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능력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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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10-06 21:50
*** 순종의 능력 / 출 15:22-27
** 들어가는 말
출애굽기 15:22-27,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새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 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요즈음 여러분의 가정이나 자신의 일들 중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모든 일이 생각이나 계획대로 잘 진행되는 것을 두고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형통이라는 말은 ‘번성한(prosperous)’,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라는 말로 번역이 됩니다. 즉 삶이 번성하고 모든 일이 성공적이 될 때를 ‘형통한 삶’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삶이 이렇게 형통하기를 소망하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어디 세상살이가 자신의 뜻대로 됩니까? 전혀 자신이 바라지도 않고 의도하지도 않은 쓰디 쓴 고난의 수렁과 절망의 계곡이 느닷없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도서 7: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사람들이 자만하거나 낙관하지 못하도록,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런 일들이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혹 지금 여러분에게 삶이 벅차고 쓴 고통이 있다면 이 말씀에서 길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또는 형통한 삶이라고 기뻐하는 분이 있다면 이 말씀에서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을 섬기는 택한 백성의 시조를 삼으시고,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대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이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택한 백성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고 당시의 강대국인 애굽을 사용하셨습니다.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우시면서 택한 백성을 애굽에 심으신 것입니다. 역사가 흘러가면서 애굽의 왕가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요셉을 알던 왕조가 망하게 되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면서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에게 고난이 닥쳤습니다. 새로운 바로 왕은 유대인들이 더 번성하지 못하도록 노예를 삼았습니다. 유대인들의 고통이 극에 달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로 한 나라를 이루게 하시려고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통하여 야곱 일가 75명이 애굽에 들어온지 꼭 430년이 되는 해에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 되는 큰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는 것을 바로 왕과 그의 신하들이 무력으로 저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열 가지의 대 재앙을 통하여 그들을 굴복시키시고 결국 출애굽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유대민족은 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민으로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통과해야 할 시련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장 자신들을 가로막는 눈앞에 펼쳐진 홍해와 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 사이에서 망연자실하여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라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의 역사를 보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 찬송의 내용이 본문 앞쪽의 15:1-21절까지입니다.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을 선두로 유대인들은 노래하며 춤추며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후로 이어지는 역사가 본문말씀입니다. 홍해를 기적으로 통과한 유대인들은 척박한 사막과 같은 수르광야로 들어섰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밤에는 살을 파고드는 추위, 목마름과 배고픔이 엄습했습니다. 삼일을 걸어서 수르광야를 통과했지만 문 한 방울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할 즈음에 물이 있는 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목말랐던 백성들이 기뻐하며 물로 몰려들었지만, 곧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은 마실 수 없을 만큼 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라며 또 다시 원망을 터뜨렸습니다. 홍해를 건너면서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 감격스러웠던 것이 불과 3일 전이었는데, 이제는 목이 마르다고, 마실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은 ‘쓰다.’라는 뜻을 가진 “마라”라고 불렀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들은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지명하시면서 그 나무를 물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나무를 물에 넣자 곧 쓴 물이 달아졌습니다. 백성들이 갈증을 면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시험하시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본문 26절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여호와 라파” 즉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을 치료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입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쉴 만한 그늘과 풍족한 물이 있는 “엘림”이라는 오하시스였습니다.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이 일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청종하면 치료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의 삶에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것인지를 살펴보려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첫걸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놀라운 이적의 체험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삶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치료해 주시기를 기대할 것이며, 사업하는 성도는 번창하기를 기대하고, 학생들은 좋은 성적과 좋은 학교 진학을 기대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삶이 형통한 삶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의 마음에도 어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모든 삶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때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사무엘상 15:22-23절에서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하십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성도들이 ‘순종’을 오해하는 것을 봅니다. 즉 성도들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순종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서 순종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에는 어떠한 환경과 여건과 이해관계가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환경과 여건과 이해를 초월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성 ‘프랜시스’에게 제자가 되기를 자원하는 젊은 청년 두 사람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신앙의 훈련을 닦고 싶습니다. 제자로 받다 주십시오.”
프랜시스는 아무 말 없이 배추밭을 가리키면서
“저 밭에 가면 배추들이 많이 있는데, 그 배추를 뽑아서 뿌리를 위로, 잎을 땅 속으로 다시 심고 오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두 청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밭으로 갔습니다. 한 청년은 말없이 배추를 뽑아서 거꾸로 심습니다. 그런데 다른 청년은 성 프랜시스를 비웃으며 떠나갔습니다. 결국 배추를 거꾸로 심은 청년만 제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제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으로 ‘순종’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6: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좋은 일에만 아니라 고난과 역경의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는 순종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수리아의 군대장관인 ‘나이만’을 기억합니까? 그는 한 나라의 왕이 의지하는 장군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좋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본문 25-26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온 어린 계집종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고 지시했습니다. 나아만이 분노하며 중얼거렸습니다. ‘감히 나와 보지도 않으면서 이 진흙투성이의 더럽고 강 같지도 않은 이 물에서 몸을 씻어라고? 우리나라의 강들은 이 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가?!’ 화가 나서 돌아설 때에 그의 하인들이 ‘이 보다 더 어려운 것을 시켜도 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 씻어 보시지요.’라는 권면에 그는 아이처럼 누그러져서 요단강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부드럽게 된 자신의 피부를 보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는 마음이 열려 있었고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의 경험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난의 광야 길과 그 목마름과 함께 마라의 쓴 물을 먹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고난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도들도 수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방금 전에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받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고생스럽고 힘든 것은 두고두고 잊지 않고 틈만 나면 원망합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로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속담이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준비해 두신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인지를 시험하십니다. 본문 25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마라와 같은 쓴물로 시험하십니다. 즉 인생의 힘든 고난과 고통의 길, 혹은 풍족한 삶의 길로 시험하십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에서 합당하다고 인정이 되면 ‘치료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회복시키시고 형통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1:19절에서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라고 하시며, 말라기 4:2절에서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하시스 엘림의 복을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청개구리 이야기를 잘 아시기요? 청개구리는 어머니 살아생전 너무나도 속을 썩였습니다. 동으로 가라 하면 서로 가고, 서로 가라 하면 동으로 갔습니다. 냇가로 가라 하면 산으로 가고, 산으로 가라 하면 냇가로 갔습니다. 어머니가 시키는 것은 무조건 반대로만 했습니다. 근심 속에 살던 어머니 청개구리는 유언을 남기며 죽었는데, 자신을 냇가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실은 산에 묻히고 싶어서 반대로 말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죽고 나자 아들 청개구리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어머니 유언만큼은 꼭 지켜야겠다면서 어머니를 냇가에 묻었습니다. 결국 그것마저 어머니 본뜻과는 달리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청개구리는 비만 오면 어머니 무덤이 떠내려 갈까봐 걱정이 되어 운다고 합니다. “개골, 개골, 울 엄마, 울 엄마, 나 때문에 속만 썩은 울 엄마!” 청개구리는 오늘도 울고 있습니다.
오늘에는 영적인 청개구리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듣지만 결코 순종하지 않습니다. 겨우 순종하는 것 마져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으로는 평생을 가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순종이 없이는 어떤 기도도 응답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어떤 헌물이나 예배보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입니다. 때때로 순종하기가 어려운 마라의 쓴물과 같은 고통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리하면 “피할 길을 예비하시고 감당할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쓴물까지도 달게 하실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삶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곧 순종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삶을 회복하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 대복교회 모든 성도들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출애굽기 15:22-27,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새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 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요즈음 여러분의 가정이나 자신의 일들 중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모든 일이 생각이나 계획대로 잘 진행되는 것을 두고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형통이라는 말은 ‘번성한(prosperous)’,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라는 말로 번역이 됩니다. 즉 삶이 번성하고 모든 일이 성공적이 될 때를 ‘형통한 삶’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삶이 이렇게 형통하기를 소망하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어디 세상살이가 자신의 뜻대로 됩니까? 전혀 자신이 바라지도 않고 의도하지도 않은 쓰디 쓴 고난의 수렁과 절망의 계곡이 느닷없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도서 7: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사람들이 자만하거나 낙관하지 못하도록,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런 일들이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혹 지금 여러분에게 삶이 벅차고 쓴 고통이 있다면 이 말씀에서 길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또는 형통한 삶이라고 기뻐하는 분이 있다면 이 말씀에서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을 섬기는 택한 백성의 시조를 삼으시고,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대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이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택한 백성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고 당시의 강대국인 애굽을 사용하셨습니다.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우시면서 택한 백성을 애굽에 심으신 것입니다. 역사가 흘러가면서 애굽의 왕가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요셉을 알던 왕조가 망하게 되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면서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에게 고난이 닥쳤습니다. 새로운 바로 왕은 유대인들이 더 번성하지 못하도록 노예를 삼았습니다. 유대인들의 고통이 극에 달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로 한 나라를 이루게 하시려고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통하여 야곱 일가 75명이 애굽에 들어온지 꼭 430년이 되는 해에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 되는 큰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는 것을 바로 왕과 그의 신하들이 무력으로 저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열 가지의 대 재앙을 통하여 그들을 굴복시키시고 결국 출애굽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유대민족은 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민으로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통과해야 할 시련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장 자신들을 가로막는 눈앞에 펼쳐진 홍해와 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 사이에서 망연자실하여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라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의 역사를 보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 찬송의 내용이 본문 앞쪽의 15:1-21절까지입니다.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을 선두로 유대인들은 노래하며 춤추며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후로 이어지는 역사가 본문말씀입니다. 홍해를 기적으로 통과한 유대인들은 척박한 사막과 같은 수르광야로 들어섰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밤에는 살을 파고드는 추위, 목마름과 배고픔이 엄습했습니다. 삼일을 걸어서 수르광야를 통과했지만 문 한 방울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할 즈음에 물이 있는 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목말랐던 백성들이 기뻐하며 물로 몰려들었지만, 곧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은 마실 수 없을 만큼 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라며 또 다시 원망을 터뜨렸습니다. 홍해를 건너면서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 감격스러웠던 것이 불과 3일 전이었는데, 이제는 목이 마르다고, 마실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은 ‘쓰다.’라는 뜻을 가진 “마라”라고 불렀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들은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지명하시면서 그 나무를 물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나무를 물에 넣자 곧 쓴 물이 달아졌습니다. 백성들이 갈증을 면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시험하시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본문 26절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여호와 라파” 즉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을 치료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입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쉴 만한 그늘과 풍족한 물이 있는 “엘림”이라는 오하시스였습니다.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이 일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청종하면 치료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의 삶에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것인지를 살펴보려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첫걸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놀라운 이적의 체험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삶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치료해 주시기를 기대할 것이며, 사업하는 성도는 번창하기를 기대하고, 학생들은 좋은 성적과 좋은 학교 진학을 기대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삶이 형통한 삶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의 마음에도 어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모든 삶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때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사무엘상 15:22-23절에서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하십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성도들이 ‘순종’을 오해하는 것을 봅니다. 즉 성도들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순종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서 순종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에는 어떠한 환경과 여건과 이해관계가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환경과 여건과 이해를 초월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성 ‘프랜시스’에게 제자가 되기를 자원하는 젊은 청년 두 사람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신앙의 훈련을 닦고 싶습니다. 제자로 받다 주십시오.”
프랜시스는 아무 말 없이 배추밭을 가리키면서
“저 밭에 가면 배추들이 많이 있는데, 그 배추를 뽑아서 뿌리를 위로, 잎을 땅 속으로 다시 심고 오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두 청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밭으로 갔습니다. 한 청년은 말없이 배추를 뽑아서 거꾸로 심습니다. 그런데 다른 청년은 성 프랜시스를 비웃으며 떠나갔습니다. 결국 배추를 거꾸로 심은 청년만 제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제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으로 ‘순종’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6: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좋은 일에만 아니라 고난과 역경의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는 순종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수리아의 군대장관인 ‘나이만’을 기억합니까? 그는 한 나라의 왕이 의지하는 장군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좋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본문 25-26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온 어린 계집종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고 지시했습니다. 나아만이 분노하며 중얼거렸습니다. ‘감히 나와 보지도 않으면서 이 진흙투성이의 더럽고 강 같지도 않은 이 물에서 몸을 씻어라고? 우리나라의 강들은 이 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가?!’ 화가 나서 돌아설 때에 그의 하인들이 ‘이 보다 더 어려운 것을 시켜도 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 씻어 보시지요.’라는 권면에 그는 아이처럼 누그러져서 요단강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부드럽게 된 자신의 피부를 보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는 마음이 열려 있었고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의 경험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난의 광야 길과 그 목마름과 함께 마라의 쓴 물을 먹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고난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도들도 수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방금 전에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받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고생스럽고 힘든 것은 두고두고 잊지 않고 틈만 나면 원망합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로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속담이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준비해 두신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인지를 시험하십니다. 본문 25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마라와 같은 쓴물로 시험하십니다. 즉 인생의 힘든 고난과 고통의 길, 혹은 풍족한 삶의 길로 시험하십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에서 합당하다고 인정이 되면 ‘치료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회복시키시고 형통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1:19절에서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라고 하시며, 말라기 4:2절에서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하시스 엘림의 복을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청개구리 이야기를 잘 아시기요? 청개구리는 어머니 살아생전 너무나도 속을 썩였습니다. 동으로 가라 하면 서로 가고, 서로 가라 하면 동으로 갔습니다. 냇가로 가라 하면 산으로 가고, 산으로 가라 하면 냇가로 갔습니다. 어머니가 시키는 것은 무조건 반대로만 했습니다. 근심 속에 살던 어머니 청개구리는 유언을 남기며 죽었는데, 자신을 냇가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실은 산에 묻히고 싶어서 반대로 말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죽고 나자 아들 청개구리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어머니 유언만큼은 꼭 지켜야겠다면서 어머니를 냇가에 묻었습니다. 결국 그것마저 어머니 본뜻과는 달리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청개구리는 비만 오면 어머니 무덤이 떠내려 갈까봐 걱정이 되어 운다고 합니다. “개골, 개골, 울 엄마, 울 엄마, 나 때문에 속만 썩은 울 엄마!” 청개구리는 오늘도 울고 있습니다.
오늘에는 영적인 청개구리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듣지만 결코 순종하지 않습니다. 겨우 순종하는 것 마져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으로는 평생을 가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순종이 없이는 어떤 기도도 응답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어떤 헌물이나 예배보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입니다. 때때로 순종하기가 어려운 마라의 쓴물과 같은 고통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리하면 “피할 길을 예비하시고 감당할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쓴물까지도 달게 하실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삶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곧 순종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삶을 회복하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 대복교회 모든 성도들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