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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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11-03 20:38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 / 누가복음 6:6-11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6:6-11,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실험 - 사람의 관심/ (준비물-모서리에 작은 검은 점을 흰 손수건) 성도들에게 무엇이 보이는지를 묻는다.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라고 말한다(대부분 작은 검은 점이 있음을 말할 것이다.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흰 부분을 깨닫지 못한다.).
미국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실험 하나를 TV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강당에 수십 명을 모아 놓고 문제를 냈습니다. 문제는 “화면에 등장하는 두 선수가 농구공을 몇 번이나 주고받는지를 알아맞히는 것”이었습니다. 두 선수는 온갖 현란한 묘기를 부려 가며 농구공을 주고받았습니다.
사회자가 화면을 끄고 한 사람씩 지명하여 농구공을 주고받은 횟수를 물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회자는 다시 “화면에 두 선수 말고 다른 이상한 것을 본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전에 전혀 예고하지 않았던 문제인지라 정답을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회자가 다시 화면을 켠 뒤 이번에는 아무런 목적의식을 갖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보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두 선수가 농구공을 주고받는 동안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뒤에 등장해서 이상한 포즈를 취하는가 하면, 두 선수를 툭툭 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의 실험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두 실험에서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편협하고 믿을 것이 못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보려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이익에 관계된 것에 강한 관심을 보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형식적으로 지나치거나 부정적인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관심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자기관심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배, 모임, 헌신과 봉사 등등. 오직 자신의 평안함과 이익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우상이 되는 자기종교일 뿐입니다. 진실한 신앙은 하나님의 관심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보면서 여러분의 관심을 살펴서 하나님의 관심에 맞추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으로 가르치실 때, 의도적으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의도적으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예수님을 고소할 핑계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치시고, 그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을 자라서 비벼 먹는 것을 그들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고발하려고 벼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예배자들 중에 있던 ‘손 마른 병자’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사람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병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고, 병자는 순종하여 그 손을 내밀 때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병 고침을 받은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의도가 들통이 나기도 했지만, 드러내놓고 안식일 법을 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병 고침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관심을 책망하시며 바른 관심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은 ‘손 마른 병자를 고치신 이적’보다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심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이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17절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7:21절에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관심에 맞추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이 자리에 있을 이유도 없겠지요. 그러면 두 가지를 살펴봅시다.
첫째,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인가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신구약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관심을 말하라고 한다면, 예레미야 29:11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신 것과 요한복음 10: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신 것, 그리고 디모데전서 2: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본문의 의도대로 안식일, 즉 주일과 관계된 하나님의 관심을 살펴보려합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시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화가 잔뜩 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겨냥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게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분노한 이유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정을 어기고 무시하며,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안식일에 대한 금기 규정들만도 수백 가지나 되었고, 그것을 지키도록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권위와 율법에 도전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이 만든 안식일 규정의 근본은 십계명 중에서 제4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8-11절을 봅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참고로, 당시의 안식일 규정을 봅시다. 안식일 규정에는 일의 일반적인 성격에 따라 안식일에 하지 못하는 일을 39가지로 분류했습니다. 게다가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39가지의 모형을 각각 나누어 2차 분류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 중에 ‘짐을 나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2차로 ‘짐’에 대하여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마른 돼지의 무게와 맞먹는 음식, 한 잔 이상의 술, 제비 한 마리에게 필요한 정도 이상의 우유, 상처에 바르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꿀, 예식에 필요한 정도 이상의 기름, 안 연고를 개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물, 광고를 쓰는데 필요한 이상의 종이, ‘오, 이스라엘이여 들을지어다.’라고 쓰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양피지, 알파벳 두 자 이상을 쓸 수 있는 잉크, 펜을 하나 만들고도 남을 정도의 갈대”
등이 모두 짐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물론 ‘병 고치는 일’도 안식일에 금지된 일 중에 하나였습니다. 세부 규정에는 어떠한 병이라 할지라도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 의료 조치만 허락할 뿐, 호전시키는 어떤 조치도 금지하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안식일의 법인 제4계명이 사람을 위해 주신 법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법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2:27-28절에서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법을 위하여 법을 지키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잘못을 지적하셨고, 그것을 고치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에 있어서 ‘주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에도 성도들이 주일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즉 주일에 일을 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 또한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가능한가? 등산이나 피서, 레저스포츠라는 명목 하에 개인적인 오락을 즐기는 것이 타당한가? 등등.
먼저 이사야 58:13-14절을 봅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그렇다면 ‘이 안식일 법이 주일에도 적용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답은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일(主日)’이라는 날이 ‘안식일(安息日)’을 완전히 무시한 다른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일(主日)’은 말 그대로 ‘주인의 날’ 즉 ‘하나님의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쉬신 ‘안식(安息)’의 뜻과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날’의 뜻을 합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보다 오히려 더 강화된 날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 법을 우리 생활에는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답을 제시하셨습니다. 주일에 가능한 일은 ①선을 행하고, ②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즉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8:13-14절의 말씀에서 ‘안식일을 하나님께 바쳐진 날로 대하라. 즐거운 날로 대하라. 존귀한 날로 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행을 하지 말라. 돈 버는 일 하지 말라. 오락과 취미생활 하지 말라. 사사로운 말을 하지 말라.’(현대어성경/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안식일을 나의 거룩한 날로 지켜라! 안식일에도 너희의 용건에 따라서 여행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함으로써 나의 거룩한 날을 너희의 날로 쓰지 말아라. 안식일에는 너희가 다니고 싶은 곳으로 다니지도 말고 너희가 원하는 일도 하지 말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지도 말아라! 오직 그날을 기쁜 날로 여기며 나 여호와의 거룩한 날로만 지켜라!)고 하십니다. “사사로운 말”을 쉬운 말 성경에는 “너의 멋대로 말하지 말라”, 현대인의 성경에는 “잡담하지 말라.”, 표준새번역에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 성도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말, 전도하는 말, 이런 말은 할지언정 필요 없는 말들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주일에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나, 사사로운 즐거움을 위하여 오락을 행하는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8.28~1832.3.22)는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정치가, 과학자였습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복음서의 윤리에 존경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집에는 언제나 정치가, 군인, 실업가 등. 괴테의 문학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사람이 와서 타인의 흉을 보거나 음담패설(淫談悖說)을 하면 괴테는 눈을 부릅뜨고 엄하게 경고를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우리 집에 종이를 흘리거나 음식 부스러기를 흘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남의 험담이나 음담패설을 흘리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 더러운 말들은 모두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더러운 말들을 저희 집에 가져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흉보는 것은 우리 집의 공기를 더럽히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룩한 주일에 사사로운 잡담하지 말고 남을 흉보거나 비난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일에는 병든 자들을 찾아가서 위문하거나,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날을 복 주시며, 서로 음식을 나누며 즐거워하라고 하신 대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와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이렇게 주일을 주일답게 지켜서 하나님의 관심과 은총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이적을 체험한 손 마른 병자를 봅시다.
복음서 기자들 중에 유독 의사 출신인 ‘누가’만 그 사람의 마른 손이 오른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라면, 이 병자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복음서’라는 오래 된 외경(정경화 과정에서 성경이 되지 못한 단편)이 있는데, 그 곳에는 이 병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석수 장이었습니다. 손 가지고 밥 벌어먹는 놈이 이제 손이 말라 버렸으니 이 무슨 천형이란 말입니까? 예수시여, 바라옵건대 나에게 건강을 되찾게 해주시어 이 수치스러운 거지의 신세를 면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차가운 시선과 병자의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호소 사이에 서게 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사람의 법이나 시선이나 관심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십니다. 독을 품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병자’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바로 이 병이 나음 받는 상황에서의 병자를 봅시다.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 일어선 병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시험이었습니다. 그 병자가 ‘당신은 내 손이 마른 것도 모르신다는 말씀입니까? 이 마른 손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에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그 순간 말랐던 혈관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죽었던 피부가 살아났습니다. 병을 고침 받은 것입니다.
기적을 경험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생각 속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상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의심’과 ‘염려’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소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 없는 신뢰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마태복음 21:21-2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오늘 말씀 속에서 두 가지의 큰 의미를 깨달았습니까? 주일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위험을 아셨습니까? 주일을 형식적인 예배로 때우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날을 인정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성도들을 높이시고 잘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 없는 신뢰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기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와 순종, 그리고 의심 없는 신뢰와 응답으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참조예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적(敵)이 쳐 들어와도 무기를 들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죽었습니다. 안식일에 무기를 들고 사느니보다는 무기를 들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다가 죽겠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이제는 방어(防禦)는 하자, 왜냐하면 너무 많이 죽으니까, 그리고 적들이 그것을 알고 안식일에 공격해 오니까, 그래서 방어는 하지만 절대로 공격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안식일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생명을 다 해서 지키려고 했더니 역사가들은 말하기를 오히려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00년 동안 나라가 없는 가운데서 독립하게 해 주었고, 40배나 되는 적 가운데 포위되어 있지만 날마다 승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안식일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미국의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테일러(Zachary Taylor)는 헌법에 따라서 1949년 3월 4일 주일에 대통령 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테일러 장군은 취임을 거절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못되었으면 못되었지 주일까지 범해가면서 대통령이 될 생각은 없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일렀습니다. 국가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했지만 통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어서 주일 12시부터 월요일 12시까지 24시간, 하루 동안의 임시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당시 상원의원장이었던 데이빗 라임스 엘치슨 이라는 사람이 하루 동안의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엘치슨은 토요일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서 24시간 동안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는 주일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법 위에 있음을 믿고 주일에 대통력에 취임하는 것을 거절하는 이런 위대한 신앙인들이 미국을 미국 되게 만든 것입니다. 24시간 동안 임시 대통력직을 안식일에 하지 않으려고 잠으로 메워 버리는 이들이 바로 미국의 정신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개인을 높여주시고, 나라를 뛰어난 민족이 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왜 우리나라가 바벨론에 멸망되었느냐, 안식일을 제대로 안 지켜서 그렇게 되었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아웅산 참사 때에 죽은 대부분의 각료들이 기독교계 장로와 집사, 권사들이었습니다. 아웅산 묘소 참배 시간이 주일 11시였습니다.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각하! 오늘은 주일입니다. 다음날로 미루십시다.”했더라고 하면 그런 참사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913년 10월 17일, 독일이 영국을 침략했습니다. 웰링턴 장군에게 대패(大敗)를 당했습니다. 그 날이 바로 주일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眞珠灣)을 공격했습니다. 4년 후에 원자탄 세례를 받고 무조건 항복을 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주일 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남쪽을 침략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주일 새벽이었습니다. 주일을 범하면 망합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10일 일하고 하루 쉬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 보니까 40%의 생산량이 떨어졌습니다. 소련의 레닌이 기독교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 7일 동안 일하고 하루 쉬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생산성이 30% 떨어졌습니다. 할 수 없이 성경의 원리대로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원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6:6-11,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실험 - 사람의 관심/ (준비물-모서리에 작은 검은 점을 흰 손수건) 성도들에게 무엇이 보이는지를 묻는다.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라고 말한다(대부분 작은 검은 점이 있음을 말할 것이다.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흰 부분을 깨닫지 못한다.).
미국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실험 하나를 TV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강당에 수십 명을 모아 놓고 문제를 냈습니다. 문제는 “화면에 등장하는 두 선수가 농구공을 몇 번이나 주고받는지를 알아맞히는 것”이었습니다. 두 선수는 온갖 현란한 묘기를 부려 가며 농구공을 주고받았습니다.
사회자가 화면을 끄고 한 사람씩 지명하여 농구공을 주고받은 횟수를 물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회자는 다시 “화면에 두 선수 말고 다른 이상한 것을 본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전에 전혀 예고하지 않았던 문제인지라 정답을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회자가 다시 화면을 켠 뒤 이번에는 아무런 목적의식을 갖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보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두 선수가 농구공을 주고받는 동안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뒤에 등장해서 이상한 포즈를 취하는가 하면, 두 선수를 툭툭 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의 실험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두 실험에서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편협하고 믿을 것이 못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보려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이익에 관계된 것에 강한 관심을 보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형식적으로 지나치거나 부정적인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관심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자기관심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배, 모임, 헌신과 봉사 등등. 오직 자신의 평안함과 이익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우상이 되는 자기종교일 뿐입니다. 진실한 신앙은 하나님의 관심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보면서 여러분의 관심을 살펴서 하나님의 관심에 맞추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으로 가르치실 때, 의도적으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의도적으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예수님을 고소할 핑계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치시고, 그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을 자라서 비벼 먹는 것을 그들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고발하려고 벼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예배자들 중에 있던 ‘손 마른 병자’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사람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병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고, 병자는 순종하여 그 손을 내밀 때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병 고침을 받은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의도가 들통이 나기도 했지만, 드러내놓고 안식일 법을 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병 고침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관심을 책망하시며 바른 관심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은 ‘손 마른 병자를 고치신 이적’보다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심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이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17절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7:21절에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관심에 맞추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이 자리에 있을 이유도 없겠지요. 그러면 두 가지를 살펴봅시다.
첫째,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인가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신구약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관심을 말하라고 한다면, 예레미야 29:11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신 것과 요한복음 10: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신 것, 그리고 디모데전서 2: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본문의 의도대로 안식일, 즉 주일과 관계된 하나님의 관심을 살펴보려합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시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화가 잔뜩 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겨냥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게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분노한 이유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정을 어기고 무시하며,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안식일에 대한 금기 규정들만도 수백 가지나 되었고, 그것을 지키도록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권위와 율법에 도전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이 만든 안식일 규정의 근본은 십계명 중에서 제4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8-11절을 봅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참고로, 당시의 안식일 규정을 봅시다. 안식일 규정에는 일의 일반적인 성격에 따라 안식일에 하지 못하는 일을 39가지로 분류했습니다. 게다가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39가지의 모형을 각각 나누어 2차 분류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 중에 ‘짐을 나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2차로 ‘짐’에 대하여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마른 돼지의 무게와 맞먹는 음식, 한 잔 이상의 술, 제비 한 마리에게 필요한 정도 이상의 우유, 상처에 바르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꿀, 예식에 필요한 정도 이상의 기름, 안 연고를 개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물, 광고를 쓰는데 필요한 이상의 종이, ‘오, 이스라엘이여 들을지어다.’라고 쓰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양피지, 알파벳 두 자 이상을 쓸 수 있는 잉크, 펜을 하나 만들고도 남을 정도의 갈대”
등이 모두 짐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물론 ‘병 고치는 일’도 안식일에 금지된 일 중에 하나였습니다. 세부 규정에는 어떠한 병이라 할지라도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 의료 조치만 허락할 뿐, 호전시키는 어떤 조치도 금지하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안식일의 법인 제4계명이 사람을 위해 주신 법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법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2:27-28절에서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법을 위하여 법을 지키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잘못을 지적하셨고, 그것을 고치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에 있어서 ‘주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에도 성도들이 주일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즉 주일에 일을 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 또한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가능한가? 등산이나 피서, 레저스포츠라는 명목 하에 개인적인 오락을 즐기는 것이 타당한가? 등등.
먼저 이사야 58:13-14절을 봅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그렇다면 ‘이 안식일 법이 주일에도 적용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답은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일(主日)’이라는 날이 ‘안식일(安息日)’을 완전히 무시한 다른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일(主日)’은 말 그대로 ‘주인의 날’ 즉 ‘하나님의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쉬신 ‘안식(安息)’의 뜻과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날’의 뜻을 합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보다 오히려 더 강화된 날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 법을 우리 생활에는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답을 제시하셨습니다. 주일에 가능한 일은 ①선을 행하고, ②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즉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8:13-14절의 말씀에서 ‘안식일을 하나님께 바쳐진 날로 대하라. 즐거운 날로 대하라. 존귀한 날로 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행을 하지 말라. 돈 버는 일 하지 말라. 오락과 취미생활 하지 말라. 사사로운 말을 하지 말라.’(현대어성경/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안식일을 나의 거룩한 날로 지켜라! 안식일에도 너희의 용건에 따라서 여행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함으로써 나의 거룩한 날을 너희의 날로 쓰지 말아라. 안식일에는 너희가 다니고 싶은 곳으로 다니지도 말고 너희가 원하는 일도 하지 말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지도 말아라! 오직 그날을 기쁜 날로 여기며 나 여호와의 거룩한 날로만 지켜라!)고 하십니다. “사사로운 말”을 쉬운 말 성경에는 “너의 멋대로 말하지 말라”, 현대인의 성경에는 “잡담하지 말라.”, 표준새번역에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 성도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말, 전도하는 말, 이런 말은 할지언정 필요 없는 말들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주일에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나, 사사로운 즐거움을 위하여 오락을 행하는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8.28~1832.3.22)는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정치가, 과학자였습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복음서의 윤리에 존경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집에는 언제나 정치가, 군인, 실업가 등. 괴테의 문학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사람이 와서 타인의 흉을 보거나 음담패설(淫談悖說)을 하면 괴테는 눈을 부릅뜨고 엄하게 경고를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우리 집에 종이를 흘리거나 음식 부스러기를 흘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남의 험담이나 음담패설을 흘리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 더러운 말들은 모두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더러운 말들을 저희 집에 가져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흉보는 것은 우리 집의 공기를 더럽히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룩한 주일에 사사로운 잡담하지 말고 남을 흉보거나 비난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일에는 병든 자들을 찾아가서 위문하거나,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날을 복 주시며, 서로 음식을 나누며 즐거워하라고 하신 대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와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이렇게 주일을 주일답게 지켜서 하나님의 관심과 은총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이적을 체험한 손 마른 병자를 봅시다.
복음서 기자들 중에 유독 의사 출신인 ‘누가’만 그 사람의 마른 손이 오른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라면, 이 병자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복음서’라는 오래 된 외경(정경화 과정에서 성경이 되지 못한 단편)이 있는데, 그 곳에는 이 병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석수 장이었습니다. 손 가지고 밥 벌어먹는 놈이 이제 손이 말라 버렸으니 이 무슨 천형이란 말입니까? 예수시여, 바라옵건대 나에게 건강을 되찾게 해주시어 이 수치스러운 거지의 신세를 면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차가운 시선과 병자의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호소 사이에 서게 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사람의 법이나 시선이나 관심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십니다. 독을 품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병자’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바로 이 병이 나음 받는 상황에서의 병자를 봅시다.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 일어선 병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시험이었습니다. 그 병자가 ‘당신은 내 손이 마른 것도 모르신다는 말씀입니까? 이 마른 손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에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그 순간 말랐던 혈관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죽었던 피부가 살아났습니다. 병을 고침 받은 것입니다.
기적을 경험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생각 속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상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의심’과 ‘염려’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소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 없는 신뢰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마태복음 21:21-2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오늘 말씀 속에서 두 가지의 큰 의미를 깨달았습니까? 주일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위험을 아셨습니까? 주일을 형식적인 예배로 때우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날을 인정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성도들을 높이시고 잘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 없는 신뢰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기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와 순종, 그리고 의심 없는 신뢰와 응답으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참조예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적(敵)이 쳐 들어와도 무기를 들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죽었습니다. 안식일에 무기를 들고 사느니보다는 무기를 들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다가 죽겠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이제는 방어(防禦)는 하자, 왜냐하면 너무 많이 죽으니까, 그리고 적들이 그것을 알고 안식일에 공격해 오니까, 그래서 방어는 하지만 절대로 공격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안식일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생명을 다 해서 지키려고 했더니 역사가들은 말하기를 오히려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00년 동안 나라가 없는 가운데서 독립하게 해 주었고, 40배나 되는 적 가운데 포위되어 있지만 날마다 승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안식일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미국의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테일러(Zachary Taylor)는 헌법에 따라서 1949년 3월 4일 주일에 대통령 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테일러 장군은 취임을 거절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못되었으면 못되었지 주일까지 범해가면서 대통령이 될 생각은 없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일렀습니다. 국가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했지만 통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어서 주일 12시부터 월요일 12시까지 24시간, 하루 동안의 임시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당시 상원의원장이었던 데이빗 라임스 엘치슨 이라는 사람이 하루 동안의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엘치슨은 토요일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서 24시간 동안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는 주일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법 위에 있음을 믿고 주일에 대통력에 취임하는 것을 거절하는 이런 위대한 신앙인들이 미국을 미국 되게 만든 것입니다. 24시간 동안 임시 대통력직을 안식일에 하지 않으려고 잠으로 메워 버리는 이들이 바로 미국의 정신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개인을 높여주시고, 나라를 뛰어난 민족이 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왜 우리나라가 바벨론에 멸망되었느냐, 안식일을 제대로 안 지켜서 그렇게 되었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아웅산 참사 때에 죽은 대부분의 각료들이 기독교계 장로와 집사, 권사들이었습니다. 아웅산 묘소 참배 시간이 주일 11시였습니다.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각하! 오늘은 주일입니다. 다음날로 미루십시다.”했더라고 하면 그런 참사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913년 10월 17일, 독일이 영국을 침략했습니다. 웰링턴 장군에게 대패(大敗)를 당했습니다. 그 날이 바로 주일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眞珠灣)을 공격했습니다. 4년 후에 원자탄 세례를 받고 무조건 항복을 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주일 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남쪽을 침략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주일 새벽이었습니다. 주일을 범하면 망합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10일 일하고 하루 쉬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 보니까 40%의 생산량이 떨어졌습니다. 소련의 레닌이 기독교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 7일 동안 일하고 하루 쉬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생산성이 30% 떨어졌습니다. 할 수 없이 성경의 원리대로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원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