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루는 사람 2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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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6-25 14:02
*** 꿈을 이루는 사람 2 / 창세기 37:5-11
** 들어가는 말
창세기 37:5-11,18-20,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002년 월드컵 때에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기분으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꿈! dream!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말,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말입니다. 아마도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꿈이 있을 것입니다. 잠언 29: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NKJV)에서는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are unrestrained, But happy is he who keeps the law.”(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하지만, 율법을 지키면 행복하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가난해도 하나님을 위한 꿈이 있고, 사람들이 볼 때 시원치 않아도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민족을 향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거지가 될지언정 큰 이상과 꿈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몸은 커지고, 삶의 질은 좋아졌지만 원대한 꿈은 없고, 육신의 만족이나 꿈꾸는 유치한 인생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까?
지난주에도 냉대 속에서도 끈질긴 도전으로 자신의 꿈을 이룬 ‘가나안 여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꿈을 이루는 사람’에 대한 두 번째로 ‘꿈의 사람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려합니다. ‘꿈’이라고 하면 성경에서 뺄 수 없는 인물이 ‘요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성장하는 과정과 고난의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섭리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과 역사에 어떻게 섭리하시는지, 또한 사람에게 주어진 꿈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 먼저, 꿈을 꾸게 하는 주체를 살펴봅시다.
사람마다 어떤 종류든 꿈과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아린아이들도 자신이 바라는 소망이 있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이러한 꿈은 어떻게 생겨나겠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에 있어서 믿음의 사람과 불신자의 세계와는 다르겠지요. 그러나 근본적인 모든 꿈은 그 관리자가 한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2:13절을 봅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꿈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즉 사람에게 꿈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을 하나 더 봅시다. 예레미야 29: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꿈과 소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불신자의 세계에는 어떻겠습니까? 열왕기상 22:20-2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악인의 꿈은 ‘잔꾀’가 되는데, 이것마저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잠언 16: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고, 29:26절에서는,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신. 불신을 막론하고 사람의 모든 꿈과 소망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 그러면 꿈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사람에게 꿈과 소망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만, 그 꿈을 이루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그 사실을 자세하게 보여주십니다.
첫째, 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장래를 꿈으로 보이셨습니다. 같은 의미의 꿈을 두 번 연속해서 보이신 것은 확실하게 이루시겠다는 표현이십니다. 한 번은 곡식 단을 통해서 보이셨습니다.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나머지 형제들의 단은 둘러서서 절을 했습니다. 또 한 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을 향하여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본문 19절에서 그의 형제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요셉이 꿈에 대하여 늘 말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꿈과 비전,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꿈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꿈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열정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말함으로서 꿈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으로 말미암아 꿈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 상인에게 팔리게 되고, 결국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 노예가 됩니다. 상황은 그기에 그치지 않고 더욱 악화되어 보디발 장군 부인에 의하여 누명을 쓰고 죄수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도 요셉의 꿈을 향하는 열망을 포기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유명한 강철 왕 카네기의 사무실 한 가운데 벽에는 낡은 커다란 그림 하나가 그의 일생 동안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었고,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는 그림도 아니었습니다. 그림 내용은 커다란 나룻배 하나와 배를 젓는 노가 썰물 때에 밀려서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는 것으로. 무척 절망스럽고 처절하게까지 보이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귀가 씌어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카네기에게 ‘어째서 이 그림을 그렇게 사랑하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가 청년 시절에 세일즈맨으로 이 집 저 집을 방문하며 물건을 팔았는데. 어느 노인 댁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 그림이 퍽 인상적이었고, 특히“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귀는 오랫동안 그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8세 되던 해에 기어코 그 노인을 찾아가 용기를 내어 청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이 그림을 자기에게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드린 것입니다. 노인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카네기는 이 그림을 일생 동안 소중하게 보관했고“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말을 생활신조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꿈이 깊은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꿈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물 때를 생각하면선 기도하고 준비하는 열정을 불태우게 됩니다. 이런 꿈과 소망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비록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열정이 진정한 꿈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꿈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표현하게 합니다.
옛말에 ‘병은 자랑해야 낫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병을 나타내면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같은 병을 앓았던 사람이나 그 병을 아는 사람으로부터 고칠 수 있는 방법들을 조언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꿈과 소망에 대하여 나타내고 표현하는 것은 기대감과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꿈과 소망에 대한 기대감이나 관심이 없으면 꿈을 밝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꿈과 소망이 있는 사람은 그 눈빛마저 초롱초롱하여 자신의 꿈을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당당하고 자신 있게 꿈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는 믿음입니다.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시며, 27절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하십니다. 즉 보이지 않고 아직 이루지 않은 꿈과 비전, 소망을 마치 보이는 것처럼, 이미 받은 것처럼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꿈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꿈을 나타내고 표현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본문 5,6절에서,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라고 했고, 9절에서도,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라고 자신의 꿈을 알렸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환경과 상황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압니다. 요셉의 생애에는 계속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라는 말이 따라다닙니다. 이는 요셉에게 주어지는 모든 환경들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자신의 꿈과 소망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믿는다면 확신 있게 표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꿈을 이루도록 힘쓰고 노력하도록 하십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나로 통하는 삶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행하는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도록 기다리거나, 자신의 꿈만 믿고 빈둥거리며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낭비한다면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로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눈에 띌 정도로 열심히 섬겼습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았으며, 운명이라 생각하고 자포자기 하지도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면서도 성실과 충직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에서 힘쓰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며, 찾는 자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시며,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보디발 장군은 요셉에게 모든 가산을 맡겼으며, 감옥의 간수장도 죄수 관리를 요셉에게 완전히 일임했습니다. 창세기 39:4절에서, “그가 요셉으로 가정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라고 했으며, 39:22,23절에서는, “전옥(典獄)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죄수들의 일에 대하여 성실하게 돌보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이 결실로 나타나서 결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은혜를 베푸셨으며, 요셉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실한 노력을 다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학기말 고사를 하루 앞둔 날, 강의실에서 기도소리가 들렸습니다. 교수가 지나가다가 누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나 하고 창문으로 바라보니 자기가 맡은 과의 학생이었습니다. 기특하다 싶어 기도를 들어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일 시험을 치를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다 알게 하시고 정답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안쓰럽게 생각한 교수가 학생을 불러서 “내일이 시험인데 기도도 좋지만 이제 공부를 하게나.”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학생은 “교수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시원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이튿날, 성경시험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밤에 기도하던 학생이 시험지를 받아들기는 했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갑자기 지혜가 떠올라 답안지를 제일 먼저 작성해서 제출하고는 유유히 시험장을 나갔습니다. 교수가 답안지를 받아 보니 기가 막힌 답이었습니다. 답은 아주 간단하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교수가 채점을 하는데 어떻게 채점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에게도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교수는 이렇게 채점해서 학생에게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니 100점, 너는 아무것도 모르니 0점”
우리는 하나님께서 능치 못함이 없음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빙자하여 우리의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거나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됩니다. 꿈이 있고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이루도록 요셉을 통하여 보이신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의 유월절엔 꼭 등장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마민’이라는 아름다운 노래인데, 아니마민이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도 그곳에 감금된 불행한 유태인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그런데, 그즈음 젊고 유능한 한 유대인 외과 의사가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가스실과 실험실을 향해 떠나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제노역 시간에 이 젊은 의사는 흙 속에 파묻힌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몰래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침과 저녁이면 그 깨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들이 와서 가스실로 보낼 처형자들을 골랐습니다. 나치들은 유리병 조각으로 피가 묻어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된 의욕에 넘치는 외과의사의 턱을 보고 차마 그를 가스실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으로 인해 아주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선입감을 주었기 때문에 나치들이 그를 죽이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나치스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그 죽음의 수용소를 떠날 때 그의 소지품은 단 한 가지 그 깨진 유리병 조각이었습니다. 그 유태인 의사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늦지 않으십니다. 시편105:17-19절을 봅시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고난 속에서 강하게 단련시키십니다. 우리의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성실하게 실천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요셉이나 유대인 외과 의사처럼 자신의 주변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자신의 힘과 능력이 닿는 데까지 힘쓰고 노력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말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꿈이 많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보이신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꿈을 깊이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힘쓰고 노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창세기 37:5-11,18-20,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002년 월드컵 때에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기분으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꿈! dream!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말,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말입니다. 아마도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꿈이 있을 것입니다. 잠언 29: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NKJV)에서는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are unrestrained, But happy is he who keeps the law.”(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하지만, 율법을 지키면 행복하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가난해도 하나님을 위한 꿈이 있고, 사람들이 볼 때 시원치 않아도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민족을 향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거지가 될지언정 큰 이상과 꿈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몸은 커지고, 삶의 질은 좋아졌지만 원대한 꿈은 없고, 육신의 만족이나 꿈꾸는 유치한 인생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까?
지난주에도 냉대 속에서도 끈질긴 도전으로 자신의 꿈을 이룬 ‘가나안 여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꿈을 이루는 사람’에 대한 두 번째로 ‘꿈의 사람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려합니다. ‘꿈’이라고 하면 성경에서 뺄 수 없는 인물이 ‘요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성장하는 과정과 고난의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섭리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과 역사에 어떻게 섭리하시는지, 또한 사람에게 주어진 꿈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 먼저, 꿈을 꾸게 하는 주체를 살펴봅시다.
사람마다 어떤 종류든 꿈과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아린아이들도 자신이 바라는 소망이 있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이러한 꿈은 어떻게 생겨나겠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에 있어서 믿음의 사람과 불신자의 세계와는 다르겠지요. 그러나 근본적인 모든 꿈은 그 관리자가 한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2:13절을 봅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꿈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즉 사람에게 꿈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을 하나 더 봅시다. 예레미야 29: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꿈과 소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불신자의 세계에는 어떻겠습니까? 열왕기상 22:20-2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악인의 꿈은 ‘잔꾀’가 되는데, 이것마저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잠언 16: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고, 29:26절에서는,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신. 불신을 막론하고 사람의 모든 꿈과 소망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 그러면 꿈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사람에게 꿈과 소망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만, 그 꿈을 이루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그 사실을 자세하게 보여주십니다.
첫째, 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장래를 꿈으로 보이셨습니다. 같은 의미의 꿈을 두 번 연속해서 보이신 것은 확실하게 이루시겠다는 표현이십니다. 한 번은 곡식 단을 통해서 보이셨습니다.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나머지 형제들의 단은 둘러서서 절을 했습니다. 또 한 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을 향하여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본문 19절에서 그의 형제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요셉이 꿈에 대하여 늘 말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꿈과 비전,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꿈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꿈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열정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말함으로서 꿈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으로 말미암아 꿈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 상인에게 팔리게 되고, 결국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 노예가 됩니다. 상황은 그기에 그치지 않고 더욱 악화되어 보디발 장군 부인에 의하여 누명을 쓰고 죄수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도 요셉의 꿈을 향하는 열망을 포기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유명한 강철 왕 카네기의 사무실 한 가운데 벽에는 낡은 커다란 그림 하나가 그의 일생 동안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었고,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는 그림도 아니었습니다. 그림 내용은 커다란 나룻배 하나와 배를 젓는 노가 썰물 때에 밀려서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는 것으로. 무척 절망스럽고 처절하게까지 보이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귀가 씌어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카네기에게 ‘어째서 이 그림을 그렇게 사랑하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가 청년 시절에 세일즈맨으로 이 집 저 집을 방문하며 물건을 팔았는데. 어느 노인 댁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 그림이 퍽 인상적이었고, 특히“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귀는 오랫동안 그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8세 되던 해에 기어코 그 노인을 찾아가 용기를 내어 청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이 그림을 자기에게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드린 것입니다. 노인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카네기는 이 그림을 일생 동안 소중하게 보관했고“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말을 생활신조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꿈이 깊은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꿈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물 때를 생각하면선 기도하고 준비하는 열정을 불태우게 됩니다. 이런 꿈과 소망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비록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열정이 진정한 꿈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꿈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표현하게 합니다.
옛말에 ‘병은 자랑해야 낫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병을 나타내면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같은 병을 앓았던 사람이나 그 병을 아는 사람으로부터 고칠 수 있는 방법들을 조언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꿈과 소망에 대하여 나타내고 표현하는 것은 기대감과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꿈과 소망에 대한 기대감이나 관심이 없으면 꿈을 밝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꿈과 소망이 있는 사람은 그 눈빛마저 초롱초롱하여 자신의 꿈을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당당하고 자신 있게 꿈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는 믿음입니다.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시며, 27절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하십니다. 즉 보이지 않고 아직 이루지 않은 꿈과 비전, 소망을 마치 보이는 것처럼, 이미 받은 것처럼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꿈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꿈을 나타내고 표현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본문 5,6절에서,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라고 했고, 9절에서도,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라고 자신의 꿈을 알렸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환경과 상황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압니다. 요셉의 생애에는 계속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라는 말이 따라다닙니다. 이는 요셉에게 주어지는 모든 환경들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자신의 꿈과 소망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믿는다면 확신 있게 표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꿈을 이루도록 힘쓰고 노력하도록 하십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나로 통하는 삶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행하는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도록 기다리거나, 자신의 꿈만 믿고 빈둥거리며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낭비한다면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로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눈에 띌 정도로 열심히 섬겼습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았으며, 운명이라 생각하고 자포자기 하지도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면서도 성실과 충직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에서 힘쓰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며, 찾는 자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시며,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보디발 장군은 요셉에게 모든 가산을 맡겼으며, 감옥의 간수장도 죄수 관리를 요셉에게 완전히 일임했습니다. 창세기 39:4절에서, “그가 요셉으로 가정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라고 했으며, 39:22,23절에서는, “전옥(典獄)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죄수들의 일에 대하여 성실하게 돌보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이 결실로 나타나서 결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은혜를 베푸셨으며, 요셉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실한 노력을 다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학기말 고사를 하루 앞둔 날, 강의실에서 기도소리가 들렸습니다. 교수가 지나가다가 누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나 하고 창문으로 바라보니 자기가 맡은 과의 학생이었습니다. 기특하다 싶어 기도를 들어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일 시험을 치를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다 알게 하시고 정답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안쓰럽게 생각한 교수가 학생을 불러서 “내일이 시험인데 기도도 좋지만 이제 공부를 하게나.”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학생은 “교수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시원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이튿날, 성경시험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밤에 기도하던 학생이 시험지를 받아들기는 했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갑자기 지혜가 떠올라 답안지를 제일 먼저 작성해서 제출하고는 유유히 시험장을 나갔습니다. 교수가 답안지를 받아 보니 기가 막힌 답이었습니다. 답은 아주 간단하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교수가 채점을 하는데 어떻게 채점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에게도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교수는 이렇게 채점해서 학생에게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니 100점, 너는 아무것도 모르니 0점”
우리는 하나님께서 능치 못함이 없음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빙자하여 우리의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거나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됩니다. 꿈이 있고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이루도록 요셉을 통하여 보이신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의 유월절엔 꼭 등장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마민’이라는 아름다운 노래인데, 아니마민이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도 그곳에 감금된 불행한 유태인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그런데, 그즈음 젊고 유능한 한 유대인 외과 의사가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가스실과 실험실을 향해 떠나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제노역 시간에 이 젊은 의사는 흙 속에 파묻힌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몰래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침과 저녁이면 그 깨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들이 와서 가스실로 보낼 처형자들을 골랐습니다. 나치들은 유리병 조각으로 피가 묻어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된 의욕에 넘치는 외과의사의 턱을 보고 차마 그를 가스실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으로 인해 아주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선입감을 주었기 때문에 나치들이 그를 죽이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나치스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그 죽음의 수용소를 떠날 때 그의 소지품은 단 한 가지 그 깨진 유리병 조각이었습니다. 그 유태인 의사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늦지 않으십니다. 시편105:17-19절을 봅시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고난 속에서 강하게 단련시키십니다. 우리의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성실하게 실천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요셉이나 유대인 외과 의사처럼 자신의 주변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자신의 힘과 능력이 닿는 데까지 힘쓰고 노력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말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꿈이 많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보이신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꿈을 깊이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힘쓰고 노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