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부르는 인생, 화를 부르는 인생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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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11-25 21:32
*** 복을 부르는 인생, 화를 부르는 인생 / 민 14:20-30
** 들어가는 말
민수기 14:20-30, “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21 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22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25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하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2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아무리 지혜롭고 권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7:14절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의 앞날을 미리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앞날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는 길은 열어두셨습니다. 즉 ‘복의 길과 화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30:19절에서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도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면서 자신의 단호한 결단으로 본을 보였습니다. 여호수아 24:15절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지금 여러분은 어떤 결단으로 이곳까지 왔습니까?
영국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윌리엄 서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대표작인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화가 ‘고갱’을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제목에 나오는 ‘6펜스’란 영국 은화 중 최저단위입니다. 그래서 ‘달’은 품위와 고상함의 대명사로, ‘6펜스’는 세속적인 대명사로 사용된 것입니다. 달도 6펜스도 모두 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모양이라는 점에서 더 재미있는 대조가 됩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추구하는 순수한 예술을 달로 표현했고, 명예나 돈을 인생의 최고로 삼는 세속적 인간의 이상을 6펜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사람들이 이 두 사이를 선택하며 추구하는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가 없습니다. ‘달의 사람이 되느냐? 6펜스짜리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은 누구나가 해야 하는 결정입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니콜러스 머레이’는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 부류는 이렇습니다.
하나는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입니다. 세상의 중요한 일은 언제나 이 소수 몇 사람이 하게 됩니다. 둘째는 일을 그르치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어느 사회나 일을 그르치는 부류가 존재합니다. 실제로 역사는 몇 사람의 정신병자 때문에 온 인류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몇 사람의 독재자, 사기꾼, 아첨꾼, 이기주의자들이 그 부류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잘못된 것을 보고도 수수방관하는 부류입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알고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는 이기주의자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사람에게는 세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물을 볼 수 있는 육신의 눈이며, 둘째는 글을 깨달을 수 있는 지식의 눈이며, 셋째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의 눈, 즉 믿음의 눈이 그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육신의 눈이 어두운 사람을 ‘장님’이라 하고, 지식의 눈이 어두운 사람을 가리켜 ‘문맹’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사람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짐승’입니다. 창세기 6: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육체’란, ‘영이 없는 짐승의 몸’을 말합니다. 특히, 성도라고 자처하면서도 믿음의 눈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맹신자’라고 합니다. 즉, 알고 깨달음으로써 믿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따르는 맹목적인 신자’라는 뜻입니다. 바로 본문의 내용인 출애굽 하여 광야여행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했던 절대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고귀한 인생을 헛되이 낭비해야만 했습니다. 복을 눈앞에 두고 화를 택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신뢰한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미성년자들은 복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일반 백성들과 달랐던 점은, 믿음의 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땅을 볼 수 있게 하고, 차지할 수 있는 길을 알게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볼 수 있는 영의 눈,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을 선택할 수 있고 그 복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눈만 가지면 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사건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2년 만에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 진을 쳤습니다. ‘가데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 입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올라가서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을 좀 보십시오. 백성들은 정탐꾼을 보내서 미리 지형과 환경을 알아두자고 제의했습니다. 정말 그럴듯한 제안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각 지파 중, 두령을 뽑아서 12명의 정탐꾼으로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을 파송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표시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것을 사람이 검증해보자고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불신의 사람들을 본문 22절에서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저것 계산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말씀만 믿고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이 볼 수 있는 육신의 눈을 더 신뢰했습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는 백성들이 생각했던 모든 꿈을 부수어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견고한 성벽, 거인 족, 엄청난 군사력과 철병거들 등. 사람의 계산으로는 그 땅을 차지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무기도 변변찮았고, 오합지졸 같은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의 표현을 보십시오. 민수기 13:33절입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복의 길을 앞에 두고 화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은 복의 길을 앞에 두고 세상적인 계산으로 스스로 화의 길을 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복과 화의 기로에 서 있는 인생입니다.
가나안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만 복과 화의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는 모든 인생들은 복과 화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기로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정탐꾼을 파송한 백성들은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로 모든 희망을 잃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버젓한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에서 독립된 나라로 살 희망이 눈앞에 있는데 얼마나 차지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들의 희망을 안고 떠났던 12명의 정탐꾼이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메고 왔고, 여러 가지 과실을 가지고 와서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들떴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일어나서 그 땅으로 행진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 6:11절에서 이 사실을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라고 표현하십니다. 약속의 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복이었습니다.
바로 민수기13:26-29절까지가 정탐꾼들이 눈으로 확인한 일반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만 더했더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꿈으로 들떠 있는 백성들의 마음에 절망감이 엄습하는 부정적인 보고가 이어졌습니다. 민수기13:31-33절을 봅시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는 10명의 정탐꾼이 자신들의 생각을 말한 것입니다. 12명 중에서 10명은 절대다수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길에는 다수가 이기는 민주주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20세 이상 군사만 60만 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60만 명 중에서 두 명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복의 길을 선택했고, 두 명을 제외한 전부가 화의 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만 복과 화의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는 모든 인생들은 복과 화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어느 길이든지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한 길을 가야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는 인생길이 복의 길입니까? 아니면 화의 길입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아직도 양쪽을 저울질하면서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여러분, 신앙의 길에는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모두를 누릴 수 있는 적당한 길이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16:13절에서 예수님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과 세상, 둘 다를 가질 수 없음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3:16절에서는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복을 부르는 인생길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27-30절을 읽어 봅시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두려운 선언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언에서 우리가 복을 부르는 인생길을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머무는 자리를 잘 찾는 것입니다. 사고 잘 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같은 무리로 취급을 받습니다. 돼지우리에 있다가 나오면 더러운 냄새가 나고, 꽃집에 있다가 나오면 꽃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잘 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의 무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 있는 인생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시편 1:1-2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성도들을 가까이 하고, 교회를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눈에 들게 되고 은혜가 부어집니다.
두 번째는 입으로 복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행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모든 일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므로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순종합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생각을 앞세워 성공한 사례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멘’으로 응답하고, 생활로 실천하십시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인생은 매일 매순간의 삶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당연히 이 선택에서 믿음의 눈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평가하고 선택하면 결단코 복의 길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광야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사람의 평가를 신뢰했다가 화를 자초했음을 기억합시다. 오직 머무는 자리를 잘 찾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고 입으로 또는 삶으로 복을 시인합시다. 우리가 지나는 바란광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향하여 가는 길에 잠시 통과하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 길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결코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생애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복을 부르는 인생의 길이 되기시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민수기 14:20-30, “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21 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22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25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하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2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아무리 지혜롭고 권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7:14절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의 앞날을 미리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앞날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는 길은 열어두셨습니다. 즉 ‘복의 길과 화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30:19절에서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도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면서 자신의 단호한 결단으로 본을 보였습니다. 여호수아 24:15절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지금 여러분은 어떤 결단으로 이곳까지 왔습니까?
영국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윌리엄 서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대표작인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화가 ‘고갱’을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제목에 나오는 ‘6펜스’란 영국 은화 중 최저단위입니다. 그래서 ‘달’은 품위와 고상함의 대명사로, ‘6펜스’는 세속적인 대명사로 사용된 것입니다. 달도 6펜스도 모두 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모양이라는 점에서 더 재미있는 대조가 됩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추구하는 순수한 예술을 달로 표현했고, 명예나 돈을 인생의 최고로 삼는 세속적 인간의 이상을 6펜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사람들이 이 두 사이를 선택하며 추구하는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가 없습니다. ‘달의 사람이 되느냐? 6펜스짜리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은 누구나가 해야 하는 결정입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니콜러스 머레이’는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 부류는 이렇습니다.
하나는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입니다. 세상의 중요한 일은 언제나 이 소수 몇 사람이 하게 됩니다. 둘째는 일을 그르치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어느 사회나 일을 그르치는 부류가 존재합니다. 실제로 역사는 몇 사람의 정신병자 때문에 온 인류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몇 사람의 독재자, 사기꾼, 아첨꾼, 이기주의자들이 그 부류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잘못된 것을 보고도 수수방관하는 부류입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알고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는 이기주의자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사람에게는 세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물을 볼 수 있는 육신의 눈이며, 둘째는 글을 깨달을 수 있는 지식의 눈이며, 셋째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의 눈, 즉 믿음의 눈이 그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육신의 눈이 어두운 사람을 ‘장님’이라 하고, 지식의 눈이 어두운 사람을 가리켜 ‘문맹’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사람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짐승’입니다. 창세기 6: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육체’란, ‘영이 없는 짐승의 몸’을 말합니다. 특히, 성도라고 자처하면서도 믿음의 눈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맹신자’라고 합니다. 즉, 알고 깨달음으로써 믿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따르는 맹목적인 신자’라는 뜻입니다. 바로 본문의 내용인 출애굽 하여 광야여행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했던 절대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고귀한 인생을 헛되이 낭비해야만 했습니다. 복을 눈앞에 두고 화를 택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신뢰한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미성년자들은 복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일반 백성들과 달랐던 점은, 믿음의 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땅을 볼 수 있게 하고, 차지할 수 있는 길을 알게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볼 수 있는 영의 눈,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을 선택할 수 있고 그 복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눈만 가지면 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사건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2년 만에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 진을 쳤습니다. ‘가데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 입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올라가서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을 좀 보십시오. 백성들은 정탐꾼을 보내서 미리 지형과 환경을 알아두자고 제의했습니다. 정말 그럴듯한 제안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각 지파 중, 두령을 뽑아서 12명의 정탐꾼으로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을 파송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표시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것을 사람이 검증해보자고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불신의 사람들을 본문 22절에서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저것 계산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말씀만 믿고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이 볼 수 있는 육신의 눈을 더 신뢰했습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는 백성들이 생각했던 모든 꿈을 부수어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견고한 성벽, 거인 족, 엄청난 군사력과 철병거들 등. 사람의 계산으로는 그 땅을 차지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무기도 변변찮았고, 오합지졸 같은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의 표현을 보십시오. 민수기 13:33절입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복의 길을 앞에 두고 화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은 복의 길을 앞에 두고 세상적인 계산으로 스스로 화의 길을 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복과 화의 기로에 서 있는 인생입니다.
가나안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만 복과 화의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는 모든 인생들은 복과 화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기로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정탐꾼을 파송한 백성들은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로 모든 희망을 잃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버젓한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에서 독립된 나라로 살 희망이 눈앞에 있는데 얼마나 차지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들의 희망을 안고 떠났던 12명의 정탐꾼이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메고 왔고, 여러 가지 과실을 가지고 와서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들떴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일어나서 그 땅으로 행진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 6:11절에서 이 사실을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라고 표현하십니다. 약속의 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복이었습니다.
바로 민수기13:26-29절까지가 정탐꾼들이 눈으로 확인한 일반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만 더했더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꿈으로 들떠 있는 백성들의 마음에 절망감이 엄습하는 부정적인 보고가 이어졌습니다. 민수기13:31-33절을 봅시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는 10명의 정탐꾼이 자신들의 생각을 말한 것입니다. 12명 중에서 10명은 절대다수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길에는 다수가 이기는 민주주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20세 이상 군사만 60만 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60만 명 중에서 두 명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복의 길을 선택했고, 두 명을 제외한 전부가 화의 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만 복과 화의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는 모든 인생들은 복과 화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어느 길이든지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한 길을 가야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는 인생길이 복의 길입니까? 아니면 화의 길입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아직도 양쪽을 저울질하면서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여러분, 신앙의 길에는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모두를 누릴 수 있는 적당한 길이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16:13절에서 예수님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과 세상, 둘 다를 가질 수 없음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3:16절에서는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복을 부르는 인생길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27-30절을 읽어 봅시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두려운 선언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언에서 우리가 복을 부르는 인생길을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머무는 자리를 잘 찾는 것입니다. 사고 잘 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같은 무리로 취급을 받습니다. 돼지우리에 있다가 나오면 더러운 냄새가 나고, 꽃집에 있다가 나오면 꽃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잘 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의 무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 있는 인생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시편 1:1-2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성도들을 가까이 하고, 교회를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눈에 들게 되고 은혜가 부어집니다.
두 번째는 입으로 복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행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모든 일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므로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순종합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생각을 앞세워 성공한 사례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멘’으로 응답하고, 생활로 실천하십시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인생은 매일 매순간의 삶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당연히 이 선택에서 믿음의 눈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평가하고 선택하면 결단코 복의 길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광야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사람의 평가를 신뢰했다가 화를 자초했음을 기억합시다. 오직 머무는 자리를 잘 찾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고 입으로 또는 삶으로 복을 시인합시다. 우리가 지나는 바란광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향하여 가는 길에 잠시 통과하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 길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결코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생애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복을 부르는 인생의 길이 되기시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