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을 준비하는 성탄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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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12-26 14:28
*** 재림을 준비하는 성탄 / 눅 2:8-14, 히 9:23-28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2:8-14,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히브리서 9:23-28,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복된 성탄일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평안과 구원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8년 성탄일에는 지금까지 첫 번 성탄일만 생각하던 고정관념을 벗어나려합니다. 지금까지는 첫 번 성탄일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생각하며 마냥 기뻐했습니다. 하긴 이제는 형식적인 행사로 전락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든 신앙 안에서 현실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성육신 하신 성탄일이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준비’에 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경각심을 일깨우는 말씀은 마태복음 24:44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도 아모스 4:12절에서 범죄하고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종말을 준비하라는 경고성 말씀입니다. 경고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열 처녀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천국잔치를 준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혼인잔치를 준비한 열 명의 처녀들이 등불과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미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여 했지만,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낭패를 당한 내용입니다. 즉 믿음을 준비한 성도만 주님과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것이고, 영원한 행복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 크리스마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은 신붓감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9절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3절에서는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마냥 즐거워 할 때가 아닙니다. 첫 번 성탄절은 구원의 문이 열린 기회의 날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진 깨어있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재림하실 날은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재림을 준비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 먼저 본문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본문은 천사들이 메시아 탄생을 세상에 알리는 Good News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내용은 12절 내용인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아 된 표적으로 주신 증거가 “구유에 누인 아기”입니다. 왜 이것이 표적이 됩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표적은 요한복음 6장의 내용과 연결이 됩니다. 51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시며, 54절에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짐승들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짐승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소나 말이나 돼지 등의 짐승이 아니라, 짐승처럼 된 인간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어기고 죄를 범한 인간을 ‘짐승’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6: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공동번역성경에서는 “그래서 야훼께서는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입김이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사람은 백 이십 년밖에 살지 못하리라\" 하셨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영이 없는 ‘짐승’과 똑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영의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구유” 즉 짐승의 먹이통에 누우신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라고 하십니다. 그 짐승은 다름 아닌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승이 된 인생을 다시 살려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려고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날이 성탄절입니다. 이 사실을 고상하게 표현한 말씀이 히브리서 본문입니다. 즉 구약시대에는 언약을 어기고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위하여 동물들이 대신 죽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따라가지를 못하여 그것마저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더 이상 피의 제물이 필요 없도록 인간의 죄를 단번에 처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첫 번 성탄절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구유에 누인 예수님을 먹고 마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외 없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말입니다.
♥ 그렇다면 이제는 재림을 준비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사역하시는 어느 목사님의 명상록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월요일, 주님이 내 집에 오셨지만 문 앞에서 돌아가 버리셨습니다. “네 마음에는 아들 딸이 가득 차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화요일, 노크만 하신 주님은 발길을 돌이키셨습니다. “네 집은 돈으로 꽉 차 발 디딜 틈도 없구나.” 수요일, 나를 부르시던 주님은 슬픈 낯이 되셨습니다. “세상 재미에 귀가 먹어서 내 음성을 못 듣는구나.” 목요일, 주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내가 찾아왔는데도 조금 피곤하다고 인사도 안 하니?” 금요일, 주님은 우셨습니다. “뭐라고? 나보고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토요일, 거센 노크 소리와 함께 주님의 고함 소리. “이젠 나에게 문도 안 열어주느냐!” 주일, 교회에 갔더니 주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날마다 네 집에 가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는데, 그래도 오늘 하루라도 잊지 않고 잠깐이라도 들려주니 고맙구나!”
해마다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해마다 예수님은 머무실 곳이 없습니다. 첫 번 성탄절의 모습을 누가복음 2:7절에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머무실 곳이 없으십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자리를 비워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들어가셨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생명을 주시는 산 떡이신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6:54-55절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먹고 마십니까? 성찬예식이 생각나지요? 떡과 잔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며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시며,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십니다. 즉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먹을 수 있는 길은 요한복음 15:10절에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시며, 12절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4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렇습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성탄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지켜 행함으로 우리 마음의 자리에 모시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탄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과 평화가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어져서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일에는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알게 또는 모르게 마음 밖에 서 계시도록 무관심했던 마음이 다시는 반복되지 아니하도록 주님을 주인의 자리로 모십시다. 이것이 진정한 재림의 준비이며 성탄을 맞이하는 진정한 자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오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은 내일은 더욱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또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후회 없는 신앙의 준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탄이 정말 기쁨과 감격이 넘치며, 모든 삶에서 주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2:8-14,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히브리서 9:23-28,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복된 성탄일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평안과 구원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8년 성탄일에는 지금까지 첫 번 성탄일만 생각하던 고정관념을 벗어나려합니다. 지금까지는 첫 번 성탄일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생각하며 마냥 기뻐했습니다. 하긴 이제는 형식적인 행사로 전락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든 신앙 안에서 현실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성육신 하신 성탄일이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준비’에 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경각심을 일깨우는 말씀은 마태복음 24:44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도 아모스 4:12절에서 범죄하고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종말을 준비하라는 경고성 말씀입니다. 경고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열 처녀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천국잔치를 준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혼인잔치를 준비한 열 명의 처녀들이 등불과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미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여 했지만,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낭패를 당한 내용입니다. 즉 믿음을 준비한 성도만 주님과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것이고, 영원한 행복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 크리스마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은 신붓감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9절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3절에서는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마냥 즐거워 할 때가 아닙니다. 첫 번 성탄절은 구원의 문이 열린 기회의 날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진 깨어있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재림하실 날은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재림을 준비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 먼저 본문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본문은 천사들이 메시아 탄생을 세상에 알리는 Good News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내용은 12절 내용인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아 된 표적으로 주신 증거가 “구유에 누인 아기”입니다. 왜 이것이 표적이 됩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표적은 요한복음 6장의 내용과 연결이 됩니다. 51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시며, 54절에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짐승들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짐승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소나 말이나 돼지 등의 짐승이 아니라, 짐승처럼 된 인간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어기고 죄를 범한 인간을 ‘짐승’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6: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공동번역성경에서는 “그래서 야훼께서는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입김이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사람은 백 이십 년밖에 살지 못하리라\" 하셨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영이 없는 ‘짐승’과 똑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영의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구유” 즉 짐승의 먹이통에 누우신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라고 하십니다. 그 짐승은 다름 아닌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승이 된 인생을 다시 살려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려고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날이 성탄절입니다. 이 사실을 고상하게 표현한 말씀이 히브리서 본문입니다. 즉 구약시대에는 언약을 어기고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위하여 동물들이 대신 죽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따라가지를 못하여 그것마저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더 이상 피의 제물이 필요 없도록 인간의 죄를 단번에 처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첫 번 성탄절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구유에 누인 예수님을 먹고 마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외 없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말입니다.
♥ 그렇다면 이제는 재림을 준비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사역하시는 어느 목사님의 명상록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월요일, 주님이 내 집에 오셨지만 문 앞에서 돌아가 버리셨습니다. “네 마음에는 아들 딸이 가득 차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화요일, 노크만 하신 주님은 발길을 돌이키셨습니다. “네 집은 돈으로 꽉 차 발 디딜 틈도 없구나.” 수요일, 나를 부르시던 주님은 슬픈 낯이 되셨습니다. “세상 재미에 귀가 먹어서 내 음성을 못 듣는구나.” 목요일, 주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내가 찾아왔는데도 조금 피곤하다고 인사도 안 하니?” 금요일, 주님은 우셨습니다. “뭐라고? 나보고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토요일, 거센 노크 소리와 함께 주님의 고함 소리. “이젠 나에게 문도 안 열어주느냐!” 주일, 교회에 갔더니 주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날마다 네 집에 가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는데, 그래도 오늘 하루라도 잊지 않고 잠깐이라도 들려주니 고맙구나!”
해마다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해마다 예수님은 머무실 곳이 없습니다. 첫 번 성탄절의 모습을 누가복음 2:7절에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머무실 곳이 없으십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자리를 비워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들어가셨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생명을 주시는 산 떡이신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6:54-55절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먹고 마십니까? 성찬예식이 생각나지요? 떡과 잔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며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시며,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십니다. 즉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먹을 수 있는 길은 요한복음 15:10절에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시며, 12절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4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렇습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성탄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지켜 행함으로 우리 마음의 자리에 모시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탄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과 평화가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어져서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일에는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알게 또는 모르게 마음 밖에 서 계시도록 무관심했던 마음이 다시는 반복되지 아니하도록 주님을 주인의 자리로 모십시다. 이것이 진정한 재림의 준비이며 성탄을 맞이하는 진정한 자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오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은 내일은 더욱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또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후회 없는 신앙의 준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탄이 정말 기쁨과 감격이 넘치며, 모든 삶에서 주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