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유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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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6-03 17:35
*** 내가 사는 이유 / 고린도후서 5:11-21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5:11-21, “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졌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이 동물과 다른 부분은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는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차이도 있습니다.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급속도로 성장하여 빠르게는 3개월에서 늦게는 2년이면 새끼를 낳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람도 태어나서부터 빠르게 성장합니다. 그런데 3-4년이 되면 성적인 성장은 멈추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후에 다시 성적인 성장이 재개된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성장이 멈추는 10여년이 다른 동물과 전혀 다릅니다. 이 10여 년을 사람에게는 ‘학습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습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존에 필요한 기술이 학습되고 나면 다시 성적인 성숙이 재개되어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성장합니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결혼하기 전까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힙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생존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데는 많은 것을 투자하면서도 정작 더 중요한 사람이 사는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는 가르치기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신의 생존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는 이유와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나 존재의 목적을 잃으면 범죄하거나 방탕하거나 생명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에서 말씀하는 사람이 사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육체와 영혼, 겉 사람과 속사람의 관계를 질그릇과 보배에 대조시켜 보여 주었습니다. 육신은 날이 갈수록 쇠퇴하고 약한 인간성이 드러나지만, 영은 날로 새로워지며 오히려 영원한 세계를 향한 영광의 자리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본문을 포함하는 5장에 들어오면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소망’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장막 집”이라는 말은 ‘육체’를 말하며,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육신이 죽은 후에 성도의 영이 하나님과 함께 영광의 상태에 있을 천국’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2절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영원한 집’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땅에 있는 장막 집’의 생활이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은 ‘영원한 집’의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장막 집, 즉 사람의 육체는 낡아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망가지는 장막과 같습니다. 장막은 임시적이고, 가치성이 없고, 나약한 것이며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무너질 장막 집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앞 장인 4:18절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땅에 것, 즉 현세에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질 때 땅을 치며 후회하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집을 소망하면 산 사람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의 육신의 생활과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의 삶을 비교한 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보라. 이전 것은 다 지나갔고 보라. 내가 새것이 되었다.”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자신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이렇게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강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본문 14-15절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우리가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내가 사는 이유는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우리를 대변하는 ‘하나님의 의’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을 전후하는 말씀은 곧 복음의 요약 판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의미는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서 이 시간에는 ‘내가 사는 이유’ 또는 ‘존재 목적’에 대한 의미만 살펴보겠습니다.
♥ 사는 이유를 알려면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14-1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이 말씀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모든 사람을 대신 하여 죽은 한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십자가에서 너를 대신하여 죽었으니 너도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나도 죽었다.’라고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지금 내 안에 사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나는 나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지금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사신다.’라는 의식을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도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한 목소리로 따라서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었고, 내 안에는 예수께서 사신다.”
이 고백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고백이며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선언, 이 고백을 항상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이렇게만 살면 우리의 삶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가정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모두 ‘내가 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니 좋지 않은 말을 퍼뜨리고, 변명하고, 공박하고, 열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소리 질러 보십시오. 죽은 자는 칭찬을 해도, 비난을 해도 아무 대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 인정받고 대접 받고 싶어 하는 것, 이 모두는 다 자신이 죽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10절에서 종의 자세를 가르치시면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고백하는 성도는 ‘자신은 죽었고, 자신 속에 예수님이 사시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비난이나, 불이익을 당할 때에 분통이 터지고, 열이 받치고, 뚜껑이 열리면 “나는 죽었다. 나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나는 새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며 인내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로마서 12:19-20절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하십니다.
♥ 내가 사는 이유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본문 17-19절을 봅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어느 자그마한 교회에서 교인들이 서로 헐뜯고 욕하고 싸워서 교회가 잠잠할 날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왔는데도 싸움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부임한 목사님이 이 일을 위하여 깊이 생각하고 기도한 후, 주일에 강단 앞에 탁자를 놓고 그 위에 관을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설교하기에 앞서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앞에는 관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이 관 속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바랍니다.”
교인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관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관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관 바닥에 큰 거울을 넣어놓았던 것입니다. 교인들이 관을 다 본 후에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저 관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셔야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우리가 죽지 못해서 예수님이 사실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말씀에 깊이 깨달은 교인들이 한 사람씩 삶이 바뀌면서 교회가 화목하게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자신의 명예나 권세를 위함도 아니며, 자신의 죄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저주의 죽음인 이유는 인간의 죄의 대가로 치러진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의 대가로 생명을 얻게 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6: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葬事)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우리가 사는 이유는 첫째, 나 자신은 죽고 예수님으로 살라는 것이며, 둘째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나를 대신하여 위해 죽으신 예수님만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일을 해도, 주를 위해, 음식을 먹어도 주를 위해, 노래를 불러도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오직 주님을 위해 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집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은 죽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내가 죽는다는 것은 스스로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강권한다.”는 말은 ‘강하게 잡아끈다.’는 뜻입니다. 인사치레로 몇 번 권하는 듯 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강권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사양하더라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이 응낙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잡아끄는 것이 강권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마음을 이끌어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즉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 나도 내 안에 주님이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실 때에 오직 주를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인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에 심판을 면제 받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34절에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옛 사람이 죽고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즉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듯이 다른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3절에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강권하셔서 우리 안에 사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사랑에 매여 다른 사람을 주님의 사랑의 자리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이 말씀은 들은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은 죽었고 오직 예수님으로 살며,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만을 위해 사는’ 삶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5:11-21, “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졌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이 동물과 다른 부분은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는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차이도 있습니다.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급속도로 성장하여 빠르게는 3개월에서 늦게는 2년이면 새끼를 낳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람도 태어나서부터 빠르게 성장합니다. 그런데 3-4년이 되면 성적인 성장은 멈추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후에 다시 성적인 성장이 재개된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성장이 멈추는 10여년이 다른 동물과 전혀 다릅니다. 이 10여 년을 사람에게는 ‘학습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습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존에 필요한 기술이 학습되고 나면 다시 성적인 성숙이 재개되어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성장합니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결혼하기 전까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힙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생존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데는 많은 것을 투자하면서도 정작 더 중요한 사람이 사는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는 가르치기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신의 생존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는 이유와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나 존재의 목적을 잃으면 범죄하거나 방탕하거나 생명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에서 말씀하는 사람이 사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육체와 영혼, 겉 사람과 속사람의 관계를 질그릇과 보배에 대조시켜 보여 주었습니다. 육신은 날이 갈수록 쇠퇴하고 약한 인간성이 드러나지만, 영은 날로 새로워지며 오히려 영원한 세계를 향한 영광의 자리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본문을 포함하는 5장에 들어오면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소망’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장막 집”이라는 말은 ‘육체’를 말하며,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육신이 죽은 후에 성도의 영이 하나님과 함께 영광의 상태에 있을 천국’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2절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영원한 집’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땅에 있는 장막 집’의 생활이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은 ‘영원한 집’의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장막 집, 즉 사람의 육체는 낡아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망가지는 장막과 같습니다. 장막은 임시적이고, 가치성이 없고, 나약한 것이며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무너질 장막 집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앞 장인 4:18절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땅에 것, 즉 현세에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질 때 땅을 치며 후회하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집을 소망하면 산 사람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의 육신의 생활과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의 삶을 비교한 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보라. 이전 것은 다 지나갔고 보라. 내가 새것이 되었다.”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자신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이렇게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강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본문 14-15절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우리가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내가 사는 이유는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우리를 대변하는 ‘하나님의 의’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을 전후하는 말씀은 곧 복음의 요약 판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의미는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서 이 시간에는 ‘내가 사는 이유’ 또는 ‘존재 목적’에 대한 의미만 살펴보겠습니다.
♥ 사는 이유를 알려면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14-1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이 말씀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모든 사람을 대신 하여 죽은 한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십자가에서 너를 대신하여 죽었으니 너도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나도 죽었다.’라고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지금 내 안에 사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나는 나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지금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사신다.’라는 의식을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도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한 목소리로 따라서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었고, 내 안에는 예수께서 사신다.”
이 고백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고백이며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선언, 이 고백을 항상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이렇게만 살면 우리의 삶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가정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모두 ‘내가 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니 좋지 않은 말을 퍼뜨리고, 변명하고, 공박하고, 열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소리 질러 보십시오. 죽은 자는 칭찬을 해도, 비난을 해도 아무 대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 인정받고 대접 받고 싶어 하는 것, 이 모두는 다 자신이 죽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10절에서 종의 자세를 가르치시면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고백하는 성도는 ‘자신은 죽었고, 자신 속에 예수님이 사시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비난이나, 불이익을 당할 때에 분통이 터지고, 열이 받치고, 뚜껑이 열리면 “나는 죽었다. 나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나는 새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며 인내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로마서 12:19-20절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하십니다.
♥ 내가 사는 이유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본문 17-19절을 봅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어느 자그마한 교회에서 교인들이 서로 헐뜯고 욕하고 싸워서 교회가 잠잠할 날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왔는데도 싸움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부임한 목사님이 이 일을 위하여 깊이 생각하고 기도한 후, 주일에 강단 앞에 탁자를 놓고 그 위에 관을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설교하기에 앞서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앞에는 관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이 관 속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바랍니다.”
교인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관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관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관 바닥에 큰 거울을 넣어놓았던 것입니다. 교인들이 관을 다 본 후에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저 관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셔야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우리가 죽지 못해서 예수님이 사실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말씀에 깊이 깨달은 교인들이 한 사람씩 삶이 바뀌면서 교회가 화목하게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자신의 명예나 권세를 위함도 아니며, 자신의 죄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저주의 죽음인 이유는 인간의 죄의 대가로 치러진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의 대가로 생명을 얻게 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6: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葬事)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우리가 사는 이유는 첫째, 나 자신은 죽고 예수님으로 살라는 것이며, 둘째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나를 대신하여 위해 죽으신 예수님만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일을 해도, 주를 위해, 음식을 먹어도 주를 위해, 노래를 불러도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오직 주님을 위해 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집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은 죽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내가 죽는다는 것은 스스로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강권한다.”는 말은 ‘강하게 잡아끈다.’는 뜻입니다. 인사치레로 몇 번 권하는 듯 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강권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사양하더라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이 응낙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잡아끄는 것이 강권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마음을 이끌어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즉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 나도 내 안에 주님이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실 때에 오직 주를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인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에 심판을 면제 받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34절에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옛 사람이 죽고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즉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듯이 다른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3절에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강권하셔서 우리 안에 사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사랑에 매여 다른 사람을 주님의 사랑의 자리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이 말씀은 들은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은 죽었고 오직 예수님으로 살며,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만을 위해 사는’ 삶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