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신 예수님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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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12-11 21:41
***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신 예수님 / 요 8:25-30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8:25-30,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대강절은 예수님께서 성육신(成肉身)하심과 다시 오심에 대한 감사와 소망과 준비의 기간입니다. 즉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승천하셨다가, 심판과 영접을 위하여 다시 오심의 모든 메시아 사역에 대한 깊은 생각과 감사의 시간들입니다. 이 시간에는 특히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원리라고 하니까 무엇인가 거창하고 어렵게 보이지요? 그러나 실상은 너무나 간단하고 간결한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21절에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지금부터 그 원리를 추적해봅시다.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에 ‘헤론’이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헤론은 미국 테네시 주의 ‘테네시 의과 대학’이 생긴 이래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린 수재였습니다. 그 대학의 교수회가 수련을 마친 후 ‘교수로 남아 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한국의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언더우드’선교사보다 두 달 늦은 1885년 6월에 내한하여 ‘알렌’선교사의 ‘제중원’에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알렌이 선교사직을 물러난 후에 그는 제중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밤낮없이 헌신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5년 뒤인 1890년 여름에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다른 선교사들은 남한산성의 휴양지에서 쉬고 있었지만, 그는 폭염 속에서도 서울까지의 먼 거리를 드나들면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위와 과로에 지쳐 결국 자신도 이질에 걸려 3주간 앓다가 1890년 7월 16일 이역만리 낮선 땅에서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남겨 두고 순직함으로써 그의 짧은 인생을 선교지 한국에서 마쳤습니다. 그의 시신은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에 최초로 묻혔습니다.
헤론 선교사는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순교해야 했습니까? 전염병이 창궐하던 때에 다른 선교사들처럼 요양지로 피신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만일 요양지로 피신했더라면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헤론 선교사가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며 봉사와 섬김을 계속했던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에 주님의 손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었으며,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본문 29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고 하시고, 누가복음 22:42절에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셨습니다. 즉 자신의 뜻과 자신의 기쁨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한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외면적이며 세상적인 것을 기쁨으로 삼습니다. 수입이 많아졌다고 기뻐하고, 진급이 되었다고 기뻐하고, 아이들의 성적이 좋아졌다고 기뻐합니다. 이런 기쁨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똑같이 추구하는 외면적인 기쁨입니다. 구원받은 것,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는 것,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것. 이러한 것은 전혀 기쁨으로 여기지를 못합니다. 만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하고자 하시는 일을 분별하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 곧 로마서 12:2절에서 말씀하신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삶의 현장을 추적해 봅시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합시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중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자신들이 도리어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네가 누구냐?”라며 꼬투리 잡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십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는지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다음의 말씀들이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과 삶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3절,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절,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저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6절,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28절,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왔던 메시아였습니다. 그리고 심판자가 아닌 오직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로서의 사역에 충실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라고 하신 것은 ‘심판할 것들이 많지만 지금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메시아의 사역에 순종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의 원리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보이신 삶의 원리를 찾아봅시다.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보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삶의 원리를 살펴봅시다. 사람이 오랫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갈수록 그 사람에게 명확하게 드러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평가하고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말로 전문가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무슨 일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를 만나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완벽한 기준에 비추어 보아 자신의 평가가 얼마나 부정확하고 초라했던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런대로 선하게 사는가?’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성장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나는 예수님처럼 사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신앙의 성장목표를 에베소서 4:13절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수록 더욱 깊이 죄의 대가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죄의 무서움과 비참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죄의 결과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음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록 참회하는 깊은 슬픔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것이나, 이사야 선지자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알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용서받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4절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십니다. 또한 시편 34:18절에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자신과 죄의 참혹함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깊은 깨달음과 복종의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으로 나타내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는 삶을 보이셨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시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즉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철저하게 복종하신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그리스도인들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29절을 봅시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항상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였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6:38-39 상반절에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또한 5:30절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하시며, 4:34절에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삶의 원리는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양식’이란 생명을 있게 하는 근본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 자신을 살게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자신을 비우시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후, 예수님을 대신한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요한복음 14: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즉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모든 진리를 다시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삼위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입니다. 성삼위 하나님도 하나이시며, 뜻도 하나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성도들도 가진 생각과 뜻이 하나여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존재합니다. 요한복음 17: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물고기가 물 안에서 마음껏 호흡하며 헤엄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무한한 자유와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이며, 이를 위하여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강절에 자신을 돌아보며 확인해야 하는 것은 ‘이렇게 나 자신 속에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가는가?’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산에 사는 어느 애견가가 좋은 개 한 마리를 키웠습니다. 개를 아주 좋아했으며 훈련을 잘 시켰습니다. 그래서 개에게 물건을 사오도록 심부름을 시키곤 했습니다. 텔레비전에도 가끔 나오듯이, 장바구니에다가 돈을 넣고 사야할 품목을 적은 쪽지를 거기 다 넣어서 개에다가 물려주면 개가 가게에 가서 장을 보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 개는 동네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이 가정이 직장을 따라 대구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한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주인은 자신이 지금 대구에 와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예전처럼 개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개가 장바구니를 입에 물고 집을 떠났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주인은 개가 무슨 변을 당했는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삼일이 지난 오후 시간에 부산에 있는 가게에서 이 주인에게로 전화가 왔습니다. ‘개가 심부름 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집스럽게도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2,3)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보실 때에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 지금 세상에는 넘쳐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힘씁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삶으로 본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원리였습니다. 이 평화의 계절에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깊은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주님을 닮아,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8:25-30,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대강절은 예수님께서 성육신(成肉身)하심과 다시 오심에 대한 감사와 소망과 준비의 기간입니다. 즉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승천하셨다가, 심판과 영접을 위하여 다시 오심의 모든 메시아 사역에 대한 깊은 생각과 감사의 시간들입니다. 이 시간에는 특히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원리라고 하니까 무엇인가 거창하고 어렵게 보이지요? 그러나 실상은 너무나 간단하고 간결한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21절에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지금부터 그 원리를 추적해봅시다.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에 ‘헤론’이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헤론은 미국 테네시 주의 ‘테네시 의과 대학’이 생긴 이래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린 수재였습니다. 그 대학의 교수회가 수련을 마친 후 ‘교수로 남아 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한국의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언더우드’선교사보다 두 달 늦은 1885년 6월에 내한하여 ‘알렌’선교사의 ‘제중원’에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알렌이 선교사직을 물러난 후에 그는 제중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밤낮없이 헌신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5년 뒤인 1890년 여름에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다른 선교사들은 남한산성의 휴양지에서 쉬고 있었지만, 그는 폭염 속에서도 서울까지의 먼 거리를 드나들면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위와 과로에 지쳐 결국 자신도 이질에 걸려 3주간 앓다가 1890년 7월 16일 이역만리 낮선 땅에서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남겨 두고 순직함으로써 그의 짧은 인생을 선교지 한국에서 마쳤습니다. 그의 시신은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에 최초로 묻혔습니다.
헤론 선교사는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순교해야 했습니까? 전염병이 창궐하던 때에 다른 선교사들처럼 요양지로 피신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만일 요양지로 피신했더라면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헤론 선교사가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며 봉사와 섬김을 계속했던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에 주님의 손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었으며,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본문 29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고 하시고, 누가복음 22:42절에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셨습니다. 즉 자신의 뜻과 자신의 기쁨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한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외면적이며 세상적인 것을 기쁨으로 삼습니다. 수입이 많아졌다고 기뻐하고, 진급이 되었다고 기뻐하고, 아이들의 성적이 좋아졌다고 기뻐합니다. 이런 기쁨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똑같이 추구하는 외면적인 기쁨입니다. 구원받은 것,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는 것,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것. 이러한 것은 전혀 기쁨으로 여기지를 못합니다. 만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하고자 하시는 일을 분별하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 곧 로마서 12:2절에서 말씀하신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삶의 현장을 추적해 봅시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합시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중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자신들이 도리어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네가 누구냐?”라며 꼬투리 잡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십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는지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다음의 말씀들이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과 삶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3절,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절,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저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6절,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28절,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왔던 메시아였습니다. 그리고 심판자가 아닌 오직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로서의 사역에 충실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라고 하신 것은 ‘심판할 것들이 많지만 지금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메시아의 사역에 순종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의 원리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보이신 삶의 원리를 찾아봅시다.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보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삶의 원리를 살펴봅시다. 사람이 오랫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갈수록 그 사람에게 명확하게 드러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평가하고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말로 전문가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무슨 일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를 만나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완벽한 기준에 비추어 보아 자신의 평가가 얼마나 부정확하고 초라했던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런대로 선하게 사는가?’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성장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나는 예수님처럼 사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신앙의 성장목표를 에베소서 4:13절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수록 더욱 깊이 죄의 대가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죄의 무서움과 비참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죄의 결과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음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록 참회하는 깊은 슬픔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것이나, 이사야 선지자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알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용서받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4절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십니다. 또한 시편 34:18절에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자신과 죄의 참혹함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깊은 깨달음과 복종의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으로 나타내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는 삶을 보이셨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시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즉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철저하게 복종하신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그리스도인들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29절을 봅시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항상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였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6:38-39 상반절에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또한 5:30절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하시며, 4:34절에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삶의 원리는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양식’이란 생명을 있게 하는 근본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 자신을 살게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자신을 비우시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후, 예수님을 대신한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요한복음 14: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즉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모든 진리를 다시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삼위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입니다. 성삼위 하나님도 하나이시며, 뜻도 하나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성도들도 가진 생각과 뜻이 하나여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존재합니다. 요한복음 17: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물고기가 물 안에서 마음껏 호흡하며 헤엄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무한한 자유와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이며, 이를 위하여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강절에 자신을 돌아보며 확인해야 하는 것은 ‘이렇게 나 자신 속에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가는가?’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산에 사는 어느 애견가가 좋은 개 한 마리를 키웠습니다. 개를 아주 좋아했으며 훈련을 잘 시켰습니다. 그래서 개에게 물건을 사오도록 심부름을 시키곤 했습니다. 텔레비전에도 가끔 나오듯이, 장바구니에다가 돈을 넣고 사야할 품목을 적은 쪽지를 거기 다 넣어서 개에다가 물려주면 개가 가게에 가서 장을 보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 개는 동네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이 가정이 직장을 따라 대구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한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주인은 자신이 지금 대구에 와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예전처럼 개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개가 장바구니를 입에 물고 집을 떠났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주인은 개가 무슨 변을 당했는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삼일이 지난 오후 시간에 부산에 있는 가게에서 이 주인에게로 전화가 왔습니다. ‘개가 심부름 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집스럽게도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2,3)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보실 때에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 지금 세상에는 넘쳐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힘씁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삶으로 본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원리였습니다. 이 평화의 계절에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깊은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주님을 닮아,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