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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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12-06 20:58
***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라. / 요한복음 9:30-41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9:30-41,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한 주택가 골목 입구에 두 개의 구멍가게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주택에 사는 어느 부인은 꼭 골목 아래쪽에 있는 가게에서만 물건을 샀습니다. 한 번은 이웃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집 아이들이 저를 알아보기 때문이에요.”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시인이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때 대학 관계자가 시인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일이 싫지는 않으세요?”
시인은 놀란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싫어하다니요? 어째서 내가 싫어하겠습니까? 나는 일생 동안 이런 일을 기다렸는데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주고 환영해 주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섭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며, 삶의 활력이 일어나게 합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요? 아마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거나 중요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더 좋겠지요. 하물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12절을 봅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시험(test)을 통과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강절 첫 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합니다. 대강절 혹은 대림절은 성탄절 전 4주간 동안 지키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성도는 구원의 길이 되시려고 2000년 전에 사람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지금도 주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오시는 예수님께 감사하며,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대로 영원한 삶의 자리로 영접하러 오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부끄러움 없이 만나기 위하여 지금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15절에서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합시다.
분문의 이야기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께 인정받는 구원의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9장 전체를 할애했습니다. 그만큼 비중 있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이야기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과 ‘아브라함의 참 자손’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성난 유대인들에게 쫓겨났습니다. 성전에서 나오신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이 사람이 소경으로 출생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고 소경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불러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간단하게 “선지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래도 믿을 수가 없어서 소경 되었던 사람의 부모를 만나서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는 ‘확실히 소경으로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지만 눈을 뜨게 된 것은 아들이 장성했으니 직접 물어보라.’고 어정쩡하게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사람은 출교시키기로 결의했으므로 그것을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불러서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즉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인정하지 말라.’는 협박이었습니다. 그러나 소경 되었던 사람은 당당하면서도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읽었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 30-33절의 내용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밝힌 소경 되었던 사람의 신앙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네가 죄인으로 난 주제에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면서 쫓아냈습니다.
소경 되었던 사람이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인자를 믿는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사람은 “그가 누구십니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즉시 “내가 믿습니다.”라며 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8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참 자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9장에서는 육신의 소경이 진짜 소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 진짜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핍박하며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장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선한 목자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선민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유대인들은 영적인 소경일 뿐만 아니라 선택 받은 백성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의 거장인 헬렌 켈러 여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캄캄한 육신적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자서전에서 “들을 수 없다는 것보다, 말할 수 없다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볼 수 없다는 고통이다. 아, 내가 오직 볼 수만 있다면…”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후일 ‘앤 설리번’ 선생의 도움으로 영의 눈을 뜨게 된 후에는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 육체의 눈을 잃어버림보다 더 큰 비극은 마음의 눈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영의 눈이 열려있습니까? 혹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세상적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는 영적 소경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선민이라고 자부하면도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육신의 욕망과 세상적인 관심으로 주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을 영적 소경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사람입니까? 이 대답을 위하여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이나, 철저한 신앙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백성이 아니라, 나면서 소경 되었던 사람처럼 하나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인정하고 영접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면서 소경 되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당당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앞에서 9장의 내용을 길게 설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따지는 것도 많고 이유도 많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한 술 더 떠서 신앙에 대한 교만이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자신들만큼 하나님을 잘 알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조차도 바리새인들에게 정죄를 당하셨습니다. 소경의 부모도 단순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세워놓은 출교법이 무서워서 사실조차 떳떳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원인은 한 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2:43절입니다.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세상을 택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더 크다면 당연히 어떤 환경과 고난이 있더라도 머뭇거림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택할 것입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그러했습니다. 소경 되었던 사람이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쫓겨났다는 것은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네가 인자를 믿는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사람은 “그가 누구십니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라고 단순하게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즉시 “내가 믿습니다.”라며 절했습니다. 얼마나 간단명료합니까? 이 사람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체험하고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대답은 확신 있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단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목적지도 모르면서 두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 군대와 대진하여 있을 때,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 때문에 모두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아직 소년이었던 다윗이 심부름으로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당장에 떨치고 일어섰습니다. 손에 달랑 물매만 들고서 달려가며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고 했습니다. 정말 단순한 믿음입니다.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보기 위해 거리의 뽕나무로 올랐던 삭개오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라는 예수님의 말을 듣는 순간에 즉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자진해서 헌신적 결단을 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예수님의 제자들, 백부장, 수로보니게 여인 등. 이들의 신앙은 단순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고 구원을 얻고 은총을 입었습니다.
반면에 사울 왕처럼 변명과 의심으로 가득 찬 사람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 또한 마음이 복잡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보다 돈과 명예를 더 사랑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마 25:24,25) 참 복잡합니다. 디모데후서 4:10절에서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라고 바울이 탄식합니다. 이유도 많고, 탈도 많고, 따지는 것도 많은 이들의 결국은 버림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계속하려면 밤새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처럼 세상에 두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여러분이 필요하시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여러분을 만드셨고 지금까지 살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소경에 대하여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도록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가장 지름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따지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어떤 사람이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 8:22)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따지고 계산하지 말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저것 계산하면 돈만 보이고 세상만 보이지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멘’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게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말씀을 순전하게 믿고 순종하셔서, 이 대강절에 하나님께 인정받고 영원한 삶을 예비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9:30-41,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한 주택가 골목 입구에 두 개의 구멍가게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주택에 사는 어느 부인은 꼭 골목 아래쪽에 있는 가게에서만 물건을 샀습니다. 한 번은 이웃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집 아이들이 저를 알아보기 때문이에요.”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시인이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때 대학 관계자가 시인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일이 싫지는 않으세요?”
시인은 놀란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싫어하다니요? 어째서 내가 싫어하겠습니까? 나는 일생 동안 이런 일을 기다렸는데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주고 환영해 주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섭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며, 삶의 활력이 일어나게 합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요? 아마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거나 중요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더 좋겠지요. 하물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12절을 봅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시험(test)을 통과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강절 첫 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합니다. 대강절 혹은 대림절은 성탄절 전 4주간 동안 지키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성도는 구원의 길이 되시려고 2000년 전에 사람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지금도 주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오시는 예수님께 감사하며,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대로 영원한 삶의 자리로 영접하러 오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부끄러움 없이 만나기 위하여 지금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15절에서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합시다.
분문의 이야기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께 인정받는 구원의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9장 전체를 할애했습니다. 그만큼 비중 있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이야기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과 ‘아브라함의 참 자손’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성난 유대인들에게 쫓겨났습니다. 성전에서 나오신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이 사람이 소경으로 출생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고 소경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불러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간단하게 “선지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래도 믿을 수가 없어서 소경 되었던 사람의 부모를 만나서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는 ‘확실히 소경으로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지만 눈을 뜨게 된 것은 아들이 장성했으니 직접 물어보라.’고 어정쩡하게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사람은 출교시키기로 결의했으므로 그것을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불러서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즉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인정하지 말라.’는 협박이었습니다. 그러나 소경 되었던 사람은 당당하면서도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읽었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 30-33절의 내용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밝힌 소경 되었던 사람의 신앙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네가 죄인으로 난 주제에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면서 쫓아냈습니다.
소경 되었던 사람이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인자를 믿는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사람은 “그가 누구십니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즉시 “내가 믿습니다.”라며 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8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참 자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9장에서는 육신의 소경이 진짜 소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 진짜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핍박하며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장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선한 목자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선민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유대인들은 영적인 소경일 뿐만 아니라 선택 받은 백성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의 거장인 헬렌 켈러 여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캄캄한 육신적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자서전에서 “들을 수 없다는 것보다, 말할 수 없다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볼 수 없다는 고통이다. 아, 내가 오직 볼 수만 있다면…”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후일 ‘앤 설리번’ 선생의 도움으로 영의 눈을 뜨게 된 후에는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 육체의 눈을 잃어버림보다 더 큰 비극은 마음의 눈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영의 눈이 열려있습니까? 혹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세상적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는 영적 소경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선민이라고 자부하면도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육신의 욕망과 세상적인 관심으로 주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을 영적 소경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사람입니까? 이 대답을 위하여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이나, 철저한 신앙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백성이 아니라, 나면서 소경 되었던 사람처럼 하나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인정하고 영접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면서 소경 되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당당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앞에서 9장의 내용을 길게 설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따지는 것도 많고 이유도 많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한 술 더 떠서 신앙에 대한 교만이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자신들만큼 하나님을 잘 알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조차도 바리새인들에게 정죄를 당하셨습니다. 소경의 부모도 단순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세워놓은 출교법이 무서워서 사실조차 떳떳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원인은 한 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2:43절입니다.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세상을 택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더 크다면 당연히 어떤 환경과 고난이 있더라도 머뭇거림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택할 것입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그러했습니다. 소경 되었던 사람이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쫓겨났다는 것은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네가 인자를 믿는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사람은 “그가 누구십니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라고 단순하게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즉시 “내가 믿습니다.”라며 절했습니다. 얼마나 간단명료합니까? 이 사람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체험하고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대답은 확신 있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단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목적지도 모르면서 두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 군대와 대진하여 있을 때,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 때문에 모두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아직 소년이었던 다윗이 심부름으로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당장에 떨치고 일어섰습니다. 손에 달랑 물매만 들고서 달려가며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고 했습니다. 정말 단순한 믿음입니다.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보기 위해 거리의 뽕나무로 올랐던 삭개오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라는 예수님의 말을 듣는 순간에 즉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자진해서 헌신적 결단을 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예수님의 제자들, 백부장, 수로보니게 여인 등. 이들의 신앙은 단순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고 구원을 얻고 은총을 입었습니다.
반면에 사울 왕처럼 변명과 의심으로 가득 찬 사람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 또한 마음이 복잡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보다 돈과 명예를 더 사랑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마 25:24,25) 참 복잡합니다. 디모데후서 4:10절에서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라고 바울이 탄식합니다. 이유도 많고, 탈도 많고, 따지는 것도 많은 이들의 결국은 버림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계속하려면 밤새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처럼 세상에 두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여러분이 필요하시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여러분을 만드셨고 지금까지 살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소경에 대하여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도록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가장 지름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따지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어떤 사람이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 8:22)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따지고 계산하지 말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저것 계산하면 돈만 보이고 세상만 보이지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멘’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게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말씀을 순전하게 믿고 순종하셔서, 이 대강절에 하나님께 인정받고 영원한 삶을 예비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