화생활, 여가활용, 자녀들을 위한 시간 등 자신을 위해서는 선뜻 시간을 내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항상 바쁘고 피곤합니다. 헌금을 하는 것도 인색합니다. 자신들의 육신을 꾸미는 것에나, 건강에나, 살림살이, 심지어 자녀들 용돈까지도 잘 사용하면서, 남을 돕는 일에나 헌금을 하는 일에는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마음이 오그라듭니다. 하나님께는 자신이 쓰고 남은 것을 드리니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말라기 1:8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라고 탄식하십니다. 결국 장사꾼과 정치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재물의 신을 섬기는 꼴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기쁘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께 달라고만 요구하고 있으니, 자기 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교회들이 돈의 신에게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대로 모르는 척 살면 되는 것입니까 (문제의 해결을 위한 말씀은 다음 주일에 계속됩니다. 우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만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인생들의 대속의 제물로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주저 없이 내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7-8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꺼이 목 베임을 당하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지금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도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삶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눈이 나쁘면 몸의 활동이 어둔해지고 삶이 어두워집니다.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인생이 깜깜해집니다. 즉 영의 눈이 어두워져서 육신의 삶에만 빠져 있으면 인생의 미래는 없습니다. 희망이 없는 어두움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물질은 서로 반대되는 주인입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단지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법이 아닙니다. 둘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물질을 따라가면 물질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과는 반대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을 둘 다 누리고 싶어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세상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적인 것은 다 버려야 합니까? 세상을 버리고 물질을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겠지요. 다만 여러분의 소유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헌신을 원하십니다. 시간이든지 물질이든지 무엇이든지 우리가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실상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금이 일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아이 키워놓고 하겠습니다.’, ‘생활이 좀 안정되고 넉넉해지면 하겠습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하겠습니다.’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까? 지금 하십시오. 지금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