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면 됩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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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8-23 17:18
*** 어떻게 살면 됩니까? / 눅 3:7-14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3:7-14,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중국의 사상가인 ‘장자(莊子)’가 어느 날 활을 메고 사냥을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긴 까치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서 멀리 있는 나뭇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그 모양이 하도 이상해서 그 까치를 사냥하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활을 쏠 수 있는 곳까지 와서 활을 당기려고 보니, 까치가 무엇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까치가 노리는 쪽을 보니 풀숲 사이에 사마귀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귀는 또 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사마귀도 까치도 눈앞의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장자는 한심한 그 미물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활을 거두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나이가 몽둥이로 들고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정을 알고 본즉, 장자가 정신없이 까치를 따라가느라 남의 채소밭으로 지나가면서 채소를 망가뜨려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밭의 주인이 그 모습을 보고는 몽둥이를 들고 따라왔던 것입니다. 결국 사마귀나 까치나 장자 모두가 똑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물체들은 각자의 목적을 향하여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 인생들도 제각기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을 바쁘게 살아가는 인생들이 사는데 바빠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의 장자 이야기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따라오는 죽음의 시간을 잊은 채 육신의 삶에 매달려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예고되어 있는 공개된 진리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입니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있을 심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자신의 죽음과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 됩니다. 그렇다면 죽음과 죽음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자 한다면 이렇게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사야 45:11절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묻게 됩니다. 여러분은 매일 하나님께 자신의 길을 묻습니까?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부탁합니까? 아니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혼자서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 물어야 할 일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봅시다.
먼저, 본문의 배경과 말씀의 의도를 찾아봅시다.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는 세례요한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소리는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소리와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여 년간을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침묵하신 이유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8: 5-7절입니다.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현상을 사도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로마서3:10-12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00여년 만에 침묵을 깨시고 세례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우둔한 사람들의 마음에 메시아의 자리를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급해 했던 유대인들이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군중들 속에는 세리들과 군인들을 비롯한 하나님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슴을 치며 세례요한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며 순종의 결단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순종의 결단을 합니까? 그렇다면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즉 어떻게 살라고 하십니까?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청은 본문 7-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로 요약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 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라. 사실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온 무리들은 그나마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족속들”이라는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의 모습이 전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돈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선민이지만 그들의 생활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자신들의 생각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고도 단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선민이라 할지라도 선민으로서의 행함이 없으면 찍어버리시고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십니다.
1)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주시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 하나에 연연해하지 않으십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는 변함없이 이루어져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를 통하여서도 그 뜻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면 준비 된 다른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예레미야 18:1-6절을 ‘토기장이의 비유’라고 합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로마서 9:21절에도 역시 토기장이의 비유가 나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유지하려면 세례요한의 외침처럼 ‘자신을 정비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잘못 했습니다.”를 연발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지금까지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새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죄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신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만일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회개하고서도 지금까지의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베드로후서 2:22절에서는,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날마다 새로운 삶의 길입니까? 아니면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거나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곳에 다시 눕는 그런 반복되는 삶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그에 합당한 삶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서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져 넣는다.”고 하셨습니다. ‘열매’란 ‘자신의 생활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행동이나 삶’을 말합니다. 이 열매의 구체적인 내용은 본문10-14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당시의 사회적인 환경에서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일반 군중들에게는 “옷 두벌이 있는 사람은 옷 없는 사람에게 한 벌을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없어 굶주리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 외에는 더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군병들에게는, “사람에게 포악한 짓을 삼가하고, 권력의 힘이 있다고 약한 사람을 억누르려고 하지 말고, 받는 월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이 요구가 황당하거나 지키기 어려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지극히 당연한 요구입니다. 즉 지금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자신의 직분에서 정의롭고 정당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범위를 벗어나는 욕심을 내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심이, 우리 육신의 욕망이 스스로의 고난을 부른 것입니다. 이사야 59:2절에서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하려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욕심을 낸다고 더 높아지고, 욕심을 낸다고 더 많이 가지고, 욕심을 낸다고 더 행복하고 즐겁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2,3절에서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지켜야 할 삶을 살지 못하고 욕심을 내다가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가 총체적으로 부실하며 불신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계획이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이해하고 자신의 재능과 직분을 안다면 그것을 성실하게 행함으로서 충분한 것입니다. 즉 신뢰받을 수 있는 생활로 이웃에게 믿음을 심어가고, 따뜻한 마음을 퍼뜨려갈 차 한 잔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러한 생활 속에 복음을 실천하고 전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합당한 생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합당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시대가 어수선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행함으로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삶으로서 어둡고 혼란스러운 이때에 주변을 밝게 만들어가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3:7-14,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중국의 사상가인 ‘장자(莊子)’가 어느 날 활을 메고 사냥을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긴 까치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서 멀리 있는 나뭇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그 모양이 하도 이상해서 그 까치를 사냥하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활을 쏠 수 있는 곳까지 와서 활을 당기려고 보니, 까치가 무엇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까치가 노리는 쪽을 보니 풀숲 사이에 사마귀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귀는 또 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사마귀도 까치도 눈앞의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장자는 한심한 그 미물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활을 거두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나이가 몽둥이로 들고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정을 알고 본즉, 장자가 정신없이 까치를 따라가느라 남의 채소밭으로 지나가면서 채소를 망가뜨려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밭의 주인이 그 모습을 보고는 몽둥이를 들고 따라왔던 것입니다. 결국 사마귀나 까치나 장자 모두가 똑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물체들은 각자의 목적을 향하여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 인생들도 제각기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을 바쁘게 살아가는 인생들이 사는데 바빠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의 장자 이야기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따라오는 죽음의 시간을 잊은 채 육신의 삶에 매달려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예고되어 있는 공개된 진리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입니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있을 심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자신의 죽음과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 됩니다. 그렇다면 죽음과 죽음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자 한다면 이렇게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사야 45:11절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묻게 됩니다. 여러분은 매일 하나님께 자신의 길을 묻습니까?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부탁합니까? 아니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혼자서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 물어야 할 일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봅시다.
먼저, 본문의 배경과 말씀의 의도를 찾아봅시다.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는 세례요한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소리는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소리와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여 년간을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침묵하신 이유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8: 5-7절입니다.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현상을 사도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로마서3:10-12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00여년 만에 침묵을 깨시고 세례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우둔한 사람들의 마음에 메시아의 자리를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급해 했던 유대인들이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군중들 속에는 세리들과 군인들을 비롯한 하나님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슴을 치며 세례요한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며 순종의 결단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순종의 결단을 합니까? 그렇다면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즉 어떻게 살라고 하십니까?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청은 본문 7-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로 요약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 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라. 사실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온 무리들은 그나마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족속들”이라는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의 모습이 전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돈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선민이지만 그들의 생활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자신들의 생각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고도 단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선민이라 할지라도 선민으로서의 행함이 없으면 찍어버리시고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십니다.
1)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주시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 하나에 연연해하지 않으십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는 변함없이 이루어져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를 통하여서도 그 뜻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면 준비 된 다른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예레미야 18:1-6절을 ‘토기장이의 비유’라고 합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로마서 9:21절에도 역시 토기장이의 비유가 나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유지하려면 세례요한의 외침처럼 ‘자신을 정비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잘못 했습니다.”를 연발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지금까지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새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죄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신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만일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회개하고서도 지금까지의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베드로후서 2:22절에서는,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날마다 새로운 삶의 길입니까? 아니면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거나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곳에 다시 눕는 그런 반복되는 삶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그에 합당한 삶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서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져 넣는다.”고 하셨습니다. ‘열매’란 ‘자신의 생활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행동이나 삶’을 말합니다. 이 열매의 구체적인 내용은 본문10-14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당시의 사회적인 환경에서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일반 군중들에게는 “옷 두벌이 있는 사람은 옷 없는 사람에게 한 벌을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없어 굶주리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 외에는 더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군병들에게는, “사람에게 포악한 짓을 삼가하고, 권력의 힘이 있다고 약한 사람을 억누르려고 하지 말고, 받는 월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이 요구가 황당하거나 지키기 어려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지극히 당연한 요구입니다. 즉 지금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자신의 직분에서 정의롭고 정당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범위를 벗어나는 욕심을 내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심이, 우리 육신의 욕망이 스스로의 고난을 부른 것입니다. 이사야 59:2절에서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하려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욕심을 낸다고 더 높아지고, 욕심을 낸다고 더 많이 가지고, 욕심을 낸다고 더 행복하고 즐겁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2,3절에서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지켜야 할 삶을 살지 못하고 욕심을 내다가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가 총체적으로 부실하며 불신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계획이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이해하고 자신의 재능과 직분을 안다면 그것을 성실하게 행함으로서 충분한 것입니다. 즉 신뢰받을 수 있는 생활로 이웃에게 믿음을 심어가고, 따뜻한 마음을 퍼뜨려갈 차 한 잔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러한 생활 속에 복음을 실천하고 전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합당한 생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합당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시대가 어수선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행함으로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삶으로서 어둡고 혼란스러운 이때에 주변을 밝게 만들어가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