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꿈을 이루는 사람1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412회 작성일 2009-06-25 14:00
*** 꿈을 이루는 사람 1  / 마태복음 15:21-28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사람의 생애 중에는 여러 가지 환경과 수많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기쁨이 있고 흡족한 환경을 만나는가 하면, 원하지 않는 슬픔이나 아픔을 주는 환경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당황하거나, 힘을 잃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도록 하는 환경이 소외 되고 버려지는 냉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족들로부터 버림 받고, 직장과 사회로부터 버림 받고,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걸리거나 죽음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차가운 시선이나 소외를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갈 곳 없고, 머물 곳이 없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비참한 인생입니다. 만일 내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런 냉대와 외면을 당한다면 아마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여러분도 때때로 ‘군중속의 고독’이라고 했듯이 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이런 차가운 마음을 느낄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자신의 꿈을 향하여 나아가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바로 이런 경우를 만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실 때였습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면서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귀신들린 딸을 고쳐 주세요.’라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도록 시끄럽게 굴어대는 여인을 구박했을 것입니다. 어찌나 방해가 되었던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청했습니다. 이 말은 ‘너무 시끄러우니 빨리 소원을 들어주어 보내시지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거절의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부르스’라는 왕이 이웃 왕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습니다. 좌절과 실의에 빠져 깊은 산골 조그만 오두막에 몰래 숨어 있었습니다. 오랜 싸움에 몹시 지친 왕은 절망 속에서 비통해 하고 있었습니다. “아! 정말 피곤하구나. 이젠 내 몸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까지도 끝이구나!”라며 탄식했습니다.
이렇게 슬픔과 탄식으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은행 알만한 거미 한마리가 처마 끝에서 나오더니 열심히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처마 밑이 꽤나 미끄러웠는지 거미줄 한 쪽 끝이 좀처럼 달라붙지를 않았습니다. 뒷다리로 거미줄 끝을 처마에 붙이고는 꽁무니에서 줄을 뽑으며 내려오다가는 ‘툭’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다시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서 또 붙입니다. 한 번, 두 번, 다섯 번… 열 번… 거미는 끈질기게 시도한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거미그물을 완성했습니다.
이를 끝까지 지켜 본 부르스 왕은 거미의 끈질긴 행동에 다시 용기를 내어 군사를 규합하고 훈련을 시켜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소리 지르며 예수님을 따라오던 여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 여인은 ‘가나안’ 여인으로서 이방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그 냉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와서 길을 막고는 엎드려 절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직설적으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냉대뿐만 아니라 무시하고 천대하는 투로 거절했습니다. ‘개’ 라니! 안 고쳐주면 그만이지 그렇게 험한 말까지 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그 자존심 구기는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간청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결국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답변을 받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신 사람은 불과 두 사람에 불과합니다. 한 사람은 마태복음 8:5-13절에 나오는 ‘가버나움의 백부장’이며, 또 한 사람이 본문의 ‘가나안 여인’입니다. 유대인들조차 따르지 못했던 큰 믿음의 사람이었던 이 두 사람은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조차 감동시킨 믿음과 끈질긴 인내로 꿈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에는 이 여인에게서 꿈을 이루는 믿음을 배워봅시다.

♥ 여인의 현실을 봅시다.

여인은 유대인에게 환영받을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딸을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딸의 고통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자신이 대신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의 꿈은 딸의 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 여인에게 있어서 꿈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기회가 왔습니다. 유일한 희망이던 예수님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수많은 무리를 뚫고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여인에게는 위신과 체면을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벽이 너무 두터워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리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부르짖음에 오히려 서러운 냉대만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딸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는 앞으로 가서 길을 막고 꿇어 엎드렸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바랐던 예수님을 만났지만 오히려 모멸감과 더욱 심한 냉대만 받았습니다.

이것이 귀신들린 딸을 고쳐보고자 했던 가나안 여인의 현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쉽게 이룰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꿈이 귀하고 비전의 가치가 높을수록 이루기는 더 힘이 듭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꿈을 낮추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8:1-8절에의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통하여 끈질길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7절에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에게는 포기하지 못할 꿈이 있습니까? 그리고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아니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가나안 여인의 적극적이고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너무나 냉랭했습니다. 여인의 처음 부르짖음에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표현했습니다. 한마디로 ‘무반응’입니다. 여인의 계속되는 부르짖음에 주변 사람들이 귀찮은, 혹은 동정심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예수님께 적당히 고쳐서 보내시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에 대하여서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저 여인은 내 소관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정도면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돌아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유대교를 믿거나 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개종자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여인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여인이 당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특히 간절함을 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여인을 자극합니다. 예수님 앞에 와서 절하며 간청하는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현대어 성경의 번역을 봅시다. “자녀들이 먹을 떡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개’를 ‘강아지’로 번역한 것이 다른 데, 이는 거리를 배회하는 사납고 더러운 개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함께 사는 애완용 강아지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런 무시하는 듯 한 표현을 하신 것은 이 이방 여인이 당시의 관습을 잘 알고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이방인을 개로, 유대인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언급하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따뜻하다는 것은 ‘개’를 ‘강아지’로 표현하신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이 당신께 대한 신뢰도와 간절함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시험은 ‘자격을 검증하기 위한 테스트’입니다. 신명기 8: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시며, 13:3절에서는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꿈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 자신의 꿈을 이루는 자세를 알아야 합니다.

여인의 현실도 보았고,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한 의미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소망의 성취 부분이 남았습니다. 크게 세 차례로 나누어진 예수님의 냉담한 반응은 점차 강도가 더한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사항은 여인의 자세 또한 깊이를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여인이 자신의 소망을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무반응에 대하여 더욱 간절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세 번째는 제자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냉대에 대하여, 여인은 예수님 앞으로 와서 길을 막고 엎드렸습니다. 네 번째는 신분을 구별하는 예수님의 차별에 대하여, 여인은 사실대로 인정하면서 강아지를 향하는 주인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 29: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십니다.

영국의 명 설교가인 ‘스펄전’목사님이 자기 제자들을 런던 거리에서 옥외집회를 열도록 보냈습니다. 날마다 그들이 보고하러 왔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성공했고 어떤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어느 날, 은사와 재능을 거의 못 갖춘 젊은이가 풀이 죽은 채 목사님께 왔습니다.
“목사님, 나는 왜 사람들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옥외집회에 참석해서 충실히 설교도 하고 죽을 힘을 다했는데, 나의 호소에 응답하는 사람도 없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잠시 그 젊은이를 보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영혼을 구원하시리라고 기대합니까?” 그 젊은이는 당황스러워 하며 말했습니다. “아니죠. 나는 추측 못합니다. 당연히 못하지요. 나는 그것을 거의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직 교육도 마치지 못했고. 다른 이들처럼 많은 은사와 재능도 없습니다. 아니. 나는 틀린 사람입니다. 그것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그 때 목사님이 소리쳤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결과를 못 보는 이유입니다.”

그 젊은이는 믿음의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결과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여인은 자신이 소망하는 믿음의 결과를 간절하게 기대했기 때문에 그처럼 끈질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신 대답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 딸을 고쳐주겠다.’든지, ‘귀신을 명하여 나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여인이 ‘기대하고 있는 소망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의 간청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니, 네가 온 목적을 이루고 가라.’는 의미입니다.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결과를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끈질기게 간청하십시오. 마가복음11:2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 말씀을 정리합니다.

‘월리엄 패더’가 쓴 글 가운데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년 시절에 길을 가다가 5달러(6,000원)를 주웠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그 돈이 정말 큰돈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그 소년은 돈의 위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돈을 얻기 위하여 땅을 보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길바닥을 보고 다니면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주웠습니다. 그가 평생에 주운 것들은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 수천 개의 동전들은 주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자가 되지 못했고 그것들을 줍느라고 아름다운 하늘도, 땅의 꽃과 새들과 푸른 초목을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을 넝마주이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은 돈을 줍는데 평생을 바치다가 넝마주이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넝마주이 인생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당장 눈앞의 이익과 쾌락을 쫓아다니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말입니다. 이들의 꿈은 촛불처럼 잠깐 깜박이다 꺼지는 일장춘몽과 같은 꿈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꿈을 기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과 어떠한 방해와 냉대가 있더라도 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소망하는 결과에 대하여 기대하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꿈을 이루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렇게 꿈을 이루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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