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기본이 지켜지는 신앙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891회 작성일 2008-10-03 21:05
*** 기본이 지켜지는 신앙 / 호세아 7:8-16

** 들어가는 말

호세아 7:8-16, “8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9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11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12 저희가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공회에 들려 준 대로 저희를 징계하리라. 13 화 있을진저 저희가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저희가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저희를 구속하려 하나 저희가 나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고 14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15 내가 저희 팔을 연습시켜 강건케 하였으나 저희는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16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 방백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인하여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불리던 ‘에릭 리들(Eric Liddell)’영국의 육상부문 국가 대표선수였습니다. 그는 철저한 청교도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단거리 선수였으며, 1920년 육상의 여러 분야- 200m, 400m, 800m -에서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 경기에 주 종목인 100M 선수로 출전했습니다. 그러나 결승전이 주일에 있다는 것 때문에 경기를 포기하고 예배에 출석했던 사람입니다. 대신에 주 종목이 아닌 400M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는 주일성수뿐만 아니라 흑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늘 흑인선수들과 포옹이나 악수를 나눔으로써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관중들을 의아스럽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흑인과의 관계가 그리 좋게 보이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때로 뉴스거리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는 선교사의 길과 육상선수의 길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육상을 통한 선교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만천하에 전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결국 그는 선수생활을 마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믿는 자의 책임’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 당시 미국인들이 멸시하던 중국에 선교사로 나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중국에서 보냈으며 가난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후에 그를 기념하는 전기가 나왔는데, 제목이 ‘날으는 영국인 (The Flying Scotman)’이었습니다. 이것이 영화화되어 1982년에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음악상, 의상상 등을 받았는데, 그때의 영화제목이 ‘불의 전차(Chariot of Fire)’였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대 위대한 지도자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뛰어난 목사나 신학자도 아니지만, 그는 신앙인의 원칙을 지킨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산 사람이었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 1998년 10월1일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대통령령 제15930호로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규정’을 제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제2의 건국’을 이루겠다며 내세운 슬로건이 ‘제2의 건국은 기본이 지켜지는 나라’였습니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나라의 기본이 세워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공동체에는 ‘지켜야 할 기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지켜야 할 도리가 있고, 부부가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회사에는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학교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유교를 따라서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3가지 강령과 사람이 항상 행해야 할 5가지 실천 덕목이라고 해서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중요시 했습니다. 옛 생각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삼강(三綱)에는 부위자강(父爲子綱,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 군위신강(君爲臣綱,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 부위부강(夫爲婦綱,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 있고, 오륜(五倫)에는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는 의리가 있어야 함),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와 아들은 친함이 있어야 함), 부부유별(夫婦有別, 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함),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어린이는 차례가 있어야 함), 붕우유신(朋友有信, 벗과 벗은 믿음이 있어야 함)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예로부터 이렇게 기본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서론을 꺼내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기본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곧 ‘신앙의 기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4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교회는 신앙의 기본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철저하게 지켜왔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과 같은 삶의 부요함과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신앙의 기본이 지켜지지 않고, 교회는 엉뚱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여파로 교회는 사분오열 되고,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신앙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자신의 계획과 생각을 따라서 예배하고 봉사는 인간중심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답답한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본문 9절에서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한다.”고 하셨고, 10절에서는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한다.”고 하셨고, 14절에서는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한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기본이 지켜지는 신앙’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먼저, 예배가 무엇인지를 봅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를 ‘예배’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예배라는 말은  ‘굴복하다’, ‘섬기다’, ‘무릎을 꿇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존경을 표하는 행위’를 예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는 ‘희생 제사’였습니다. 돌로 쌓은 제단이나, 회막, 또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통하여 드려지는 제사가 곧 예배였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었으며, 죄를 속할 수 있는 방법이 희생 제물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7:11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이시며, 어느 곳에서나 예배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영원한 속죄의 제물로 드려졌기 때문에, 예배의 내용도 동물을 드리는 희생제사가 아닌, 인간의 삶 자체를 드리는 것을 예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4:23-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πνεύμα ὁ Θεος), “신령과 진정으로”(ἐν πνεύματι και αληθεἰα)라고 했다. 이 말의 의미로 볼 때, 예배가 ‘어디에서’라는 장소적인 것보다는 ‘무엇으로’, ‘어떻게’라는 내용과 방법적인 문제가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외적인 요소보다는 ‘내적인 경건한 삶의 예배’를 말합니다. 이 예배가 진정한 예배이고, 우리가 찾아야 할 신앙의 기본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인 구약의 예배를 살펴봅시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식적인 예배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소제’의 제물로 사용되는 ‘전병’을 비유로 하여, 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 행위를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의 마음과 행동이 다른 것을 두고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하십니다. 신학자인 ‘존 칼빈’은 “판단력 없이 변덕스럽게 여기 저기 끌려 다니는 사람”을 두고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이리저리 나뉘어져서 ‘일부만을 드리는 신앙인’이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8절 말씀에 나오는 ‘전병’이란, 구약의 여러 종류의 제사 중에서 ‘소제’라는 제사의 제물인, 곡식 가루로 빚어 번철에 구운 떡을 말합니다. 이 ‘전병’은 가루를 반죽하여 ‘화덕에 구운 것’ 이나 ‘번철에 부친 것’입니다. ‘번철’이란, 요즘 말로 하면 ‘프라이 팬’인데, 예전에는 주로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서 사용했습니다.

‘소제’는 곡식 제사이기 때문에 ‘피’가 없습니다. 그래서 ‘소제’는 독립적으로 드려지지 못하고 언제나 피의 제물, 즉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과 같이 드려졌습니다. 레위기 7:12절에서 “만일 그것을 감사하므로 드리거든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피 없는 제사는 죄를 속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제’는 곡식 알맹이 그대로 드려질 수가 없습니다. 고운 가루로 부수어져서 반죽이 되고, 번철에 구워져야 하며, 누룩이 들지 않는, 즉 다른 이물질이 들지 않는 순전한 그대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소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온전한 삶을 하나님께 바치신 것으로 비유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소제’의 의미는 ‘온전한 삶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삶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바칠 때, 그것이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찾아야 할 기본이 지켜지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이미 앞서 말씀드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바치는 것이 온전한 예배입니다. 그리고 이 온전한 예배가 우리가 찾아야 할 신앙의 기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도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바친다는 것은, ‘모든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는 것’, 즉 ‘하나님 최우선주의’를 의미합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0:31절의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대로입니다.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님이 쓴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마음”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처소를 방문해 예배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벌러르’라는 자매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예배 중인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 자매는 몇 달 전에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습니다.
예배에 늦은 이유는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렸는데,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선교사님은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자매의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찾아온 것입니다.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우선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님은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키십니다. 예배를 뒷전으로 돌리고 세상 것을 좇는다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될 것입니다. 번철로 떡을 구울 때, 적당하게 뒤집지 않으면, 전병이 한 쪽은 타 버리고 한 쪽은 익지 않아서 떡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더구나 ‘소제물’로서의 ‘전병’은 기름을 고루 섞어서 앞뒤를 고르게 익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어느 한 쪽이 타 버리거나 설익는다면, 소제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이스라엘은 ‘한쪽은 종교적인 위선으로 타 버렸고, 반대쪽은 이방인과 다름없이 세속화되고 버려져서 아예 익지 않은’무가치한 존재였습니다(13-14절).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영의 눈이 어두워져 있어서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조차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9절에서 “저는 이방인들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힘”은 ‘권세’이며, “백발”은 ‘영광’을 말합니다. 즉 사단의 세력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은 ‘권세’와 ‘영광’을 다 빼앗기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비참한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서도 오히려 교만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입니다. 오늘 성도들도 사단의 권세에 눌려서 세상적인 물질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세상적인 학문과 권력과 명예에 더 의존하는 것이 이방인과 다름없는 ‘세속화’입니다. 이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 제물로서 가치가 없듯이,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께 합당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따르면, 생명도 부귀영화도 모두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면 모든 것이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2:25절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계획과 세상적인 모든 욕망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온전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이며 우리가 찾아야 할 신앙의 기본입니다. 예배란 곧 하나님을 경외하여 높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배는 의식화된 종교 예식이 아닙니다. 교회당에서 예배할 때의 하나님이 다르고, 우리 생활 터전에 계시는 하나님이 다른 분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신앙과 세상을 사랑하는 세속화로는 어떤 유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분이시며, 오늘도 성도들의 온전한 헌신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는 마음과 행위가 일치되며, 성령 안에서 온전한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생활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으로 지금 이후의 삶이 소망으로 가득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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