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비밀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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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4-07 18:30
*** 십자가의 비밀 / 에베소서 2:13-18
** 들어가는 말
에베소서 2:13-18,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전에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건너편 쪽에 방에 회식을 하는듯한 단체손님이 있었습니다.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드는 걸 보니 술판이 벌어진 것 같았습니다. 한 참 후에 건배를 하는데, 한 사람이 ‘우리가 남이가!’라고 선창을 하고 뒤이어 합창으로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중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 술 마실 때는 남이 아니지, 내일 아침에 깨고나봐라 그때도 남이 아닌가?!’ 뼈있는 소리지요? 지금도 종종 우스갯소리로 ‘우리가 남이가!’라고 흉내를 내보기도 합니다. 인간 세상에는 하나가 된다는 것, 평화를 이루어간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티격태격 의견충돌이 생깁니다.
‘존 그레이(John Gray)’박사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남녀관계의 바이블로 통하는 사랑에 관한 지침서입니다. 이 책은 30여 년간 부부들을 위한 상담센터를 운영하면서, 부부간 갈등의 원인과 치유법 연구에 몰두해온 그레이 박사의 ‘화성남자, 금성여자’시리즈에 속합니다. 이 책에서는 남녀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것을 전제 하에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남자가 왜 연인과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필요로 하는지, 여자는 왜 변덕이 심한 것처럼 보이는지 등,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를 다양한 실례를 통해 재미나게 풀어갑니다.
화성에서 온 사람 같은 남자, 그리고 금성에서 온 사람 같은 여자. 이처럼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게 됩니다. 좋을 때는 오히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통해서 매력을 느낍니다. 단점까지도 사랑스럽고 좋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왜 다르냐? 나를 닮아라.’, ‘왜 여자의 세계를 이해 못하느냐?’며 싸우고 미워합니다. 서로 사이가 좋을 때는 전부 같은 것뿐이고 그래서 서로 하나가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고 나면 서로 다른 것만 보이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존 그레이 박사는 이런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났다는 전제를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서로의 다른 환경을 이해하게 되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역사학자인 ‘윌(Will)’박사와 ‘아리엘 듀란트(Ariel Durant)’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지난 3,500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286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체 인류역사에서 92%의 날들이 전쟁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전쟁사를 연구한 ‘나이트’ 교수는 1480년에서부터 1940년까지 약 46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있었던 전쟁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세계가 평온했던 시기는 단 3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앞의 이 이야기들이 말하는 바는 ‘인간의 삶은 갈등과 싸움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외쳤지만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53절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로“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지만 예수님으로 인하여 세상은 더 불화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갈등과 투쟁하는 세상에 평화를 심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과 색깔이 다른 예수님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9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갈라지고 갈등하는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세우셨습니다. 이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예수님의 십자가는 불입니다.
누가복음 12:49-53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과 사람의 화목,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방금 읽은 누가복음 말씀에서는 불을 던지러, 즉 화평이 아니라 분쟁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다릅니까? 실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말씀합니다. 본문 16절을 봅시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목을 위하여 지금까지 화목을 방해한 원수 된 것들을 파괴시켰다.’고 하십니다.
화목을 방해하는 원수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어두움입니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 된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두움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세상은 어두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온갖 죄를 물마시듯 저지르면서 살았습니다. 그 죽음의 어두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통하는 자그마한 통로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이라는 통로입니다. 신명기 28:9절에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명의 통로가 되기를 바라셨던 율법이 도리어 사람을 서로 분리시키며 외식하는 죄의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율법을 본문에서 “중간에 막힌 담(14)”, “의문에 속한 계명(15)”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있는 인간의 욕망들과 율법으로 인한 분리와 갈등의 어두움들이 화목을 방해하는 원수입니다.
어떤 어두움입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19절에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어두움이었습니다. 그곳에 생명의 빛이 보내졌습니다. 사람들은 빛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어두운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빛을 미워하고 끝내는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죽이면 자신들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생각과는 더 멀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를 소멸하고 어두움을 밝히는 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욱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2:29절에서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십자가는 죄를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에 우리를 병들게 하고 분열과 갈등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소멸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게 하는 원수 된 죄악을 파괴시키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십시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연결고리입니다.
‘죄’는 분리시키고,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내모는 주범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 죄가 있는 곳에는 분리와 갈등과 파괴와 죽음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세상은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고, 짓밟고,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은 세상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님의 빛을 담은 등불이라면 세상은 여러분을 경계하고 미워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14절에서 예수님은“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둘레에 높은 담을 쌓고 이방인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 담이 본문 14절에 나오는 중간에 막힌 담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높은 담입니다. 결국 율법으로 세상에는 담 하나가 더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갈라져서 깊은 골이 생겼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높은 담이 생겼습니다. 이 모든 분열과 갈등은 죄로 인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속에서 또는 가정에서 세상적인 분열과 갈등이 있다면 자신의 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이 모든 갈라진 틈을 잇는 연결고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분리시키는 모든 담을 무너뜨리고 관계를 소통시키는 연결고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쌓인 높은 담을 자신을 제물로 드려 무너뜨리고 화해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다리를 놓았습니다. 본문 16절에서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하셨는데, “이 둘”이란 바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이 둘을 먼저 화목하게 하시고, 그리고 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사람들과 화목 하는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탁이자 맡겨진 사명입니다. 고린도후서 5:18-19절을 봅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평화를 위하여 화목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20세기의 신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가 있습니다. 이분이 시카고 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때 한 학생이 사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은 한평생 많은 연구를 하시고, 많은 책을 쓰시고 또 가르쳤는데, 교수님이 그동안 찾은 심오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칼 바르트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말일세…”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말이라는 이것이 내가 생각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찾고 화목의 대상을 찾을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만들고 적극적으로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사랑을 기다리고 화목을 기다리지 말고 찾아 나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과 화목의 결과입니다. 본문 17절에서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시고 직접 찾아오셔서, 인간이 되셔서 평안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찾아나서서 불신자들을 주님과 연결시키는 연결고리가 되고, 모든 공동체에서 하나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보증서입니다.
본문 18절을 봅시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 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보증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를 파괴시키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고, 사도행전 4:12절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우리를 살게 하시는 유일한 생명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죄를 없게 하시고, 사람과도, 하나님과도 평화하게 하시는 연결고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이 땅에서 진정한 평화도 화목도 행복도 없습니다. 세상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움을 밝히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의 등에는 불이 밝혀져 있습니까? 아니면 불이 깜박거리는 불안한 등입니까? 혹 불이 없는 텅 빈 등은 아닌지요?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평화가 아닌 분리와 갈등과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듯이 죄가 어두움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과 한통속이 되어 사는 동안에는 어두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평화와 행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가 보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갈등뿐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세상에서 실패하고, 삶에 갈등이 일어나고,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로마서 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NIV,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고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행복을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에베소서 2:13-18,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전에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건너편 쪽에 방에 회식을 하는듯한 단체손님이 있었습니다.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드는 걸 보니 술판이 벌어진 것 같았습니다. 한 참 후에 건배를 하는데, 한 사람이 ‘우리가 남이가!’라고 선창을 하고 뒤이어 합창으로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중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 술 마실 때는 남이 아니지, 내일 아침에 깨고나봐라 그때도 남이 아닌가?!’ 뼈있는 소리지요? 지금도 종종 우스갯소리로 ‘우리가 남이가!’라고 흉내를 내보기도 합니다. 인간 세상에는 하나가 된다는 것, 평화를 이루어간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티격태격 의견충돌이 생깁니다.
‘존 그레이(John Gray)’박사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남녀관계의 바이블로 통하는 사랑에 관한 지침서입니다. 이 책은 30여 년간 부부들을 위한 상담센터를 운영하면서, 부부간 갈등의 원인과 치유법 연구에 몰두해온 그레이 박사의 ‘화성남자, 금성여자’시리즈에 속합니다. 이 책에서는 남녀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것을 전제 하에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남자가 왜 연인과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필요로 하는지, 여자는 왜 변덕이 심한 것처럼 보이는지 등,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를 다양한 실례를 통해 재미나게 풀어갑니다.
화성에서 온 사람 같은 남자, 그리고 금성에서 온 사람 같은 여자. 이처럼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게 됩니다. 좋을 때는 오히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통해서 매력을 느낍니다. 단점까지도 사랑스럽고 좋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왜 다르냐? 나를 닮아라.’, ‘왜 여자의 세계를 이해 못하느냐?’며 싸우고 미워합니다. 서로 사이가 좋을 때는 전부 같은 것뿐이고 그래서 서로 하나가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고 나면 서로 다른 것만 보이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존 그레이 박사는 이런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났다는 전제를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서로의 다른 환경을 이해하게 되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역사학자인 ‘윌(Will)’박사와 ‘아리엘 듀란트(Ariel Durant)’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지난 3,500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286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체 인류역사에서 92%의 날들이 전쟁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전쟁사를 연구한 ‘나이트’ 교수는 1480년에서부터 1940년까지 약 46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있었던 전쟁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세계가 평온했던 시기는 단 3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앞의 이 이야기들이 말하는 바는 ‘인간의 삶은 갈등과 싸움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외쳤지만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53절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로“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지만 예수님으로 인하여 세상은 더 불화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갈등과 투쟁하는 세상에 평화를 심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과 색깔이 다른 예수님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9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갈라지고 갈등하는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세우셨습니다. 이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예수님의 십자가는 불입니다.
누가복음 12:49-53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과 사람의 화목,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방금 읽은 누가복음 말씀에서는 불을 던지러, 즉 화평이 아니라 분쟁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다릅니까? 실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말씀합니다. 본문 16절을 봅시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목을 위하여 지금까지 화목을 방해한 원수 된 것들을 파괴시켰다.’고 하십니다.
화목을 방해하는 원수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어두움입니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 된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두움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세상은 어두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온갖 죄를 물마시듯 저지르면서 살았습니다. 그 죽음의 어두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통하는 자그마한 통로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이라는 통로입니다. 신명기 28:9절에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명의 통로가 되기를 바라셨던 율법이 도리어 사람을 서로 분리시키며 외식하는 죄의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율법을 본문에서 “중간에 막힌 담(14)”, “의문에 속한 계명(15)”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있는 인간의 욕망들과 율법으로 인한 분리와 갈등의 어두움들이 화목을 방해하는 원수입니다.
어떤 어두움입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19절에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어두움이었습니다. 그곳에 생명의 빛이 보내졌습니다. 사람들은 빛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어두운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빛을 미워하고 끝내는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죽이면 자신들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생각과는 더 멀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를 소멸하고 어두움을 밝히는 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욱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2:29절에서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십자가는 죄를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에 우리를 병들게 하고 분열과 갈등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소멸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게 하는 원수 된 죄악을 파괴시키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십시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연결고리입니다.
‘죄’는 분리시키고,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내모는 주범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 죄가 있는 곳에는 분리와 갈등과 파괴와 죽음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세상은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고, 짓밟고,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은 세상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님의 빛을 담은 등불이라면 세상은 여러분을 경계하고 미워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14절에서 예수님은“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둘레에 높은 담을 쌓고 이방인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 담이 본문 14절에 나오는 중간에 막힌 담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높은 담입니다. 결국 율법으로 세상에는 담 하나가 더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갈라져서 깊은 골이 생겼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높은 담이 생겼습니다. 이 모든 분열과 갈등은 죄로 인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속에서 또는 가정에서 세상적인 분열과 갈등이 있다면 자신의 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이 모든 갈라진 틈을 잇는 연결고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분리시키는 모든 담을 무너뜨리고 관계를 소통시키는 연결고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쌓인 높은 담을 자신을 제물로 드려 무너뜨리고 화해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다리를 놓았습니다. 본문 16절에서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하셨는데, “이 둘”이란 바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이 둘을 먼저 화목하게 하시고, 그리고 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사람들과 화목 하는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탁이자 맡겨진 사명입니다. 고린도후서 5:18-19절을 봅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평화를 위하여 화목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20세기의 신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가 있습니다. 이분이 시카고 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때 한 학생이 사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은 한평생 많은 연구를 하시고, 많은 책을 쓰시고 또 가르쳤는데, 교수님이 그동안 찾은 심오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칼 바르트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말일세…”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말이라는 이것이 내가 생각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찾고 화목의 대상을 찾을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만들고 적극적으로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사랑을 기다리고 화목을 기다리지 말고 찾아 나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과 화목의 결과입니다. 본문 17절에서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시고 직접 찾아오셔서, 인간이 되셔서 평안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찾아나서서 불신자들을 주님과 연결시키는 연결고리가 되고, 모든 공동체에서 하나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보증서입니다.
본문 18절을 봅시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 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보증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를 파괴시키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고, 사도행전 4:12절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우리를 살게 하시는 유일한 생명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죄를 없게 하시고, 사람과도, 하나님과도 평화하게 하시는 연결고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이 땅에서 진정한 평화도 화목도 행복도 없습니다. 세상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움을 밝히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의 등에는 불이 밝혀져 있습니까? 아니면 불이 깜박거리는 불안한 등입니까? 혹 불이 없는 텅 빈 등은 아닌지요?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평화가 아닌 분리와 갈등과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듯이 죄가 어두움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과 한통속이 되어 사는 동안에는 어두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평화와 행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가 보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갈등뿐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세상에서 실패하고, 삶에 갈등이 일어나고,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로마서 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NIV,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고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행복을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