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세상을 기쁘게 사는 길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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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11-03 20:31
*** 우울한 세상을 기쁘게 사는 길 / 하박국 3:16-19
** 들어가는 말
하박국 3:16-19,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공동번역) 16 그 소리를 듣고 나의 뱃속이 뒤틀립니다. 입술이 떨리고 뼛속이 녹아내리며 아랫도리가 후들거립니다. 우리를 덮쳐 오던 백성에게 재앙이 떨어지는 날만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17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18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19 야훼 나의 주께서 힘이 되어 주시고 사슴처럼 날랜 다리를 주시어 나로 하여금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십니다.
요즈음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소리들이 많이 들리지요? 온 세계가 ‘금융위기’라고 하면서 침체되지 않으려고 특단의 조치들을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공장들이 도산하면서 문을 닫고, 건축업자들은 스스로 폐업을 한다고도 합니다. 물가는 오르고, 수입은 줄어들고, 취업의 문은 좁아지고, 정치도 믿을 수 없고, 추위는 다가오고, 정말 마음 기댈 곳이 없도록 우울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왜 이렇게 자살하는 사람들은 많은지! 본문 16절의 “그 소리를 듣고 나의 뱃속이 뒤틀립니다. 입술이 떨리고 뼛속이 녹아내리며 아랫도리가 후들거립니다. 우리를 덮쳐 오던 백성에게 재앙이 떨어지는 날만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공동번역) 라는 말씀이 가슴에 찡하도록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만듭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지요? 예전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독일 작가 ‘안톤 시나크(Anton Schnack, 1892-1961)’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글이 있었습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 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이렇게 시작되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초조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철책 가를 그는 언제 보아도 왔다 갔다 한다. 그의 빛나는 눈, 그의 무서운 분노, 그의 괴로운 부르짖음, 그의 앞발의 한없는 절망, 그의 미친 듯한 순환, 이것이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한다.” 이 글을 읽노라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서글픈 느낌을 갖게 합니다. 마치 이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는 작가의 마음에 공감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울하고 슬픈 감정은 전염성이 강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게 합니다. 엄마가 우는 흉내를 내면 어린아이는 이유도 모르면서 따라서 서럽게 우는 것과 같은 마음의 공명현상입니다. 확실히 지금 세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부정적이고 우울한 색깔의 안경을 끼고 보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성적인 짜증과 신경과민에 시달리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우울한 것을 애써 잊어보려고 쾌락이나 분주함에 빠지기도 하고, 마음을 돌릴만한 또 다른 관심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마저 우울한 느낌을 지우지 못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위로를 찾고 만족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결코 위로나 만족을 찾지 못합니다. 잠시잠깐의 위로나 만족감은 있겠지만, 다시 우울해지고 채울 수 없는 허전함으로 허덕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17절에서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지나가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처럼 이 우울한 세상을 기쁘게 사는 길을 찾아봅시다.
먼저, 본문의 상황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 말씀은 읽기만 해도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백성들이 간담이 녹는 두려운 상황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강대국이었던 바벨론의 침공소문으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더욱 두려운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징계이기 때문입니다(16절). 게다가 생활의 궁핍은 백성들의 마음을 위축시키고 더욱 두렵게 했습니다. 이것은 자연과 사람을 통한 이중적인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열매 맺는 나무들이 열매를 내지 않았으며, 밭작물들은 적군에게 약탈되고 짓밟혀서 수확이 없었습니다. 양과 소도 바벨론의 약탈에 의하여 모두 비어버렸습니다(17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한 마디로 ‘총체적인 재난’이었습니다.
‘욥’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정도의 상황 같으면 감사할 것이 어디에 있으며, 즐거움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는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즐거움과 기쁨이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환경적인 조건을 초월하여 그 환경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열악한 환경으로부터 능히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뿐만 아니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래의 회복까지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과 삶의 모습을 봅시다.
지금 세계의 개발도상국 어린이들 1억 1천만 명이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합니다. 여자 어린이들은 성차별과 가사노동으로 배움의 기회조차 얻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매 5초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 1억 7천만 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이며, 5세 미만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영양실조로 죽어갑니다. 절대적으로 가난한 나라의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은 기본적인 예방접종조차 받지 못합니다. 해마다 3백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질병으로 죽어갑니다. 지금 세계의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1960년대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이었습니다.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한국은 76불이었습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습니다. 그로부터 50여년 만에 세계 221개 국가 중에서 세계경제력 10위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사는 울산은 GNP(국민총생산)가 4만 불을 넘어서 세계 최고수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생활수준은 세계의 상위권에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감사해도 부족할 정도로 부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의 성도들은 감사보다 더 많이 요구하고, 주어지는 넘치는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꼴찌로 살던 지지리도 가난할 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성도들 간에 사랑이 있고 오히려 감사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은혜를 누리는 지금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이 경제적으로 조금 어렵고 힘들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최고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상황과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환경은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의 환경과 비교할만합니까? 그렇다면 지금 환경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까?
그러면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는 모든 사람을 향하신 보편적인 뜻이 있으며, 각 사람 개개인을 향하신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섬기는 성품과 신앙생활 - 예배, 기도, 찬송, 전도, 섬김, 봉사, 사랑, 인내, 기쁨 등등.- 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십니다. 한편으로는 사도 바울처럼 개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9:15절에서 예수님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저나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이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과 개개인에게 주신 특별한 뜻이 모두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내서 성실하게 순종하여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지금 생각하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1절을 봅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바로 이 말씀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사는” 이 신비로운 ‘상호소속’의 관계의 목적은 ‘충만한 기쁨의 삶’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환경이나 상황에 의하여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4:27절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시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당부하는 말씀이 빌립보서 4:4절의 말씀인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기뻐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주권자이시며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8:10절에서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염려하고 근심하고 우울해 하는 사람들에게 시편 55:22절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하시며, 마태복음 11:28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고, 전도서 5:19절에서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29:11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까지 하십니다. 이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됩니다.
그러면, 우울한 세상을 기쁘게 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고난의 환경이 자신의 죄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의 시련에는 반드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지는 시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고난과 시련과 삶의 우울함까지도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8: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 그 짐을 벗기실 때까지 인내하며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주신 약속을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듯이 힘들고 긴 시련의 밤이 지나면 반드시 밝은 아침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사람에게는 기쁨으로 거두어들일 날이 오는 것입니다. 시편 126:5절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주어진 환경을 억지로 벗어나려고 자신의 생각과 세상적인 수단을 쓰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3)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할지라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솔직하게 말씀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아실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까지도 아십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면 됩니다. 시편 25:16-21절에서 “16 이 몸 돌아보소서. 어여삐 보아주소서. 어디 하나 기댈 데 없이 외로운 이 몸, 무엇하나 가진 것 없어 서러운 이 몸, 17 이렇듯 마음속에 번민이 많고 이렇듯 괴로움에 휩싸여 있으니 이 몸을 건져 주소서. 18 이 괴로움과 이 고통을 보시고 내 모든 허물을 용서하소서. 19 보소서, 내 원수들이 저리도 많습니다. 나를 미워하며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하여 어떻게든 고꾸라뜨리려 벼릅니다. 20 이 몸을 지켜 주소서. 이 몸을 건져 주소서.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 이 몸 주님을 바라고 애타게 그리워하오니 바르고 온전하게 살게 하소서.”
4)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겼으면 해결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자식 얻기를 위하여 기도한 후에 근심이 없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맡겼다.’는 것은 곧 그 일이 내게서 떠나갔음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권고하신다.”는 것은 깊이 생각하신다는 뜻입니다.
5)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며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걸림돌인 모든 의심을 제거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도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솟아오르는 의심을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의심이 스물스물 생겨날 때, 다윗의 기도는 이러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의심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문제에 몰두해서 빠지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게 합니다.
여러분의 환경이 본문의 말씀처럼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요? 환경을 초월하여 환경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고 진실한 삶을 이룹시다. 그리하여 능히 모든 우울함과 어두운 환경을 극복하고, 소망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길을 전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하박국 3:16-19,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공동번역) 16 그 소리를 듣고 나의 뱃속이 뒤틀립니다. 입술이 떨리고 뼛속이 녹아내리며 아랫도리가 후들거립니다. 우리를 덮쳐 오던 백성에게 재앙이 떨어지는 날만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17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18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19 야훼 나의 주께서 힘이 되어 주시고 사슴처럼 날랜 다리를 주시어 나로 하여금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십니다.
요즈음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소리들이 많이 들리지요? 온 세계가 ‘금융위기’라고 하면서 침체되지 않으려고 특단의 조치들을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공장들이 도산하면서 문을 닫고, 건축업자들은 스스로 폐업을 한다고도 합니다. 물가는 오르고, 수입은 줄어들고, 취업의 문은 좁아지고, 정치도 믿을 수 없고, 추위는 다가오고, 정말 마음 기댈 곳이 없도록 우울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왜 이렇게 자살하는 사람들은 많은지! 본문 16절의 “그 소리를 듣고 나의 뱃속이 뒤틀립니다. 입술이 떨리고 뼛속이 녹아내리며 아랫도리가 후들거립니다. 우리를 덮쳐 오던 백성에게 재앙이 떨어지는 날만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공동번역) 라는 말씀이 가슴에 찡하도록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만듭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지요? 예전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독일 작가 ‘안톤 시나크(Anton Schnack, 1892-1961)’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글이 있었습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 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이렇게 시작되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초조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철책 가를 그는 언제 보아도 왔다 갔다 한다. 그의 빛나는 눈, 그의 무서운 분노, 그의 괴로운 부르짖음, 그의 앞발의 한없는 절망, 그의 미친 듯한 순환, 이것이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한다.” 이 글을 읽노라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서글픈 느낌을 갖게 합니다. 마치 이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는 작가의 마음에 공감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울하고 슬픈 감정은 전염성이 강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게 합니다. 엄마가 우는 흉내를 내면 어린아이는 이유도 모르면서 따라서 서럽게 우는 것과 같은 마음의 공명현상입니다. 확실히 지금 세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부정적이고 우울한 색깔의 안경을 끼고 보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성적인 짜증과 신경과민에 시달리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우울한 것을 애써 잊어보려고 쾌락이나 분주함에 빠지기도 하고, 마음을 돌릴만한 또 다른 관심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마저 우울한 느낌을 지우지 못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위로를 찾고 만족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결코 위로나 만족을 찾지 못합니다. 잠시잠깐의 위로나 만족감은 있겠지만, 다시 우울해지고 채울 수 없는 허전함으로 허덕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17절에서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지나가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처럼 이 우울한 세상을 기쁘게 사는 길을 찾아봅시다.
먼저, 본문의 상황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 말씀은 읽기만 해도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백성들이 간담이 녹는 두려운 상황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강대국이었던 바벨론의 침공소문으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더욱 두려운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징계이기 때문입니다(16절). 게다가 생활의 궁핍은 백성들의 마음을 위축시키고 더욱 두렵게 했습니다. 이것은 자연과 사람을 통한 이중적인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열매 맺는 나무들이 열매를 내지 않았으며, 밭작물들은 적군에게 약탈되고 짓밟혀서 수확이 없었습니다. 양과 소도 바벨론의 약탈에 의하여 모두 비어버렸습니다(17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한 마디로 ‘총체적인 재난’이었습니다.
‘욥’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정도의 상황 같으면 감사할 것이 어디에 있으며, 즐거움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는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즐거움과 기쁨이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환경적인 조건을 초월하여 그 환경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열악한 환경으로부터 능히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뿐만 아니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래의 회복까지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과 삶의 모습을 봅시다.
지금 세계의 개발도상국 어린이들 1억 1천만 명이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합니다. 여자 어린이들은 성차별과 가사노동으로 배움의 기회조차 얻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매 5초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 1억 7천만 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이며, 5세 미만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영양실조로 죽어갑니다. 절대적으로 가난한 나라의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은 기본적인 예방접종조차 받지 못합니다. 해마다 3백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질병으로 죽어갑니다. 지금 세계의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1960년대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이었습니다.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한국은 76불이었습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습니다. 그로부터 50여년 만에 세계 221개 국가 중에서 세계경제력 10위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사는 울산은 GNP(국민총생산)가 4만 불을 넘어서 세계 최고수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생활수준은 세계의 상위권에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감사해도 부족할 정도로 부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의 성도들은 감사보다 더 많이 요구하고, 주어지는 넘치는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꼴찌로 살던 지지리도 가난할 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성도들 간에 사랑이 있고 오히려 감사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은혜를 누리는 지금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이 경제적으로 조금 어렵고 힘들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최고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상황과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환경은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의 환경과 비교할만합니까? 그렇다면 지금 환경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까?
그러면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는 모든 사람을 향하신 보편적인 뜻이 있으며, 각 사람 개개인을 향하신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섬기는 성품과 신앙생활 - 예배, 기도, 찬송, 전도, 섬김, 봉사, 사랑, 인내, 기쁨 등등.- 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십니다. 한편으로는 사도 바울처럼 개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9:15절에서 예수님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저나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이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과 개개인에게 주신 특별한 뜻이 모두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내서 성실하게 순종하여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지금 생각하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1절을 봅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바로 이 말씀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사는” 이 신비로운 ‘상호소속’의 관계의 목적은 ‘충만한 기쁨의 삶’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환경이나 상황에 의하여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4:27절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시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당부하는 말씀이 빌립보서 4:4절의 말씀인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기뻐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주권자이시며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8:10절에서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염려하고 근심하고 우울해 하는 사람들에게 시편 55:22절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하시며, 마태복음 11:28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고, 전도서 5:19절에서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29:11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까지 하십니다. 이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됩니다.
그러면, 우울한 세상을 기쁘게 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고난의 환경이 자신의 죄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의 시련에는 반드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지는 시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고난과 시련과 삶의 우울함까지도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8: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 그 짐을 벗기실 때까지 인내하며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주신 약속을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듯이 힘들고 긴 시련의 밤이 지나면 반드시 밝은 아침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사람에게는 기쁨으로 거두어들일 날이 오는 것입니다. 시편 126:5절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주어진 환경을 억지로 벗어나려고 자신의 생각과 세상적인 수단을 쓰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3)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할지라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솔직하게 말씀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아실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까지도 아십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면 됩니다. 시편 25:16-21절에서 “16 이 몸 돌아보소서. 어여삐 보아주소서. 어디 하나 기댈 데 없이 외로운 이 몸, 무엇하나 가진 것 없어 서러운 이 몸, 17 이렇듯 마음속에 번민이 많고 이렇듯 괴로움에 휩싸여 있으니 이 몸을 건져 주소서. 18 이 괴로움과 이 고통을 보시고 내 모든 허물을 용서하소서. 19 보소서, 내 원수들이 저리도 많습니다. 나를 미워하며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하여 어떻게든 고꾸라뜨리려 벼릅니다. 20 이 몸을 지켜 주소서. 이 몸을 건져 주소서.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 이 몸 주님을 바라고 애타게 그리워하오니 바르고 온전하게 살게 하소서.”
4)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겼으면 해결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자식 얻기를 위하여 기도한 후에 근심이 없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맡겼다.’는 것은 곧 그 일이 내게서 떠나갔음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권고하신다.”는 것은 깊이 생각하신다는 뜻입니다.
5)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며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걸림돌인 모든 의심을 제거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도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솟아오르는 의심을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의심이 스물스물 생겨날 때, 다윗의 기도는 이러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의심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문제에 몰두해서 빠지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게 합니다.
여러분의 환경이 본문의 말씀처럼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요? 환경을 초월하여 환경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고 진실한 삶을 이룹시다. 그리하여 능히 모든 우울함과 어두운 환경을 극복하고, 소망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길을 전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