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이기적인 세상 속의 성도
*** 이기적인 세상 속의 성도 / 누가복음 7:31-35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7:31-35,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공동번역) “3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과 같을까?’ 32 마치 장터에서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 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아이들과도 같다. 33 너희는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고 하더니 34 인자가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35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서 드러난다.
초등학교 4학년 반장 아이가 감기 몸살로 며칠간 학교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몇몇 친구들이 주머니를 털어서 사탕이랑 과자 조금을 사서 병문안을 갔습니다. 그런데 부반장 아이는 따라나서지 않고 말없이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친구들이 “왜 같이 가지 않는데?”라고 물었을 때 부반장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걔가 안 나오면 내가 반장이 될 텐데 뭣 하러 내가 가니!”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평범한 주부가 쓴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 가정이 사는 마을은 매우 조용하고 깨끗한 곳으로, 중산층에 어울리는 좋은 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부근에 오래된 낡은 집이 하나 있는데, 방이 열 개나 되었습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간 후 최근에는 기독교 단체에서 임대하여 문제 청소년들을 위한 갱생원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곳에 수용된 청소년들은 모두 자기 집에서는 살 수 없을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가출청소년, 마약 중독자, 전과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주민들은 집값이 떨어지게 되는 것을 걱정했으며, 딸을 가진 부모들의 걱정은 더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들은 과민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정부에 진정서를 보냈습니다. ‘이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주고 자신들의 재산과 딸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주민들은 거의 다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서명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자기 자식도 그런 암흑 속을 헤맬 수도 있음을 고려했던 것입니다.
개인이기심과 집단 이기주의를 보여주는 어이없는 이기심들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너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어서 씁쓸한 마음이 앞섭니다. 어린마음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어떤 단체나 마을들의 집단적인 이기주의도 이미 우리사회에서 도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늘어나는 불편한 마음들이 신경질 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신경질로 오는 질병이 무려 35가지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이기심에 대하여 비유로 경고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32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사는 삶을 돌아봅시다.
먼저, 본문 내용을 이해하도록 풀어봅시다.
마태복음 11:16-19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는 본문말씀은 이스라엘의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모습을 통하여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현실을 비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인 현실을 무감각하고 단절된 상태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생활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년을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처럼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에서 나는 꿀을 먹으면서 사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즉 자신들처럼 살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군중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삶은 이해했습니까?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들과 동떨어져 세속적인 삶을 거부한다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에 대하여는 자신들처럼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정작 메시아가 오시자 자신들의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를 따라서 시장에 온 아이들이 부모가 물건을 사거나 파는 동안에 시장 옆의 빈터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늘과 같은 놀이기구를 갖춘 놀이터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도 3-40년 전만 해도 거의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여서 편을 가르고는 그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할 분담도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서의 춤추는 역할은 주로 남자들의 소관이며, 초상집에서의 애곡은 여인들의 소관이었습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추는 것은 결혼식의 광경입니다. 그리고 ‘아이고, 아이고’하는 애곡과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장례식 광경입니다. 그들의 놀이는 한 편이 피리를 부는 시늉을 하면 다른 한 편은 춤을 추어야 하며, 다른 편이 곡을 하는 시늉을 하면 이쪽 편은 가슴을 치고 슬피 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서로가 마음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한 편이 피리를 부는 시늉을 해도 다른 편이 춤추지 않았습니다. 곡하는 시늉을 해도 가슴을 치며 슬피 울지 않았습니다. 남자아이들은 놀이 친구들에게 이렇게 소리칩니다. “우리가 결혼식 놀이를 하려고 했지만, 너희는 흥겨워하지 않았다!” 역시 여자아이들은 놀이 친구들에게 “우리가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했지만, 너희는 함께 울지 않았다!” 라고 소리칩니다.
이 비유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이 나름대로의 주석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 의도를 이해하도록 충분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팔레스틴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해석을 듣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는 두 부류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놀이를 제안하는 아이들이며, 다른 부류는 놀이를 거절하다가 비난을 받는 아이들입니다. 흔히 우리는 놀이를 제안하는 쪽이 신앙인의 부류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32-34절까지를 면밀히 살펴보면, 역할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놀이를 제안하는 아이들은 편하게 앉아서 피리 부는 사람과 애곡하는 사람으로, 비교적 힘 안 드는 놀이 역할을 하려 합니다. 반면에 자기 친구들에게는 좀 더 힘든 역할인 춤추는 역과 우는 역을 맡기려 합니다.(예/ 판소리 마당에서 장단 맞추는 사람과 소리꾼). 그러니까, 길가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자기들의 제안에 응하지 않으려는 다른 아이들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자신이 부는 피리소리에 맞춰 춤추지 않는다고 제 동무들을 향하여 ‘흥을 깨뜨리는 자’ 라고 비난하는 지배욕에 가득 찬 아이들과 같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아이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유대인들의 영적인 단절과 무감각을 나무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감각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쳐도 예전처럼 옷을 찢으며 재를 덮어쓰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가르쳐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기대와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배척했습니다. 극도의 이기적인 모습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시대에는 이 비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지금 우리 시대는 이 비유의 대상자들인 유대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더 지능적이며 고의적인 불신과 단절의 시대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마음만 먹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서든지 읽을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들이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자신의 유익과 육신적인 삶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맞는 말씀만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기대와 생각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외면하거나 비난을 가합니다. 정말 이기적인 사회의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이 전혀 뜻밖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되면 이러한 세대가 오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3-4절(현대어성경)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들으려 하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비위에 맞는 말을 하는 교사들을 찾아다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상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따라갑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가 답답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안전, 편안함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느라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 정부와 국민사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이웃 서로 간에 담이 높아지고 단절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크고 근본적인 단절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이사야 65:1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살륙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철저한 단절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수많은 군중을 향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6-27)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오직 자신의 육신적인 이익임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이기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뭉쳐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이 무너지면 공동체도 깨어지고, 이익을 저해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2년 동안 복음전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는 ‘아데미’여신의 신전이 있어서 이로 인하여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신전의 물품을 만들어 돈을 벌던 ‘데메드리오’라는 사람들 데모를 선동합니다.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행 19:25-27) 이처럼 세상은 자기들의 뜻에 따라주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고 핍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14절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성도들조차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고 교회를 비난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봅니다. 이제는 성도들조차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교회를 선택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이익의 재료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의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본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여, 주여,’하거나 ‘주의 이름으로 섬기고 봉사’하거나 ‘교회에 소속되어 출석한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시는 말씀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성도가 행하여 할 올바른 삶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많은 일, 많은 봉사와 헌신적인 섬김, 교회를 세우는 일 어떤 것도 좋지만, 이 모든 것보다 먼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내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깁니까?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자녀, 가정, 재물, 건강, 자신의 이익 등이 그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2:8절에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모셔야 할 자리에 무엇을 두든지 그것을 빼앗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본문 35절에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조금 어렵지만 마태복음에 있는 병행구절을 봅시다. 마태복음11:19 하반절 입니다. “…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여기서 “옳다 함”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ἐδικαιώθη(에디카이오데)라고 하는데, ‘바르게 선포되다’, ‘옳음이 밝혀지다.’ 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무시당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버려지는 모순되고 패역한 세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의 행위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의 미래를 보장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인내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따르는 선행을 잊지 마십시오. 역대하 15:7절의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향하는 신실한 믿음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마라나- 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