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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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3-11 14:03
***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 요 16:25-33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6:25-33,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간을 앞 둔 주일입니다. 사순절 절기는 성도를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절로 시작해서 고난주간, 고난일 그리고 부활절까지 지혜롭게 행하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성도의 모든 영과 육신의 삶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8절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사순절의 경건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이 승리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영국이 자랑하는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는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영국소설가입니다. 스크루지가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 사후에 작품화 된 ‘주 예수의 생애’ 등 세계적인 작품을 썼습니다. 그 중에서 프랑스 혁명 당시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을 대신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시드니 카턴’이라는 남자의 처절하고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는 ‘두 도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드니 카턴은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독주에 취한 자신의 초라한 얼굴을 보고는 “너는 어리석은 놈이다. 내가 너인 줄을 미처 몰랐다!”며 괴로워합니다. 그는 ‘인생의 실패자’라는 생각으로 몸부림치며, 주먹으로 거울을 깨뜨립니다. 이렇게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달은 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 속에 있는 서로 다른 두 모습 때문에 고민할 것입니다.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같은 숨겨진 자신의 욕망에 매여 있는 모습 말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자괴감과 이중적인 모습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위대한 전도자 바울 사도도 진리를 추구하는 자신의 속에 꿈틀거리는 육신의 욕망 때문에 부르짖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나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8-19)라고 탄식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부르짖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삶을 보면서 만족하십니까? “나는 인생의 성공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나는 인생의 승리자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완전한 승리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워 옴을 아시고 제자들의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하시려고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메시아’로 ‘왕’으로 기대하고 있는 제자들이 받게 될 엄청난 충격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나는 사건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고, 그 사건의 내적인 진리를 깨닫고 당당하게 나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영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25-26절에서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시며 어린아이 대하듯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밝히 알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열려져서 직접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 주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곧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지만 제자들은 세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33절에서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일러두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서 너희는 많은 시련과 슬픔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주제처럼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떠나 계실 것이지만 그의 성도들은 세상에서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6:7절을 봅시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십니다. 아리송하지요? 이제 이 비밀을 밝혀봅시다.
♥ 완전한 승리는 영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본문 27절을 봅시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현대어성경/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극진한 사랑을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영의 문이 열린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사람, 즉 육신의 사람으로 살 때에는 영이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영의 문’이라는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주’로 믿고, 지난 행위를 회개하고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영접할 때 영의 생명이 시작되고 영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보혜사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2:38절에서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시며 갈라디아서 4:6절에서는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본문 27절의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을 믿은 고로”라는 말씀이 이를 뜻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의 문이 열려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일주일 내내 기도한 번 제대로 안 해도 아무렇지도 않고, 성경 한 구절 읽지 않고도 하루하루 사는 것에 아무런 답답함이 없다면 영의 문이 열려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통 되지 않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통이 되지 않으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지 못하십니다. 결국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뜻과 세상의 방법으로 살게 되면 반드시 징계가 따르게 됩니다. 사무엘하 7:14절을 봅시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라고 하십니다. 즉 인생이 힘들고,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받게 됩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나님께 대항하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레위기 26:14-39절에 상세한 내용이 있는데, 점점 더 강한 징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23-26절만 읽어봅시다.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24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 배나 더 칠지라. 25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26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사람들이 급하게 되면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의 어려움만을 피해보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옛 속담에도 ‘범 본 여편네 창구멍을 틀어막듯 한다.’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문이 흔들릴 정도로 ‘어흥’하는 호랑이의 포효를 들은 아낙네가 창구멍으로 조심스럽게 밖을 봅니다. 웬걸! 집 앞에 집채만 한 호랑이가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겁을 한 아낙네가 허겁지겁 창구멍을 틀어막고는 방안에서 오들오들 떨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의 또 다른 속담에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임기응변식의 대응은 하나님을 더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7절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승리를 원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영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 완전한 승리는 소통이 원활해야 합니다.
본문 30-32절을 봅시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지가 어언 3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즉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날 때가 가까워지자 제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밝히 가르치셨고, 제자들은 이제야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조차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32절에서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어려움을 당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몇 날이 못 되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영으로는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즉 ‘관계 회복’과 ‘원활한 소통’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회개하여 죄 사함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께서 오심과 동시에 영이 살아나고(중생),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영적인 갓난아기입니다. 갓난아기에게는 승리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일을 하거나 싸움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조차도 스스로 간수하기가 힘이 듭니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은 젖을 먹고, 이유식을 하고, 연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부지런히 자라야 합니다. 자유를 누리고 일에서든지 영적인 싸움에서든지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20절에서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며, 히브리서 6:1-2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원활한 소통이란, 성령 충만입니다. 요한복음 15:5절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즉 모든 일을 줄기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자녀양육, 재물사용, 시간사용, 은사사용, 섬김, 봉사 등 모든 일을 예수님 중심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며, 삶의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승리입니다.
미국의 소설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가 쓴 노벨문학 수상작인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을 아시지요?
멕시코 만에 고깃배를 띄우고 살아가는 ‘산티아고’라는 늙은 어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장 저녁거리도 없는 낡은 오두막에서 외롭게 살아갑니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이 어부는 나룻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가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그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빈 배였습니다. 주민들은 노인이 늙어서 더 이상 고기를 못 잡는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무려 84일 동안이나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작가인 헤밍웨이는 ‘살리오.’라고 했습니다. ‘살리오’란 스페인 어로 ‘액운이 단단히 끼었다.’는 뜻입니다. 즉 ‘완전한 패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85일째가 되던 날, 노인은 84일 간의 패배를 딛고 다시금 바다로 나갑니다. 그 날은 몇 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나룻배보다 거의 1미터나 더 큰 자줏빛 대어를 낚았습니다. 헤밍웨이는 이것을 ‘올레’라고 부릅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투우사가 소의 목에 검을 꽂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을 때 모두가 일어서서 ‘올레’라고 외칩니다. 즉 ‘올레’는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승리는 긴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섰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승리도 이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모순된 모습을 알고 고민하며, 철저하게 낮아지고 부서지고 비워질 때, 승리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영국의 작가인 ‘골드스미스(Goldsmith, Oliver)’는 “내 생애 최대의 자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그러합니다. 한 번, 두 번 실패했다고,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다고 관계를 포기하려 들지 말고, 다시 일어섭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며, 지금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주인이십니다. 본문 33절처럼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승리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도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끝자락에서 ‘올레’를 외칠 수 있도록 영의 문을 열고, 하나님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6:25-33,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간을 앞 둔 주일입니다. 사순절 절기는 성도를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절로 시작해서 고난주간, 고난일 그리고 부활절까지 지혜롭게 행하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성도의 모든 영과 육신의 삶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8절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사순절의 경건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이 승리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영국이 자랑하는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는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영국소설가입니다. 스크루지가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 사후에 작품화 된 ‘주 예수의 생애’ 등 세계적인 작품을 썼습니다. 그 중에서 프랑스 혁명 당시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을 대신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시드니 카턴’이라는 남자의 처절하고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는 ‘두 도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드니 카턴은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독주에 취한 자신의 초라한 얼굴을 보고는 “너는 어리석은 놈이다. 내가 너인 줄을 미처 몰랐다!”며 괴로워합니다. 그는 ‘인생의 실패자’라는 생각으로 몸부림치며, 주먹으로 거울을 깨뜨립니다. 이렇게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달은 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 속에 있는 서로 다른 두 모습 때문에 고민할 것입니다.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같은 숨겨진 자신의 욕망에 매여 있는 모습 말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자괴감과 이중적인 모습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위대한 전도자 바울 사도도 진리를 추구하는 자신의 속에 꿈틀거리는 육신의 욕망 때문에 부르짖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나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8-19)라고 탄식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부르짖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삶을 보면서 만족하십니까? “나는 인생의 성공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나는 인생의 승리자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완전한 승리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워 옴을 아시고 제자들의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하시려고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메시아’로 ‘왕’으로 기대하고 있는 제자들이 받게 될 엄청난 충격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나는 사건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고, 그 사건의 내적인 진리를 깨닫고 당당하게 나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영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25-26절에서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시며 어린아이 대하듯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밝히 알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열려져서 직접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 주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곧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지만 제자들은 세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33절에서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일러두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서 너희는 많은 시련과 슬픔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주제처럼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떠나 계실 것이지만 그의 성도들은 세상에서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6:7절을 봅시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십니다. 아리송하지요? 이제 이 비밀을 밝혀봅시다.
♥ 완전한 승리는 영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본문 27절을 봅시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현대어성경/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극진한 사랑을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영의 문이 열린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사람, 즉 육신의 사람으로 살 때에는 영이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영의 문’이라는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주’로 믿고, 지난 행위를 회개하고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영접할 때 영의 생명이 시작되고 영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보혜사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2:38절에서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시며 갈라디아서 4:6절에서는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본문 27절의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을 믿은 고로”라는 말씀이 이를 뜻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의 문이 열려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일주일 내내 기도한 번 제대로 안 해도 아무렇지도 않고, 성경 한 구절 읽지 않고도 하루하루 사는 것에 아무런 답답함이 없다면 영의 문이 열려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통 되지 않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통이 되지 않으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지 못하십니다. 결국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뜻과 세상의 방법으로 살게 되면 반드시 징계가 따르게 됩니다. 사무엘하 7:14절을 봅시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라고 하십니다. 즉 인생이 힘들고,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받게 됩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나님께 대항하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레위기 26:14-39절에 상세한 내용이 있는데, 점점 더 강한 징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23-26절만 읽어봅시다.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24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 배나 더 칠지라. 25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26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사람들이 급하게 되면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의 어려움만을 피해보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옛 속담에도 ‘범 본 여편네 창구멍을 틀어막듯 한다.’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문이 흔들릴 정도로 ‘어흥’하는 호랑이의 포효를 들은 아낙네가 창구멍으로 조심스럽게 밖을 봅니다. 웬걸! 집 앞에 집채만 한 호랑이가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겁을 한 아낙네가 허겁지겁 창구멍을 틀어막고는 방안에서 오들오들 떨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의 또 다른 속담에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임기응변식의 대응은 하나님을 더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7절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승리를 원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영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 완전한 승리는 소통이 원활해야 합니다.
본문 30-32절을 봅시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지가 어언 3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즉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날 때가 가까워지자 제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밝히 가르치셨고, 제자들은 이제야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조차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32절에서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어려움을 당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몇 날이 못 되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영으로는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즉 ‘관계 회복’과 ‘원활한 소통’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회개하여 죄 사함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께서 오심과 동시에 영이 살아나고(중생),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영적인 갓난아기입니다. 갓난아기에게는 승리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일을 하거나 싸움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조차도 스스로 간수하기가 힘이 듭니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은 젖을 먹고, 이유식을 하고, 연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부지런히 자라야 합니다. 자유를 누리고 일에서든지 영적인 싸움에서든지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20절에서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며, 히브리서 6:1-2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원활한 소통이란, 성령 충만입니다. 요한복음 15:5절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즉 모든 일을 줄기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자녀양육, 재물사용, 시간사용, 은사사용, 섬김, 봉사 등 모든 일을 예수님 중심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며, 삶의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승리입니다.
미국의 소설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가 쓴 노벨문학 수상작인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을 아시지요?
멕시코 만에 고깃배를 띄우고 살아가는 ‘산티아고’라는 늙은 어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장 저녁거리도 없는 낡은 오두막에서 외롭게 살아갑니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이 어부는 나룻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가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그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빈 배였습니다. 주민들은 노인이 늙어서 더 이상 고기를 못 잡는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무려 84일 동안이나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작가인 헤밍웨이는 ‘살리오.’라고 했습니다. ‘살리오’란 스페인 어로 ‘액운이 단단히 끼었다.’는 뜻입니다. 즉 ‘완전한 패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85일째가 되던 날, 노인은 84일 간의 패배를 딛고 다시금 바다로 나갑니다. 그 날은 몇 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나룻배보다 거의 1미터나 더 큰 자줏빛 대어를 낚았습니다. 헤밍웨이는 이것을 ‘올레’라고 부릅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투우사가 소의 목에 검을 꽂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을 때 모두가 일어서서 ‘올레’라고 외칩니다. 즉 ‘올레’는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승리는 긴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섰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승리도 이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모순된 모습을 알고 고민하며, 철저하게 낮아지고 부서지고 비워질 때, 승리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영국의 작가인 ‘골드스미스(Goldsmith, Oliver)’는 “내 생애 최대의 자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그러합니다. 한 번, 두 번 실패했다고,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다고 관계를 포기하려 들지 말고, 다시 일어섭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며, 지금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주인이십니다. 본문 33절처럼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승리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도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끝자락에서 ‘올레’를 외칠 수 있도록 영의 문을 열고, 하나님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