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예수님과 세상(그리스도인과 세상)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227회 작성일 2008-12-17 16:29
*** 예수님과 세상(그리스도인과 세상) / 벧전 2:11-17

** 들어가는 말

베드로전서 2:11-17,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요한복음 7:6-8,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대강절 세 번째 주간입니다. 대강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삶의 방식(life style)을 찾아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를 살펴보려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일하시면서 가지신 관점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님의 관점에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말씀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바꾸려고 하면 최소한 두 가지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는 ‘바꾸려고 하는 지금의 것’을 알아야 하고, 다음은 ‘바꿀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바꿀 새로운 것’으로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의 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알고 있습니까? ‘자기 삶의 스타일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고 하실지 모르지만, 그런 관심도 없이 사는 사람들 많습니다. 어떻든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니 일단 제처 둡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핵심요소만 생각해보려 합니다.

잠언 4:23절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스타일은 ‘마음의 관점’입니다. 예로부터 “사람의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믿음의 자리로부터 미끄러뜨리려고 미혹하는 사단의 주된 목표점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이성(理性)에 권좌를 마련하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理性)은 사단의 방법이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게 합니다. 즉 자신의 능력을 믿고 신적인 존재의 필요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세기의 문예 부흥기를 거치면서 세상은 급변했습니다. 종교로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는 지나고, 인간의 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도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키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의 자유를 추구했습니다. 즉 육신의 만족과 쾌락을 위하여 인간 스스로의 자리를 높여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대하여 요한복음 7:7절에서,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증거 하셨고, 본문 11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 대한 관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세상에 대한 관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합니다.

먼저, 세상에 대하여 올바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저에게 있어서의 세상은 기회의 땅입니다. 왜냐하면 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9:10절에서,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고 하십니다. 미래의 영원한 삶을 결정짓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하면 갈등과 고통의 땅으로 변합니다. 기회의 땅은 소망으로 인하여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갈등의 땅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갈등의 연속입니다. 사는 것이 고통이지요. 여러분이 사는 자리는 어떻습니까? 기회의 땅입니까? 갈등의 땅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깊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육신의 삶과 영의 삶의 대결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느냐? 육신의 생각을 따라야 하느냐?’ 하는 갈등입니다. 신앙 안에서 생각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가정을 보고 세상을 보면 자신의 계획이 앞서게 됩니다. 헌금을 해야 하느냐? 아이 학원비를 내야하느냐? 예배하러 가야 하느냐? 결혼식에 가야 하느냐? 수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결이 일어나는 장소는 다름 아닌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했으며, 세상의 병법에서조차 “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고 했습니다. 잠언 16:32절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십니다. 4:23절에서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마음의 갈등을 성경에서는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0:3-5절에서,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11-12절에서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의 대상과 성격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군인은 싸우는 병기입니다. 그래서 군에서는 잘 싸우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싸움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바다에서 싸우는 해상 전투, 공중에서 싸우는 공중 전투, 육지에서 싸우는 육상 전투가 있습니다. 육상 전투를 예로 들면, 화생방 전투, 각개 전투, 산악 전투, 밀림 전투, 대공 방어, 침투 등등. 수없이 많은 싸움의 종류가 있습니다.
이 모든 싸움은 각각 성격을 달리합니다. 뿐만 아니라, 싸움의 대상에 따라 전술과 무기도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싸움에서 똑 같은 전술과 똑 같은 무장으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각 전투의 성격과 대상에 따라 전술과 무기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오늘의 군대를 ‘디지털 군대’라고 부릅니다. 첨단화된 장비들로 싸우게 됩니다.

육신의 싸움도 이렇게 진보하고 달라지고 있는데 영의 싸움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싸움의 성격은 총과 칼 같은 물질적인 무기로 싸우는 외적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마음, 즉 영의 싸움입니다. 이 마음의 싸움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계획과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살려는 인간의 뜻과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싸움의 대상은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견고한 진”, “모든 이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등으로 표현된 것으로써 ‘사람의 마음’입니다. 특히 “견고한 진”은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마귀의 요새’로 번역했습니다. 요새란 ‘우리 마음속에 뿌리 깊이 새겨진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로 표현된 것인데,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미혹하는 외적인 권세들’입니다. 이 외적인 권세의 총 지휘자는 역시 사단입니다.

이들 대적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뺏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미혹하는 권세들은 우리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유도합니다. 즉 자신의 계획에 몰두하여 더 많은 시간과 힘을 쏟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추구하는 시간과 힘을 덜 쏟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오가게 함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뺏으려는 사단의 전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1:3절입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또한 야고보서 1:6-8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시며, 4:4절에서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간음하는 여자들”이란 ‘세상에 마음을 둔 사람’으로서 ‘영적 간음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사단이 활동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대하여 가져야 할 관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가운데 항상 접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매일 매일 세상의 온갖 사건과 사고, 문화, 갖가지의 환경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오늘에 와서는 텔레비전, 컴퓨터, 각종 교통수단의 발달로 세계의 환경을 이웃처럼 느끼며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환경들에 대하여 의식적으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반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타내는 이러한 반응이 인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믿음에 의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온갖 환경 속에는 나 자신의 믿음에 도전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물론 믿음으로 세상을 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반응을 자세히 검토해 보십시오. 의외로 인간적인 반응이 더 많이 발생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에도 세상적인 관념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님의 임재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즉시 성품이 달라지거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은 생명을 얻었지만 아직 예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3:21절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끊임없이 세상적인 반응을 일으키면서도 조금씩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악한 세상에 대하여 가져야 할 관점은 ‘선한 양심’입니다.  에베소서 4:19절의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대적자들은 우리를 더럽게 하려고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으로 ‘선행’ 즉 ‘착한 행실’의 삶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읽어봅시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고 이어서 15-17절을 봅시다.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그런가하면 마태복음 5:16절에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이 악하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으로 죽었던 인간들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름답고도 고귀한 하나님의 선행(선한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 받아야 할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선한 양심으로 이루는 착한 행실’입니다. 이런 선행으로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의 입을 막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더 미루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즉시 결단하지 않으면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우유부단하게 되어 결국 사단의 손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유혹을 수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유혹에 져서 육신의 욕망을 따르게 되면, 그것은 습관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원상태로 돌아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국 몇 번 계속하게 되고, 습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오랜 습관은 요새처럼 굳어져서 파멸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자녀들의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파멸의 길로 계속 가시렵니까?

이 성탄의 복된 계절에 예수님의 삶의 방식(life style)을 닮아갑시다. 그리하여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평화의 성탄을 맞이하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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